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군시대
한국(桓國)의 분열
부여 · 북부여국의 형성
한인들의 이동
신시시대부터 이루어진 중화민들의 이동
중원인, 그들은 누구인가?
한인들이 이민족에게 지식을 전파하고 그들을 일깨워준 것은 어쩌면 화근이랄 수도 있었다. 그들은 한인들에게 보다 많은 지식을 공급받았다. 그리고 그 지식은 지혜를 부리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들은 지혜를 얻고 나자 더 이상 한인들의 제후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한인들은 자신들보다 못한 세력에게는 함부로 무력행사를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이민족에게 있어서는 종이호랑이의 모습이었다.
북방의 수많은 이민족들은 마한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최초의 마조선은 북부여였다. 강력하게 변화된 북부여는 마한이라는 황제국의 주체세력이 되어 드넓은 북방의 강역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비리인·선비인·구막인까지도 포함되었다.
후에 서백제가 된 번한땅에서는 선군시대에 이민족과 한인들이 분명하게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번한의 한인들은 기름진 옥토를 차지하고 이민족을 모두 내륙으로 몰아냈다. 내륙은 비옥한 곳이 별로 많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중화족을 분노케 했다. 중화족은 무슨 수를 써서든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번한은 후세의 서백제이다. 번한의 역사, 그리고 중화민족의 역사, 그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역사이다.
중화인들은 분명 번한의 제후국이며 한인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화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번한뿐만 아니라 그들이 현제 머물고 있는 곳은 물론 옛날에라도 머무른 적이 있던 곳은 모두가 그들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번한이 이민족이고 외부세력이었다. 분명 번한땅에 들어와 이민족으로 살았으면서도 그들은 번한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중화내륙과 번한땅은 전부가 중화인의 땅이라는 사상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되니 중화인은 역사까지도 번한의 역사를 가져다 그들의 일부 역사로 삼았다. 그러고는 번한의 세력 때문에 황제라는 칭호는 할 수 없다 하여도, 내심으로는 자신들이 황제라는 사상으로 살아갔다. 결국 역사 자체가 번한의 역사인지 중화의 역사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세력이 완전히 둘로 나뉘게 되었다.
진정 그 땅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번한의 땅일까, 아니면 중화의 땅일까?
여기서 만약 번한의 힘에 의해 대륙이 통치되고 중화인들을 흡수하였다면 역사는 분명 번한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대했던 번한의 역사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소멸되어갔다. 반면 중화인들의 힘은 나날이 커져갔다. 중화의 모든 문화는 번화의 문화였다. 의복, 농경법, 예절까지도 번한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중화의 역사 전부가 번한의 역사라 할 수 없지만 최소한 번한땅에서, 백제땅에서 일어났던 흐름은 모두 번한의 것이었다.
그러나 번한의 역사는 중화의 역사와 혼합되어져 번한은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번한은 중화의 땅속으로 깊숙이, 깊숙이 묻어져 갔다. 강대했던 고도의 정신문명은 중화인들 속에 중화되어갔다.
본래 '중화'라고 하는 것은 번한인들이 부르던 말이었다.
그것은 중심이란 뜻이 아니라. 그들이 번한인과 너무나 조화를 잘 부리며 빠른 시간 내에 동화될 수 있는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그들은 번한의 역사를 그들의 역사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모두는 세 가지 존재에게 속고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첫째 자기 자신이요. 둘째는 타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역사의 흐름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역사에 속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속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속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곧 울분이었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이 남아 있는 한 성인군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세월은 말없이 흐른다. 우리는 말없이 흐르는 세월을 살아가면서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왜곡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깨어난 자, 깨달은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옛 번하땅, 지금으로 말하자면 허베이성(河北省)·산둥성(山東省)·산시성(山西省)·허난성(河南省)·안호이성(安徽省)·창수성(長水省)·저장성(浙江省)·후베이성(湖北省)에 걸쳐 있는 번한의 흐름, 이제 누가 무어라 해도 밝혀질 때가 되었다. 진실, 진실의 역사가 이 순간부터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잠시 기다리며 주시하면 된다.
번한의 역사가 그랬듯 마한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강성했던 마한도 본래의 조선의 뜻과는 반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옛 연방자리를 지키고 있던 우르국인들은 이민족들과 혼혈이 되어 새로운 스키타이 종족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선비족은 흉족을 탄생시켰으며, 새로운 이민족 타타르가 이동하며 투르크와 키르키즈 모두가 이민족과 차츰 혼혈이 되어갔다. 선군시대 초기에는 대부분이 이민족들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인사회로 이동하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민족도 될 수 없는 혼혈족이 되었다.
선군시대가 시작되면서 마한국은 이민족을 제후국으로 받아들이고 정착민으로 살아가도록 함께 동시에 최후에는 조선의 권한 속에 넣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마족이며 사냥을 하면서 살아가는 종족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마한인들의 울타리를 거부하며 서쪽으로 이동하여 갔다. 이미 초기에 북방의 이미족들은 한인과 피가 섞이기 시작하였고, 그후 서양에서 다시 동양으로 이주하던 BC 10세기경에는 북방의 세력들 대부분이 혼혈로 변해 있었다.
