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레는 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포대자루 같은 히피풍의 옷을 입고 스카프를 뒤집어쓴 채 흐느적거리며 다가와 말을 건 랄레의 첫인상은 굉장히 강렬했다.
“나는 배에서 젊은 사람들을 찾고 있어. 너 여기 스태프야? 아니면 승객이야?”
이 전에 다른 배에서도 종종 들었던 질문이다. 젊은 아시아인이 혼자 크루즈에 있는 건 승객이라기보다는 스태프로 보이는 게 자연스러울 터였다.
“난 승객이야.”
“와우~굿~ 넌 혼자야?”
“응, 혼자”
“배에 젊은 사람이 너무 없어서 나는 젊은 사람들을 모아 파티를 하려고 해. 너도 우리와 함께하겠니?”
나 역시도 젊은 사람들에 목마르던 참이었다.
“물론이야.”
“좋아. 나는 내 친구 마틴과 같이 크루즈에 탔어. 내 얼굴을 기억해.”
그녀는 스카프를 벗고 자신의 얼굴을 각인시켜준 채 떠났다. 5분 남짓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독일인이라는 것,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산다는 것. 예전에 독일에서 펍크롤 가이드를 했다는 것, 거기에서 한국인들을 만나 소주를 안다는 것, 23살이라는 것, 마틴이라는 친구랑 같이 여행한다는 것 등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알게 되었다.
웃음이 배시시 흘러나왔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젊은이들을 호객하고 다닌다면 오바를 보태 사막에서 바늘 찾기 격인 크루즈 젊은이 모임이 형성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호객이 성공적이길 정말로 바랐다. 우리는 그 이후로 종종 디스코텍에서 놀았고 같이 술을 마셨다. 예상보다 젊은이들이 없었는지 랄레의 호객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포르투갈 부부와 같이 방 탈출 게임을 하고 러시아 젊은 여자애들과 같이 춤을 췄을 뿐, 우리와 어울리는 더 이상의 젊은이는 없었다.
랄레와 마틴의 관계는 좀 특별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게 된 그 둘은 이성이지만 절친이고 함께 전세계를 여행하는 사이였다. 이번이 둘이 함께 탄 세번 째 크루즈라고 했는데 심지어 둘은 한 달도 넘는 크루즈를 함께 타기도 했다. 나는 내 남사친들을 떠올리고 한 방을 쓰며 한 달간 여행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못할 건 없지만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어린 친구들은 젊음으로 가득 차 싱그러웠고 발짓 손짓 몸짓 하나 하나가 에너지 넘쳤고, 파괴적으로 술을 마셨으며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면서도 의외로 속도 깊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좋았다.
세 번 째 크루즈에서 휘엉청 뜬 보름달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으려고 야외 수영장이 있는 층으로 갔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젠! 컴 히얼. 조인 어스!”
술에 취해 목소리 톤이 한껏 높아진 마틴이었다. 늘 양옆으로 동그랗게 머리를 묶은 게 마틴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자쿠지 안에서도 그 머리 모양은 견고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그 머리는 흡사 자꾸 남자로 오인 받아 스트레스받은 아이 엄마가 아이의 짧은 머리를 억지로 양옆으로 묶어 낸 모양이었는데 마틴에게 썩 잘 어울렸다. 저녁 정찬 시간이 30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고 나는 맨정신인데 둘은 너무 취해있어서 순간적으로 고민을 했다. 하지만 동그랗게 뜬 달은 너무 눈부시고 자쿠지는 너무 따뜻해 보였고, 술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이 둘이 함께 있는데 망설이는 건 사실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나는 ‘슈어’라고 답하고 재빨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젠, 진짜 왔네?”
랄레는 쿠바 리브레 다이어트 콜라로, 마틴은 보드카 소다, 나는 진 앤 하프토닉 하프소다, 우리의 시그니쳐 술을 양 손 가득 들고 온 나에게 마틴은 말했다. ‘그럼 진짜로 오지, 가짜로 오냐?’ 라고 쏘아 붙이려다 의미가 통하지 않을 거 같아 관뒀다. ‘예스. 리얼리 컴, 덴 페이크 컴?’이라고 말했으면 분명 ‘쏘리, 무슨 뜻이야?’라고 말했을 게 분명하다.
