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까지는 망원동 집에서 강남 회사로 출퇴근하느라 내 소유의 똥차를 집 주차장에 세워두기만 했다. 이번 직장은 망원동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대중교통은 애매했고 걸으면 35분이 걸렸으나 차로는 5분이었다. 게다가 대학 캠퍼스가 넓다보니 교직원들에게 주차 공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그래서 나는 난생 처음 자가용으로 근거리 출퇴근을 하며 운전하는 연습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출판부가 세들어 있는 교육대학원 건물 앞, 교직원용 주차 구역이 있었다. 그날도 자가용을 끌고 와서, 다시 타고 퇴근하려는데, 주차장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흰머리의 남자였다. 자기는 교육과 학장이라면서, 앞으로 여기다가 차를 대지 말라고 했다. 나는 교수님께서 오해를 하신 것 같다고, 저는 출판부 직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화를 내며 다시 말했다.
"여기는 직원이 아니라 교수용 주차 구역이에요. 앞으로는 다른 데 대라고."
"네? 무슨 말씀이세요? '교직원용'이라고 돼 있고 저희 출판부 직원 모두 여기다 차를 대고 있는데, 저만 여기 대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먼... 이름이 뭐예요? 내가 출판부장에게 얘기해야겠어."
전형적인 갑질이었다. 교수의 직원에 대한, 나이 많은 이가 나이 어린 이에 대한, 남자가 여자에 대한, 3중의 갑질. 물론 그 당시는 '갑질'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누가 봐도 부당한 일이었고 내 속에서 간신히 지탱되던 밧줄이 뚝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 교수에게서 부장한테 전화가 오는 듯했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부장실로 들어갔다. 부장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원래부터 교육학과와 출판부는 공간 사용 문제로 암암리에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화살이 '나'라는 만만한 대상을 표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니, 부장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내 편을 들어 싸워줄 리도 없는 상황이었다.
부장은 나지막이 말했다. "억울한 건 알겠지만, 어떻게 하겠어. 우리가 세들어 지내는 입장인데 기분을 맞춰줘야지..."
나는 출판부를 그만 두겠다고 말하고 준비한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분께 꼭 좀 전해주세요. 제가 그분 때문에 그만 둔다고."
부장은 깜짝 놀라는 동시에 너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유, 그럼... 애써 모셔온 분이 이런 일로 그만 두게 됐는데, 우리가 손실이 너무 크다고 알려야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고 말할게."
나는 직원들을 깔보는 교수에게 복수도 하고 부장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도 해소한 느낌이 들어서 후련했다.
그러고 나서 몇 년이 지나, 나와 같이 입사했던 남자 동료가 연락을 해왔다. 우리는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며 해후했다. 그 사이 부장과 과장은 정년퇴임을 하고 자신은 정직원이 됐다고 했다. 새로 계약직 편집자 둘이 들어왔지만 문제가 많다며, 다시 들어와줄 수 없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내가 그런(!) 문제를 일으키고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쓴 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그래도 한 번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을 남겼다. 다행히도 나는 당시 일자리 구하는 데 문제가 없던 상황이라 '다시 생각' 해볼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