최초에 마한조선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몽고의 두투른 산맥이 있는 곳. 그러나 그곳은 비옥한 땅이 아니었다. 마한은 드넓은 강역을 다스릴 목적으로 그 수도를 두 곳으로 나누게 되었는데, 본래의 본거지는 북부여이며 남으로는 남옥저였다. 남옥저는 마한뿐 아니라 번한과 진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이곳은 선군시대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말하자면 삼한의 본부라고나 할까? 이곳이 바로 진한의 선군의 자리였다. 드넓은 강역, 북으로는 마한을, 남으로는 번한을 다스리고 내부로는 한인들의 사회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중화인이 변하듯, 북방의 이민족들이 변하듯 한인들 사회에서도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우리'라는 마음의 변화였다. 왕검께서 개국하기 이전 이미 한인은 한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이민족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신뢰할 수 있었고 어진인간들이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말하지 않아도 제도하지 않아도 한웅시대로부터 내려온 한인들의 멋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인들은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도란 바람에 의해 일어나는 법, 선군의 역사 그 자체가 바람을 일으켜야 했던 역사였다. 강풍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고요한 바다를 이루던 마음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출렁이는 파도는 서로가 부딪쳤다. 서로가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파도는 서로 더 높이 솟아오르려고 몸부림을 쳤다. 마음이라는 거대하고 끝없는 바다는 전체가 요동치며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딪쳤다. 순간순간 물의 형상이 변화하고 보기에도 무섭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바다, 물 그 자체는 변화가 없었다.
선군의 역사라는 아…… 아…… 슬픔의 바람이여…… 거침없이 불어오고 있는 현실 앞에서 한인들은 피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바람이었다. 서서히, 그리고 오묘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번뇌의 바람이요 암울진 모습이 담겨져 있는 매우 찬 공기였다. 선군의 바람은 말로도 글로도 다할 수 없는 역사이다.
그것은 비밀의 역사이며 비기의 역사이기도 하다. 선군시대의 존재들은 대다수가 역사를 남기기를 원치 않았다. 기록이야 어떻게 이루어지든 그것은 전혀 문제꺼리가 되지 않았다.
선군의 바람 속에는 시작이 9나라가 이루지는 뜻이 담긴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최후에 또다시 9나라가 된다는 뜻이 담긴 바람이기도 하였다. 이미 선군의 존재들은 바람을 초월하고 역사를 넘나들고 있었기에 흐름 그 자체가 하나라는 근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선군이 아니다. 그대는 근본을 모르고 있다. 근본을 모르고 있는 그대는 파도에 휩쓸리고 늪 속에 빠져서 몸부림치고 헤매고 있다. 늪 속에 빠져서 몸부림치는 가운데 기록된 역사를 앞에 놓고 우리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늪의 역사이다. 오직 늪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죽고 죽이는 어리석은 흐름의 연속일 뿐이다.
늪 속에서는 진실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대의 마음이 늪일진대, 과연 그곳에서 얼마나 진실의 소리가 나올 것인가? 그대는 선군의 바람을 알고나 있는가? 오직 늪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늪의 역사가 진실인 양 지독스럽게 오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더 안타깝게 하는 것은 늪의 역사마저도 왜곡시켜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선군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선군의 바람 속에는 우리들의 삶의 역사가 들어 있다. 선군의 바람이란 꿈의 바람이요 늪의 흐름이었다. 그대가 벗어나려 한다면 마음의 문을 만들지 말라. 모든 것을 허물어버려라. 늪 속에서 헤어 나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선군, 그들은 우리 영혼의 스승들이었다. 선군은 언제나 그대와 함께 하고 있다. 그대가 혹 선군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하여도 그들은 지금껏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대라는 마음이 존재하는 한 미소는 영원할 것이다.
선군의 바람, 그것은 바로 그대 자신의 바람이다. 바람이란 바로 그대의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고 망각으로 가는 것도 바로 그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라는 거친 바람과 파도 속에 스승이 애정 어린 숨결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한인시대에도 한웅시대에도 선군시대에도 함께하였던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 그들의 자비가 있었기에 우리라는 마음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모질게 요동치고 완전히 그대 자신을 망각하였을 때 인류는 전멸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껏 전멸되지 않은 속에서 이어져가고 있다. 그대가 완전히 망각할 적마다, 그리고 가장 큰 슬픔을 당하고 있을 적마다 스승의 숨결이 그대를 감싸주었던 것이다.
지구성에는 오랜 과거부터 스승이 있었다. 잠들지 않는 진정한 스승이 우리의 곁에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진한과 마한, 그리고 번한의 황제 모두가 스승이라 하지만 그들은 자재신이 아니다. 이들 존재 뒤에는 진정한 스승이 있었다. 잠들지 아니하는 바로 그 존재이다. 하지만 그 스승들을 말할 수는 없다. 그분들을 말하지 않는 것이 곧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아직도 존재하고 계신다. 그대라는 존재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미소를 머금고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는 지금껏 자재신의 자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영혼의 스승을 향하여 무어라 했는가? 그리고 선군의 존재를 어떻게 여겨왔는가? 그대는 선군의 이름이나 알고 있는가? 삼한의 황제들을 말하자면 보살과 같은 존재였다. 보살이란 중생을 이해하며 부처의 자비를 함께하는 존재였기에 바로 그 같은 상태의 인물이 맥을 이어가며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진정 그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가야 할 방향과 가고 있는 목적지를 알아차렸을 때에 그대는 변할 것이며 역사 또한 달라질 것이다. 어리석은 싸움은 스스로가 그만둘 것이며,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또다시 고요 속으로, 명상 속으로, 심연의 그곳으로 가고 있음을 그대는 알 것이다. 그것이 스승의 뜻이요. 자재신의 뜻이다.