“젠, 너는 안 취했으니 샷 5잔을 먹어야 해.”
랄레는 술 강요를 했다. 그것이 그녀의 특기이자 술버릇이었다. 대학교 신입생 때로 시간여행을 시켜주는 랄레의 술 강요에 나는 샷을 마시는 척하고 은근슬쩍 밖으로 버리곤 했다. 둘은 취했기 때문에 내가 술을 마시는지 버리는지 관심도 없어서 사실은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에이미 와인 하우스의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다 갑자기 마틴이 자쿠지에 다이빙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던 술이 자쿠지로 쏟아졌다. 보드카와 럼과 진이 섞여 알코올 탕이 된 자쿠지에서 알코올 향이 솔솔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우리 수영장에서 다이빙하자.”
갑자기 분위기 다이빙이 되어 우리는 수영장 삼면에 서서 하나, 둘, 셋을 외치고는 동시에 뛰어 들기를 반복했다.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다 다이빙을 하다 물속에서 사라진 마틴의 머리 고무줄을 찾다, 고장 난 랄레의 스피커를 두들겨 보다 달을 바라보다 다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셨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 한껏 확장된 혈관을 따라 알코올이 손끝 발끝까지 구석구석 열심히도 돌아다녀 나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티 인원 고작 세 명, 하지만 이 풀문 파티는 몇천 명이 득실득실거리는 코팡안의 풀문 파티보다 내가 가봤던 그 어떤 화려한 라인업의 파티보다 흥겹고 역동적이었다.
크루즈에서 내려 유럽 여행을 하면서 나는 그들을 방문했다. 랄레가 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마틴이 사는 독일 베를린을. 늘 술에 취해있고 춤 추듯이 걷던 랄레는 세 개나 되는 글쓰기 과제에 치여 스트레스 받고, 보일러가 고장 나 800유로를 지불 해야 해 주말에 레스토랑 알바를 하고 있었다. 크루즈에서와 변함없이 같았던 건 줄담배를 피는 것 정도뿐이었다. 돈이 자꾸 어디로 새는 지 모르겠다며 가계부를 적고 마트에서 싼 햄을 찾아 다니던 랄레는 크루즈에서 본 랄레와는 너무 달랐다. 그녀는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랄레는 친구에게 소개 받은 학자금 대출을 위해 무리한 미션을 서로에게 제시하고 대결하는 미국의 한 텔레비전 시리즈를 같이 보자 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매운 음식을 먹거나, 초록색으로 염색하거나, 데이트 한 지 2달 된 남자 친구의 이름을 목에 타투로 새기거나, 똥을 싸는 행위를 예술 작품인 것처럼 전시했다. 한참을 웃다가 웃고 난 뒤에 입안이 뻐근해지고 쓴맛이 밀려왔다.
“랄레! 나 오늘 한 개비도 피지 않은 담배를 잃어버렸어. 너무 끔찍해.”
“내가 오늘 진짜 슬픈 얘기해줄까? 마트에서 100유로를 주웠는데,,, 다음 날 연락 와서 돌려줬다?”
“그래도 미국 대학생들이 제일 불쌍한 것 같아. 어마어마한 학자금 대출이 고스란히 빚이 되어서 목을 조르잖아. 칼리지 유머 시리즈를 한 번 봐봐”
랄레와 랄레의 친구들은 돈에 관련된 웃픈 이야기가 화두인 가난한 청춘들이었다. 재워준 것이 고맙고 1유로, 1유로에 바들거리는 그녀가 안쓰러워 같이 장을 볼 때 대신 계산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거절하며 자신의 몫을 기어이 돌려주었다.
“젠, 너는 신용카드로만 여행하잖아. 내가 이걸 받을 수는 없어.”
그렇다. 나는 신용카드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내 신용을 보증하고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돈을 미리 쓰게 해주는 마법의 카드로 이 여행을 가까스로 이어가고 있었던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돌아가서 일을 해 갚아야 할 돈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내가 장 본 비용을 대신 내겠다고 바락바락 우기지는 못했다.
베를린에서 만난 마틴은 현재 마지막 학기 페이퍼를 작성 중이고 TV 다큐멘터리 자료조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은 재밌다고 했지만, 월급이 적어서 오래하지는 않을 거라 했다. 10년 전 나도 다큐멘터리 막내 작가였던 걸 생각하니 닮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마틴과 함께 힙하다는 트랜스 파티에 놀러 간 날, 마틴은 주변에 있는 빈 병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마틴, 뭐 하는 거야?”
