눈을 뜨고나서 몇 분이 지나서야 나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있었다.
방안의 침대에는 나 혼자 누워있었고, 차츰차츰 기억을 되짚어보니 전날받아 마신 술과 술집주인이 차례로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인간을 찾으라고 머릿속의 무언가가 아우성쳤다. 강간 당한 것에 대한 분노때문은 아니었다. 그 술이 무엇이었냐고 한시바삐 캐묻고 싶을 뿐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복도 양 옆에는 여러개의 방이 있었고, 오른쪽 끄트머리에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서 밑으로 내려가보니, 전 날의 그 술집이 보였다. 하지만 술집은 닫혀있었고, 사장이 언제쯤 영업을 시작할지 알수가 없었기에, 나는 계단에 앉아 그 남자를 무작정 기다렸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나자, 그 남자가 술집 앞에 나타나,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금씩 그 남자 옆으로 다가갔다. 그 남자는 자신이 강간한 여자를 보고도, 당황한 기색이 일절 보이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친절하게 내뱉었다.
나는 그 날의 첫 손님으로 그 술집에 들어갔다.
술 집 안은 불이 모두 꺼져있는 상태였고, 홀 중앙에 있는 수족관만이 연보라색 불빛을 뿜어내어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그 곳으로 걸어가, 옆에 있는 물고기밥을 집어 물고기에게 던져주었다. 나는 그 남자에게 다가가 나름 권위적인 말투로 전날 나에게 건넸던 그 술을 한잔 달라고 요구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가방 안에는 하얀 약봉지와 주사기가 들어있었다.
술집 주인은 내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이 단순히 칵테일이 아니라, 그 공허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 그 남자가 알려준 방법대로 주사기에 식염수와 가루를 넣고 팔에 꽂았다. 몇 번을 후벼댄 뒤에야, 혈관을 제대로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내 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눈을 떳을 때, 나는 토끼 문양이 그려진 담요를 덮고 소파위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서 남편은 조용히 티비를 보고 있었다.
이내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소파에 앉았다.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에 남편이 뒤를 돌아봤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가 주방에서 달그락소리를 내고 있을 때, 나는 소파 옆에 주사기와 찢어진 약봉지가 널부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은 내가 너무도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는 증거였다. 덕분에 남편은 분명히 그걸 봤을터였다.
나의 밑바닥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또 그것을 어디까지 보여주게 될 것인지, 앞으로의 알 수 없는 상황들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무마시켜주려는 듯 남편은 분노하지 않고, 널부러진 나에게 담요를 덮어주었으며, 굶주린 내 배를 채워주려 하고 있었다.
밥 먹어.
라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그 동안 묵혀있던 죄책감이 내 어깨를 사정없이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에 저항했다. 분노라는 것으로. 나는 당당해야 했다. 우리의 관계는 암묵적인 갑을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식탁 위의 반찬과 밥을 방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국물을 벽지에 흩뿌렸다. 그리고는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 멍청한 남자도 차라리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더라면, 속이라도 편했겠건만 그 멍청이는 말 한마디 없이 바닥의 반찬을 맨 손으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긁어모은 것들을 입 안에 집어넣기만 한다면 배고픈 거지가 따로 없었다. 그 꼴이 우스워 내 입에서는 실소가 터져 나왔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 양심없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 나는 도망치다시피 다시 현관문을 나섰다.
술 집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술집주인에게 돈은 있으니, 마약을 더 내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친절하게도 어떠한 것도 받지 않고, 내게 마약을 일정량씩 주었다. 그렇게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자의 상냥한 어투는 명령조로 바뀌었고, 처음의 친절한 태도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는 내가 마약에 완전히 종속 되어버렸을 때, 그제서야 물건에 대한 정당한 값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내 수중에 있던 돈은, 남편이 벌어들인 돈이었으며, 남편의 돈에는 더이상 손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능숙하게 자존심을 버리고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그것은 남편에게 더 이상 죄책감을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이에 대한 생각들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 남자는 나의 부탁에 한 가지 조건을 내밀었다.
2층에서 자신의 고객들과 하룻밤을 보내라.
나는 그 조건에 한참을 망설였지만, 외로운 사람들에게 밤 동안 술잔을 기울이며, 그저 말 동무를 해주면 될 뿐이라는 사장의 감언이설에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외로운 사람들에게 나는 내 비쩍마른 몸뚱이를 굴릴 때에만 이용가치가 있었다.
처음 하룻 밤을 함께 보낸 남자는 40대 중반의 기업가였다.
그 남자는 자신의 성공담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자기 혼자 즐겁게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가끔 나에게 건배를 청했는데, 내가 순진하게 그 잔을 받아들고, 남김없이 들이켰을 때, 나는 의식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흩어지고 마침내 소멸되는 과정을 느꼇다.
의식을 잃었을 때, 그 남자가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는 어떤 멍청한 여자라도 상황을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술 집 문은 닫혀있었고, 그 때문에 보수는 저녁이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다.
다른 남자와의 동침이 그렇게 두 번이 지나고, 세 번이 지났다. 세 번이지나고 네 번이 지났다.
그리고 그 술집은 어떤 의미로서의 직장이 되어버렸다. 노동을 하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직장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