아-- 아-- 선인의 나라여! 그들은 12연방에서 9나라로 나뉘어졌으니, 그것은 지고한 존재의 뜻과 함께 이루어짐을 나타낸 것이었다. 9나라란 부여가 둘이요, 옥저가 둘이요, 숙신과 낙랑, 그리고 청구와 남국, 구려였다. 이들 나라는 왕검이 오기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한인들의 나라였다.
지금의 위치로 부여는 내몽고 전역을 차지한 매우 강성했던 국가였다. 북부여는 부르노이 호수로부터 서쪽의 산맥 아래를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고, 부여 못지않은 매우 강성했던 국가였다. 아니, 부여만이 강성하였던 것은 아니였다. 9한 모두가 강성했다. 약소했던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단순히 병사와 무기를 많이 갖고 있어서 강성했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강함을 말함이요. 그 어떤 환란의 역사가 밀어닥친다 하여도 변하지 않겠다는, 그리고 물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강함이었다. 그 때문에 문화를 중요시하였고, 정신적으로 가장 앞선 이를 추앙하여 각 고을의 군장으로 삼았다. 물질적으로 강함이 아닌 정신적 강성함을 9한 모두는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북옥저는 바이칼 호수 우측의 드넓은 곳을 터전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었고, 남옥저는 오대산#1)으로부터 베이징, 그리고 부여와 인접된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1) 북경 근처의 오대산맥(五臺山脈)의 산
낙랑국은 옥저와 베이징을 국경으로 하여 남으로는 기름진 옥토의 평야를 차지하고 있었고, 북으로는 부여와 국경을 같이하고 있었다. 남으로는 구려국이 양쯔강(揚子江) 이남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남국은 대다수가 지금의 황하(黃河)를 중심으로 하여 살았으나 산둥성의 전역과 장쑤성(江蘇省)에 이르기까지 자리를 차지하였다. 남쪽나라 중에서 가장 강력하였던 나라는 청구였으나, 그 어느 나라보다도 이민족과 치열한 싸움을 했던 나라였다.
치우가 어느 날 순수 구모액국인만 데리고 티벳으로 가던 때 청구국의 힘은 급격히 축소되어야만 하였다. 그래서 많은 수가 남국과 구려로 이주하였다. 그래도 청구는 강성하였다. 그 후 청구는 대부족 형태로 여러 곳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비록 부족의 형태로 남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청구인이 머물렀던 곳은 지금의 허난성과 산시성, 그리고 안후이성의 자리이다. 이들은 27개 부족으로 나뉘었는데, 드넓은 땅이 청구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침치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강성하였던 곳은 지금의 안양(安陽)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원의 세력과 매우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그것은 치우와 황제(黃帝)의 싸움으로부터 비롯되는 역사였으니, 거기에는 언어를 초월한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이때에는 중화대륙에서도 중화민들이 한인들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지만, 북만주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인들과는 조화롭게 살아갈 수가 없었다. 한인들의 마음은 이미 정점까지 도달하였던 성숙한 이들이었고, 중화족들의 마음은 아직도 욕망으로 가득 찬 무리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인들은 중화인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과거의 자신들을 보는 것 같기에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화인들은 한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한인들의 모습이 매우 신비스러웠다. 끝없이 배울 점이 눈에 보였고, 무엇보다도 한인들의 신통력이 두렵기만 했다. 한인들은 대부분이 대부족의 형태로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중화인들은 소규모의 부족으로 살아갔다. 아니, 씨족을 이루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 옳겠다. 이때에 이들에게 신인(神人) '복희'씨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제도하기 위한 신의 공사이기도 하였다.
이때에 중화인들은 청구와 구려·남국(양운국)의 지방에 골고루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가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씨족들끼리 허구한 날 싸움을 일삼았다. 그 뒤를 이어 '여와'가 등장하였고, 또다시 '신농'씨가 등장하였다. 세 존재의 역할은 한인들과 좀더 가까이 지낼 수 있기 위한 것과, 씨족사회보다 규모가 좀더 큰 부족사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세 존재는 눈부신 후광에 감싸인 채 중화인들의 지도자로서 존재하며 부족사회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때에 복희·여와·신농 이 세 존재를 따르던 한인들은 상당수에 이르렀다. 3대를 처치는 동안 중화인들은 부족국으로 만들어졌고 제법 나라의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중화인들의 부족에서 그 우두머리와 이끌어 나가는 무리는 언제나 한인들이었다.
신농씨 때에 이르러 중화대륙의 중화 부족수는 105부족이나 되었다. 그것이 한곳에 집결된 것이 아니라 중화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105개의 부족국을 이루고 있는 중화인들의 우두머리들과 지도세력이었던 한인들, 즉 복희와 여와·신농을 따르던 한인들과 부족의 중화인들 사이에 하루가 다르게 갈등이 심화되어갔다.
한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중화인과 피를 섞는 일이 없었다.
중화인들 입장에서는 한인들의 피를 이어받아 자신들도 한인사회의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중화인들의 숙원이었다. 그들은 어쩌면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인들의 말을 따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족국으로 변하였어도 한인들은 여전히 한인들끼리만 혼인하였고, 결코 중화인들과 피를 섞는 일일 없었다.