“술 살 때 병과 컵 보증금을 내거든. 이걸 바에 가져다주면 병은 0.5유로 컵은 1유로를 받을 수 있어.”
마틴은 술을 사 먹지도 않으면서 6병, 7병씩 모은 병을 바에 가져다주고 3~4유로씩 받았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버리고 간 빈 병이 가득했기에 병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힙한 클럽에서 힙하게 차려입은 빈 병 팔이 소년이라니! (마틴의 이미지는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깝다) 크지도 않은 클럽에서 마틴은 눈치도 보지 않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빈 병을 팔았다. 그 장면은 연출된 코미디 같았다.
오늘의 우리는 가난하다. 이제는 어제가 된 오늘이었던 날을 충만하게 즐기기 위해 크루즈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정된 가난은 우습지만 비참하지는 않다. 어제를 즐겼고 그 순간의 대가가 지금의 가난일지언정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회가 뭔가. 그 어제가 지금의 고단함을 이기게 하는 힘인 것을. 수고로운 하루의 끝에 그들은 힘 빠지고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여행 이야기를 할 때는, 다음 여행을 구상할 때면 다시금 눈이 반짝였다. 여행자는 길 위에서 가장 생동할 수 밖에 없다는 걸 둘을 보며 다시금 실감했다. 그들을 보며 자연스레 나는 10년 전의 나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과거도 나는 저들의 미래도 아니다. 어제 때문에 오늘이 가난한 하지만 내일의 여행을 꿈꾸는,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이 분명한, 동일 선상에 있는 여행자일 뿐이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바다 위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륙에서 대륙을 이동하는 배 위에서. 그때는 또 우리는 누구보다 자유롭고 충만한 오늘을 함께 보낼 테지.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자쿠지가 수영장이에요? 단어가 재밌다. 건강만하면 돈없어도 괜찮은 거죠. 굶어 죽지는 않게 딱 고만큼만 일하면 됨, 어차피 죽으면 다 놓고 가니까.
(그리고 웃푸새끼처럼 얍샵하게 남의 등쳐먹지만 않으면 됨)
없는게 메리트라네
있는게 체력이라네
사는게 여행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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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쿠지는 수영장 옆에 동그랗게 설치된 기포가 나오는 욕조예요. 사진을 첨부해야 겠어요 :) 그 가난의 상황들이 슬프다기 보다는 너무 아이러니하고 코미디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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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래요래 수영장 옆에 자쿠지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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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한 장면 같아요 젠젠님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그날의 파티와 일상으로 돌아와 수습하고 살아나가는 삶의 현실에서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게 이상해요. 저는 돈을 모으고 여행을 가고 탕진했어요 안전주의거든요. 이글을 읽다가 저지르는 여행이란 어떤걸까 궁금해지네요 허허. 저를 궁지로 몰아버리고 싶다고나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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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래도 여행 중과 현실의 에너지가 그렇게까지 차이 나지는 않는 편인거 같아요. 너무 체력이 좋아서 그런거려나..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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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오셨네요. 기다렸네요. ^^
오늘도 유쾌하게 잘 읽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해도 즐거웠습니다. 때로는 가난해서 친구들이랑 소주를 한 잔 먹고 싶었을 때에 학교 앞 라면 집에 가서 두명이 라면 한 그릇에 소주 한 병을 먹어도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이제 나이를 먹으니 비싼 음식에 술을 한 잔 해도 그리 즐겁지 않네요. 그래도 좋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끔은 유쾌는 합니다만...
여행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속마음을 이야기 할 수 있고 계산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만나잔아요.
자주 포스팅 올려주세요. 위에 저 피터 저X은 지 마음대로 포스팅 합니다. ㅋㅋ
jcar 토큰으로 보팅 요청 하고 갈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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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크루즈 여행으로 국적, 나이에 상관없이 좋은 친구들을 많이 얻었어요. 길 위를 여행하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데, 좋은 사람들까지 많이 만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여행이었네요. 방구리님 응원에 더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 룰루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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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banguri님의 jcar토큰 보팅 선물입니다. ^^
멋진 한 주 맞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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