그 같은 감정은 신농씨에 이르러 폭발하게 되어, 드디어 각 부족에서는 그간에 부족을 이끌어오던 한인들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신인으로 추앙받던 신농씨도 더 이상은 중화인들을 제도할 수가 없었다.
내륙에 위치한 중화인들은 부족의 우두머리인 한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후에 시체를 토막 내어 청구국으로 보내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부인들을 잡아 가둔 후에는 무수히 겁탈하여 자기들의 씨앗을 심었다. 이리하여 한인과 중화인 사이에서 집단으로 튀기들이 태어났다.
치우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치우는 신농과 마주앉게 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젊고 패기만만한 자가 있었으니, 그가 곧 황제(黃帝)였다. 그러나 그는 튀기였다. 중화인들 사이에서는 희망이자 우상이었고 믿음직스러운 미래의 지도자였다.
그가 태어나기까지의 정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중화의 여인 중에서 가장 미색의 여인을 뽑아 10여 년 동안 말도 하지 아니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목욕재계를 한 뒤 한인들의 일곱 신들에게 무릎이 닳도록 기도를 하였다. 결국 여인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남국#1) 최대 부족의 왕이었던 '써전'이 나들이 행차 도중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의 소원은 고통 없이 죽는 것이었고, 다음에 태어날 때에는 한인으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써전은 여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녀와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소원대로 아이가 태어난 후에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신통력을 부렸다. 결국 여인은 써전의 씨를 잉태하였고, 황제를 낳게 되었다. 이때에 여인은 '티모라(예쁜 여자)'라고 불리었다.
#1) 치우가 있던 때에는 부족이었으나 왕검이 오기 전 남국이 되었다.
황제는 어머니의 정성이 헛되지 않게 태어나면서부터 한인들 이상으로 뛰어남을 보였다.
황제가 태어난 이후 써전의 부족에서는 써전의 권고로 중화인들에게 많은 한인들의 씨 수출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신농과 치우가 마주앉아 있던 그 시기에는 이미 황제 또래의 튀기들이 상당수에 달해 있었다. 특히 황제는 튀기들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우상이 되어 있었다.
치우가 신농씨에게 말했다.
"그대 심중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여 보라! 지금 한인들은 중화인에게 많은 수가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벌써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저 중화인들은 알게 모르게 아직도 한인들을 죽이려 하고 있다. 한인들은 어리석어서 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인간들이기에 초연하게 중화인들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는 것뿐이다."
거구의 몸집에 콧수염과 구레나룻이 텁수룩한 치우는 인물 중의 인물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천막을 걷어 올렸다. 천막 밖으로는 황허의 물줄기가 고요히 흐르고 있었고, 비가 내린 뒤의 맑고 쾌청한 날씨가 시야를 더욱 밝게 하였다. 사물 모두가 깨끗하게 씻어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치우의 몸집은 차라리 웅장했다.
"자, 신농씨. 조용히, 그러나 도도히 흐르는 저 강물을 보시오. 얼마나 자연스럽소. 태초에 복희 어른은 저 강물처럼 행동했어야 했소. 중화민족은 어디까지나 중화인이오. 저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중화인들은 스스로가 변화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인들과 같이 호흡할 수 있어야 했소. 그러기 이전에는 한인들에게 정신적으로 배워야 하고…… 또한 한인들은 가르침을 폈어야 했소.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인 것이오. 비록 중화인들이 한인들의 하인이나 노예와 같은 일을 한다 하여도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오. 저들은 그렇게 배워야 하며, 그것이 순리일 것이오. 그들도 어느 날 씨족을 버리고 더 나은 형태로 나라를 꾸밀 것이고…… 그렇게 흐름을 해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오. 부족의 형태로 성장하기에는 그들의 마음은 아직 때가 이르질 못하였소. 헌데 복희 어른의 뒤를 이어 여와씨, 그리고 신농씨는 자연스러움을 위배하였소. 그것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오?"
신농씨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않고 잠자코 치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농씨에게도 그 어떤 사명이 있었다. 이미 신농은 신인이었고, 그와 같은 이치를 모르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와 같은 알고 있는 우를 만들었던가?
그것은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역사적인 약속이었다.
마침내 신농이 치우에게 대답했다.
"치우 어른! 저는 여와씨에게 가장 빠른 방법으로 저들이 나라를 세우는 방법이라 들었습니다."
치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신농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때에 젊은 황제가 치우에게 말했다.
" 치우 어른, 어떻게 하실 겁니까? 중화인들이 한인들을 저렇게 무참히 죽인 것에 대하여 어른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역사의 뜻이 가장 빠른 방법으로 나라를 세우는 방법이라면, 나는 그것을 돕고 싶다. 젊은이여! 어서 나라를 세우도록 하라!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보복을 받아라. 나의 보복은 매우 무서울 것이다."
이때에 나누었던 대화는 이것뿐이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치우는 병사들을 이끌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중화인들을 죽여나기 시작했는데, 105개의 중화부족을 모두 휩쓸어버렸다.
전쟁은 두 차례에 걸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8년간이었고, 두 번째는 4년 동안 치러졌다. 그 바람에 105개 부족은 66개의 부족으로 줄어들었다. 치우는 이때에 능지처참으로 죽여 버렸다.
그러나 치우는 두 번에 걸쳐서 승리를 하였어도 젊은 황제에게서는 한 번의 항복도 받아내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황제의 숨통을 열어놓는 행위였다. 단 한 가지도 치우를 능가하지 못했던 황제는 늘 당하기만 하였다.
황제는 싸움에 패한 후 남옥저와 낙랑에 각각 도움을 청하였지만 두 나라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다. 황제는 대대적인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치우에게 항복한 일이 없었고, 오히려 청구의 한인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싸움은 끝났다. 치우는 구모액국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일행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치우의 왕국을 세웠다.
황제는 튀기였다. 따라서 부족에서는 한인의 피가 섞인 튀기들이 서서히 지배세력으로 변해 갔다. 황제로부터 시작한 오제#1)의 역사는 중화인의 몸속에 한인들의 피를 섞는 역사였다.
#1) 중화의 3황(三皇: 복희·여와·신농) 5제(五帝: 황제·전욱·제도·요·순)
황제의 뒤를 이은 '전욱', 그리고 '제도'와 '요'·'순'을 거치는 동안 청구인들은 정말 많은 일을 하였다. 나라형태가 서서히 갖추어져갔다. 대다수가 이미 한인들의 피가 섞여 있는 상태였으니 한인들도 이들을 실질적으로 제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제를 거치는 동안 남국과 구려에 있는 중화족들은 차츰 서쪽으로 이동하여 청구인들이 부족형태로 남아 있던 곳으로 왔다. 지금의 허난성·난시성·안후이성 자리에서 이렇게 청구부족과 중화인들이 저마다의 부족을 이룬 채 치우와 결전하기 이전보다 훨씬 사이좋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남국과 구려국에서 살던 순수 중화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미 한인들의 피가 섞여 있는 중화족으로 파고들어갔다. 이것이 더 이상 태평성대를 누릴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순수 중화족은 남국과 구려에서만 온 것은 아니었다. 만주에서도 상당수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선군시대가 시작되면서 한인들이 선군의 명에 따라 중화인들을 한곳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강제성이 동원되었었다. 결국 중화족은 청구의 터전으로 모여들었다.
끝없이 청구로 모여드는 이들은 모두가 철부지 인생들이었고 제도하기 어려운 인간들이었다. 지극히 태평스러운 요순의 시대는 밀려오는 순수 중화인들에 의해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싫었다. 이제 청구인들과 점점 더 형제국처럼 되어가는 순간인지라 순수 중화인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었다. 이제 반은 중화인이요 반은 한인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은 북방의 만주에서, 그리고 동쪽에서 밀려오는 세력을 거부했다.
한인의 피를 이어받고 한인들과 형제처럼 지내게 된 그들로서는 지금의 행복한 나날과 그 평화로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한인의 혈통이라 하여 '은(銀)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위협과 강제, 그리고 설득과 미소가 어우러진 채 내쫓김을 당하게 된 만주의 중화족들…… 그러나 거기에는 너무나 슬픈 애환이 담겨져 있고 쓰라린 추억을 간직한 이야기였다. 왜냐 하면, 이들이 쫓겨난 시기는 왕검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인데, 대다수가 이미 한인들의 피가 섞여 있는 상태였다. 한웅시대에 걸쳐서 이들이 한인들에게 받았던 그 아름다운 애정의 숨결은 어머니의 그 무엇과도 같은 것이었다. 드넓은 만주벌판, 그곳에서 한인과 더불어 행복감에 젖어 살았었다. 마치 도인들 틈에 끼여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들은 행복했다. 떠나기가 싫었다.
그러나 이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고, 삶이라는 시간의 연극이 중화족들을 슬픔 속에 떠나도록 유도하였다. 가족들을 이끌고 씨족의 무리를 이루며 먼먼 미래에 하늘나라에서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자는 약속을 하면서 한인들과 헤어졌다.
만주의 중화족들, 이들의 모임이 하(夏)나라의 시초가 되기 시작했다. 이들도 이미 상당수가 한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남국과 구려에서 넘어온 중화족들이 또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주(周)나라를 이루는 시초가 되었다. 이들 역시 한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가 상당수에 달해 있었다.
중화인들 간의 많은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인의 피를 지닌 자들과 순수 중화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차별의 갈등이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에 하나라족과 은족, 그리고 주나라족들의 내부에서는 순수혈통과 튀기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크나큰 내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때에 순수 중화인들은 순수 중화인들만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가며 자존을 지킨다는 뜻에서 지금의 산시성의 태백산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만의 민족정신을 지키면서 변하지 않는 순수혈통을 지킨다는 자존심이었다.
끝없이 모여드는 순수혈통인들, 이들은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워 더 이상 하·은·주족의 틈에 끼여 그 어떤 갈등어린 삶을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또다시 주장이 양분되어 분열되었다. 둘로 분열되어 하나는 티벳으로 이동하여 갔고, 또 하나는 양쯔강 이남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려국과 인접한 곳까지 접근하여 구려국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상태에서 나라도 아닌 본래의 씨족사회를 구가하면서 살아갔다.
그런데 티벳으로 이동해 간 많은 수의 중화족들…… 이들은 또 다른 크나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들이 티벳으로 이동하여 가던 때에는 요순시대가 끝나던 때였으니, 티벳에는 벌써 먼저 들어온 한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순수(우르인들), 그들은 지금의 티벳고원을 중심으로 전통문화와 혈통을 보존키 위하여 드높은 고원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그래서 중화족들이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한 지금의 중국 칭하이성(靑海省)에는 치우가 이끌고 간 구모액인들이 분지를 중심으로 하여 6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중화인들이 와서 발붙일 만한 곳이 없었다.
특히 이 당시 우르인들은 히말라야 산맥 너머에 있는 인도북부의 기름진 땅에 살고 있는 동족 우르인과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머나먼 미래에 우르국인들이 해야 할 정신세계를 펼치는 일에 관하여 논하면서 그들은 더욱 돈독한 우의를 다졌다. 그들은 같은 혈통이며 동족이었다.
티벳에 있던 우르인들도, 그리고 인도 북부에서 살아가는 우르인들도 수메르인들도 인도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어줄 위대한 영혼의 스승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를 넘어선, 인종을 초월한 오직 마음이라는 무지 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자재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선군의 나라에도 영혼의 스승이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애정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영혼의 스승은 있었지만, 이미 티벳과 히말라야를 넘어간 한인들은 역사라는 바람을 타고 싶지가 않았다. 역사도 초월하며 오직 정신세계만을 이끌어주는 영혼의 스승을 기다리게 되었다.
아-- 인간이 바라고 간절히 기다리는 것,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재신에 대한 그리움이리라. 아-- 자재신이여! 영원한 불꽃이여! 잠들지 아니하며, 샛별 같은 각성으로 무지스런 인간을 바라보시는 불멸의 스승이여……
한인들은 오직 정신세계만을 이끌어줄 위대한 스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자재신을 향한 간절한 희망은 더욱더 깊어만 갔다.
중화인은 티벳에서 정착하려 했다. 하·은·주족들보다도 더 거대하게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려 했다. 씨족사회를 과감하게 없애버리고 부족의 형태조차도 사라지게 하여 단일국가로써 강력한 나라로 만들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기와 앞선 문호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이미 티벳에서는 우르인들이 정착하여 고유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중화인들의 상상을 넘어선 문화였다. 그들 중화인들은 최초로 우르인과 접촉을 시작했다. 우르인들의 씨앗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르인들로 부터 문화를 배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중화인들 입장에서 볼 때에 자신들은 몽둥이와 같은 칼이나 도끼 정도를 만드는 수준에 불과하였지만, 티벳고원에 자리를 한 우르인들은 달랐다. 쇳물을 다루는 기술은 이미 청동마차와 철기로 된 마차,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모형은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술병, 칼, 그릇…… 이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정확한 태양력, 그리고 월력·별자리의 이동·인간의 사주(四柱), 또한 인간의 성 지침서 등등…… 너무나 고도의 학문이었다. 그중에는 금속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화인들은 바로 우르의 그 고도의 문화를 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화인들의 너무나 성급한 어리석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과연 우르인들이 그와 같은 문화를 아직 받아들일 준비조차 하지 못한 중화인들에게 어떻게 주겠는가? 아니, 중화인들이 우르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에까지 왔다 하여도 우르인들은 선뜻 내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이제 도끼날 정도밖에 만들 수 없는 자들에게 어떻게 금속활자를 만들어주며 고도의 지혜를 요하는 천문과 지리·의술을 가르칠 것이며, 청동마차를 만드는 법을 전수시킬 것인가?
순수혈통을 지킨다는 그들의 뜻은 좋았어도 역시 중화인들은 무식하였다. 우르인들은 거부했다. 아니,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거부하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
우르인들은 싸움을 싫어했다. 12연방의 어느 한인들보다도 어진 사람들이었고, 싸움을 싫어하는 나라였기에 티벳의 고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벳의 중화족들은 어느 날 선전포고도 없이 갑작스레 우르인들을 공격해 왔다. 그것은 약탈의 차원도 아니요 죽인다는 행위도 아니었다. 이때에 티벳에 있던 우르인들은 38만여 명이었는데, 중화의 갑작스런 기습을 막느라 22만여 명이나 되는 우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학살과도 같은 행위였다. 이 소식이 드디어 치우가 이끌고 간 구모액인 후예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티벳땅을 붉게 물들이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구모액인들은 '욜라'장군의 지휘하에 중화인들을 마치 파리 죽이듯 그렇게 무수히도 죽어나갔다. 티벳으로 이동한 중화의 숫자는 200만에 달한 숫자였건만, 구모액인이 나타남과 함께 꼭 절반이 줄어들었다. 치우의 후예들은 참으로 용감하였다. 그 용맹한 기질은 과거는 물론 앞으로도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이제 우르인들은 16만으로 줄어들었다. 너무나 어이없고 기막힌 죽음이었다.
우르인들은 16만에서 양분이 되어 티벳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아득한 후세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는 헤어지게 되었다. 그중 10만 명에 달하는 우르인은 히말라야를 넘어 먼저 도착하여 정착한 우르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었고 6만의 숫자는 남으로 이동하여 밀림 속에 살면서 오래도록 우르인의 전통을 지킬 것을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은 양분되면서 티벳에 우르인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부수어버렸다.
그 자리를 중화족들이 차지했다. 그러나 중화족들은 그 무엇도 손에 쥘 수가 없었다.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우르인이 가고 난 후 중화인들은 100만에 달하는 숫자가 죽었다는 데 대한 분노를 새기면서 구모액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욜라의 아들 '시바'에 의해 중화인들은 무수히 죽음을 당했다. 다시는 넘볼 수 없도록 죽음을 당한 후에 구모액인들에게는 접근을 못 하게 되었다.
본래 구모액인들은 치우를 천황으로 여겼다. 치우의 가르침 속에는 이런 것이 있다.
"전쟁은 하되, 싸움은 이기되 그에게 항복을 받아내지 마라. 싸움의 패함은 순간뿐이다. 적에게 스스로 패함을 인정케 하지 말라. 그것은 영원한 어리석음의 소치이니라."
그 같은 천황의 뜻대로 구모액인들은 우르인이 떠난 후에도 한 차례 선제공격하는 중화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만 만들었을 뿐, 결코 중화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 후 우르인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밀림에 이르렀다.
그것이 지금의 라오스의 메콩강 주위였으니. 이때가 선군 오사구시대였다. 이렇게 하여 우르인이 머물렀던 티벳에는 중화인들이 살아가게 되었고, 구모액인들은 또다시 평화를 이룬 채 살아갔다. 그러나 중화의 대륙에서는 어지러운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태평스러웠던 요순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요순시대에도 마냥 태평스럽지만은 않았다. 단지 전쟁이 없었을 뿐, 피를 흘리며 싸우는 어리석은 짓만 하지 않았을 뿐 복잡한 부족간의 갈등은 여전하였다. 이 시기에 이미 마한의 드넓은 지역과 진한에서 살아가던 중화족들은 비록 한인들과 섞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주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정착하였던 곳은 지금의 산시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사는 참으로 우습게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군의 바람이라는 뜻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치우가 천황으로 있었을 때에 청구는 참으로 강한 나라였다. 아니, 남쪽 대륙에서는 가장 인구도 많고 강성했던 부여국과도 견줄 수 있는 문화국이었다.
그런데 치우가 떠난 후 그들은 부족 형태로 남게 되었고, 그 시기에 여러 부족들은 산둥에 자리를 한 남국과 양쯔강을 중심으로 힘을 펼쳤던 구려국으로 찾아갔다. 그것은 흡수되어지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많은 수의 청구인들은 옛 터전을 그대로 지키며 살아갔다.
아-- 아-- 청군인이여! 그들은 구모액국인 들이었다. 저 하늘나라에 반짝이는 쌍둥이 별자리에서 찾아온 지성의 영혼들이었다. 그들은 한인이 되어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펼쳐가는 존재들이었다. 청구인들은 한인시대에 이미 황허강의 중류지역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이들은 어느 나라 못지않은 고도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역사는 변하고 아름다운 문화도 차츰 시들어 갔다. 청구인들이 부족의 형태를 갖추고 살아가기 시작한 것은 모여드는 중화민족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청구라는 나라의 우산 속에서 살아가는 중화인들의 피에는 점차 한인들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 지극히 용맹스러운 청구인이었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이미 반쯤 변해 버린 중화인들과 매우 친밀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이때에도 싸움은 여전하였지만, 그것은 중화인들 끼리의 싸움이었지 청구와의 싸움은 아니었다. 황제와 치우의 싸움, 그것이 어쩌면 중화인들도 이제는 한인이라고 증명하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 이후 청구인과 중화인들은 좀 더 신선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이때에 중화인들과 청구인들은 같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상류사회였다. 중화인들은 황제로부터 시작된 중화의 오제들이 존재하였지만, 이때에 청구인들은 오제들의 권한 밖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의 상황은 이러하였다. 수많은 하인들이 싸움을 할 때에 상인들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요순시대가 태평성대라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중화인들 속에 한인들이 함께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구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았던 곳은 옛 조상들이 모여 살았던 황허의 중류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남과 북, 그리고 서쪽 방면이었다. 동으로는 남국과 공존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은족과 하족, 그리고 동에서 몰려온 주족 모두가 청구인들의 터전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청구인들로서는 묘한 운명의 역사였다.
이미 저 하늘나라로부터 지시되어진 역사는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희생의 역사였다.
성숙하지 못한 무리들은 끝없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선군으로부터 이동하여 청구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들의 영혼은 분명 파도의 상층부에서 부딪치면서 요란하게 울어대야 시원함을 느끼는 영혼들이었다.
은족은 대다수가 청구가 있는 황허 유역에서 머물고 있었지만 북쪽 지역과 서쪽 방면으로 자리를 차지한 하족들도, 또한 남쪽으로 치우친 주족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청구인이 모여 사는 곳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 하나라도 앞서 있는 청구인, 즉 상(商)나라인들에게 배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거부했다. 이것이 청구의 갈등이었다. 조상이 물려준 이 터전, 조상의 땀과 발자취가 남겨진 이 아름다운 곳을 버리고 떠나야 한단 말인가? 싸움을 밥먹듯 좋아하는 무리들을 지켜보면서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들 청구인들은 떠나지 않았다. 이미 그것은 청구인들의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상나라 곁에 은족만 있다면 충분히 평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족과 주족이 또 있지 않은가? 평정시키기에는 어렵고 벅찬 일이었다.
상나라의 부족은 모두 합하여 27개 부족이었지만 하·은·주의 부족들은 모두 합하여 989족이나 되는 숫자였으니 이들을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사의 맥은 청구에게 주어졌고 989족의 중화족들은 청구가 움직이는 대로 그렇게 흘러갔다.
상나라는 구려국에게 주족을 평정케 하도록 도움을 청했다. 구려국은 기꺼이 응하여 주족이 부족으로 남아 있되 왕권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은족과 하족이 상나라를 침범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했다.
은족은 상나라인과 함께 머물고 있기에 비록 그들의 숫자가 많을지라도 평정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상나라에서는 오제가 막을 내리는 순임금 다음으로 우임금을, 은족을 다스리는 그 힘을 하족을 다스리는 방향으로 돌렸다. 이는 점차 중화인들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아득한 저편에서 꾸미는 시간의 연극이었다. 그 연극의 연출을 지금 청구인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주나라가 왕권을 세우고 있지 못할 때에 은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늘 서슬이 시퍼런 상나라의 눈빛을 피하면서 지냈다.
드디어 우왕에 의해 하나라가 시작되었다. 왕권이 하나로 옮겨지게 되자 이들의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더 넓은 국토와 힘, 그리고 여인들을 얻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다.
하족들은 임금의 권한이 생기고 제후들이 생기고 무기를 갖게 되자 선군의 나라로 쳐들어갔다. 그것도 진한이 머물고 있는 옥저로 깃발을 휘날리며 기습공격을 가했다. 이에 선군나라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였던가?
선군의 나라에서는 이들을 결코 무력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하족들이 무력으로 선군의 나라를 침략한다 하여도 이미 통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하족들의 침략행위는 마치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었다. 하족들은 언제나 제풀에 지쳐 쓰러졌다. 그윽한 존재들의 나라라는 것을 전혀 모르지 않는 바인데도 그들은 침략을 감행했다. 그만큼 그들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줄 모르는 무지 속에서 헤매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싸우고 싶었다. 자극성 있는 짜릿한 전쟁이 좋았다. 욕망의 물결은 이들의 마음을 단 한시도 그냥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욕망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모습도 까마득히 망각한 채 오직 말초신경의 자극이 그리워 무모하게 전쟁을 일삼았다. 제후국은 제후국대로 싸움을 하며 끝없이 자극적인 행위를 찾기 위해 몸을 떨고 있었다.
선군들은 이 같은 하족들의 마음을 투명한 물속의 고기떼들의 움직임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이 성숙해지고 고요한 마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온갖 인생무상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름답고 그윽한 저 명상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수없는 파도를 겪어야 한다. 그래서 파도가 부질없는 일임을 알아야만 비로소 명상의 세계가 얼마나 지극한 세상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선군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중화족을 다스리는 청구인들도 이들의 행위를 알고 있었다.
한인들은 고도의 심성이었다. 그리고 전체를 아는 심오한 상태의 존재들이었다. 모두가 자재신 이었다. 천지만물 어느 하나 자재신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한인들도 자재신이요 중화족들도 자재신이다. 단지 꿈꾸고 있을 따름이었다.
모두가 잠자는 자재신들이었고 자재신이 아니었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가 꿈을 꾸었다. 혼돈은 꿈꾸는 그 상태를 더욱 깊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장 깊은 꿈을 꾸어본 자만이 쉽게 꿈에서 깨어나는 법, 애틀란티스인 보다도 레무리아인 보다도 먼저 찾아와 깊고도 깊게 꿈을 꾸어본 한인들, 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까지 갔던 그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중화인들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자극적인 행위를 하고 싶어 하는지를.
전쟁, 피 흘리는 싸움, 식량을 빼앗고 여인을 납치하고 강간…… 중화인들은 그것을 그리워했다. 승자가 된다는 욕망, 힘의 과시, 쓸데없는 성취욕, 예쁜 여인을 정복한다는 충족……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저 아름다운 명상의 세계로 가기 위하여 저지르는 행위였다. 욕망의 숨결이 거칠게 일어나고, 그로 인해 수없이 스스로 지치고 주저앉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의 욕망을 잠재울 방법이 이 세상에는 없었다.
이미 한인들의 시각은 중화인들의 욕망을 초월하고 있었다. 초월자가 바라보는 저 의연한 자세…… 한인들은 그저 이들의 행위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 조각의 자존심마저도 없애버린 한인들이여……
한인들은 전체를 알고 있기에 전체가 곧 하나였다. 하족들의 행위가 어떻든, 그리고 어떤 어리석은 짓을 한다 하여도 그들을 미움의 차원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그 어떤 조건도, 이유도, 옳고 그름을 탓하지도 않았다. 모든 행위가 자재신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중화인들의 욕망과 갈망하는 자극성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함께 돌아야 하는 것…… 한인들은 스스로가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하나라의 역사가 시작되는 그 시기에 드넓은 저 사백의 대륙에서는 마한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번한의 역사는 중화의 역사를 낳게 하였고, 마한의 역사는 시베리아 전역과 몽고대륙이라는 드넓은 강역의 역사를 만들었다.
중화의 역사, 그것은 마한의 역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중화의 역사가 부족의 역사라면 마한의 역사는 대국의 역사였다. 드넓은 땅 위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나라들의 어지러운 역사, 상상할 수도 없는 아득한 전쟁사들…… 중화의 역사는 드넓은 사백의 대륙의 역사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중화의 역사, 그것의 시작이 한인들과의 씨앗으로 비롯된 역사였듯 사백의 대륙에서의 역사도 혼혈과 관계가 있는 복잡한 이해관계의 역사였다. 매우 슬픈 역사였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분명 슬픈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열려 있어도 우리는 자신에게 늘 속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조차도 망각되어질 때에 그것은 차라리 저주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모습은 자신만이 바라보아야 하는 것, 어느 누구도 대신 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기까지는 오랜 인고의 세월이 흘러야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시간의 연극을 해본 연극자만이 알 수 있는 것……
그러나 우리 모두는 연극인이면서도 모두 망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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