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와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인도 철학의 근간이 되는 우파니샤드가 바라보는 세상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텍스트가 인도인의 문화와 인더스 지역의 역사에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그리고 그 연관이 되는 방식이 어떻게 패권주의적인지 살펴본다. 이후 관념론과 유물론에 해당하는 철학, 과학, 종교가 어떻게 패권주의적 구조주의로 작동하며 현 시대에는 어떤 예시가 있는지, 또 철학을 철학하기를 통해 그것을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 언어와 철학
철학으로 껌 좀 씹어봤다면 서양철학은 크게 세가지, 프랑스 철학과 독일 철학, 그리고 분석 철학(각주1)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 철학', '프랑스 철학'이라는 게 특정한 이론으로서의 철학보다는, 차라리 지역적인 문화에 따른 문체나 가치관에 가까운데, '프랑스스러운' 철학자라고 한다면 사르트르나 까뮈를, '독일스러운' 철학자라고 한다면 하이데거나 칸트를 꼽고 싶고, 프랑스치고 독일스러운 철학자라고 한다면 푸코, 보드리야르가 생각나고, 독일치고 프랑스스러운 철학자라면 단연 니체가 있겠다.
프랑스 철학의 문체는 수사적, 나쁘게 말하면 현학적이고, 독일 철학의 문체는 분석적, 나쁘게 말하면 읽는 맛이 없다. 이러한 문체의 차이는 암시적으로 그들의 가치관 차이도 보여준다. 세계를 완벽히 해석하려는 집단과 동시대의 세계를 즐기려는 집단 정도의 차이랄까? 개인적으로 푸코가 프랑스치고 독일스럽다고 느낀 건 문체와 더불어서, 그가 니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세계를 낱낱이 해석하려는 그의 이론 때문이다. 또한 동양의 고전들을 살펴보자. 번역의 차이도 있겠지만, 서양 철학서와 문체가 확연히 다르다. 정말 문체의 차이가 가치관이나 철학의 차이를 불러 일으키는 걸까?
올바르지 않은 언어의 사용이 형이상학의 시작이라는, 언어에 한해서는 철학적 허무주의에 가까운 비트겐슈타인식 분석 철학적 관점은 차치하고서, 소쉬르에 의하면 기표(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signifié, 시니피에)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는, 즉 자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 '고양이'를 '냥이'나 'cat'으로 불러도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 - 하나의 기의를 위한 기표가 문화마다 다르고 또 갯수 역시 다를 수도 있다. 영어로는 사람이나 황소의 다리를 모두 'leg'라고 하지만 한국어로는 '다리', '앞발/뒷발'로 표현도 가능하고, 스페인어로는 piernas, patas로 표현된다. 또한 이누이트어, 핀란드어에는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몇개 이상이라고 한다[3]. 즉, 일상적 문화는 가치관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며, 따라서 단어의 풍성함을 달리하고, 그것은 문체를 바꾸게 된다. 다시, 삶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말을 만든다. 이미지와 실제의 구분 불가능성 - 시뮬라르크, 쉽게 이야기 하자면 내가 A라는 생각을 해서 A'이라는 말을 했다 한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고 A'을 말하건 생각은 A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당신은 분노를 느껴서 화를 내는가, 화를 내서 분노를 느끼는가? 생각해봄직하다 - 를 생각한다면, 말이 생각을 만들고 삶을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구업(口業)이란 이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걸까? 독일어와 프랑스어보다 독일어와 영어가 더 가까울까? 그래서 분석 철학이 독일어권에서 시작해서 영어권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걸까?(각주2) '언어'라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먼저 계보학적으로 생각해보자. 각 언어는 서로 어떤 관계와 계통 속에 있을까?
현존하는 자연어 어족들의 분포
언어 계통에 따르면 한국어는 계통상 속된 말로 '아싸' 언어에 가깝고, 아랍권(주황색)이나 중국어권(분홍색), 투르크어권(회색)(각주3)은 확실히 지리적으로, 민족적으로 비슷비슷한 걸 알겠는데, 연두색으로 표현된 어족은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인도 사람과 핀란드 사람은 너무나도 다른 것 같은데, 그들이 같은 어족이라고? 놀랍게도 인도의 많은 언어들은(각주4), 그리고 그 언어들의 근간이 되는 산스크리트어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와 같은 계통에 있고, 그들을 포함하는 어족인 인도-유럽어족은 현재의 우크라이나-러시아의 볼가강, 카스피해 근방에서 출발해서, 인도와 유럽으로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유럽어족의 전파 과정[5]
인도-유럽어족 계통도, 사템어(Satem) 아래에 인도-이란어파(Indo-Iranian)가 있다
인도-이란어파 계통도, 인도-아리아어군(Indo-Aryan) 아래 산스크리트어(Sanskrit)가 있다
그럼 이런 생각을 해보자. 언어가 있는 곳에 생각이 있고 철학이 있는데, - 여기서의 철학은 관념론 등의 사고의 구조를 뜻하는, 넓은 의미이다 - 그렇다면 인도에도 철학이 있을까? 그렇다. 하지만 왜 우리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서구 철학만 떠올릴까? 철학이란 그리스, 독일과 프랑스에만 있는 걸까? 독일과 프랑스에 위대한 철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철학은 철학자들에게 귀속되는 것인가? 이 질문들에 집중해서 비-서구 철학인 인도 철학에 대해, 이어 문화로서의 인도 철학의 형태, 이 두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왜 하필 인도 철학이느냐면, 인도 철학만큼 그 문화와 밀접한 것이 없고, 인도 철학을 제외하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철학이 텍스트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도의 철학에 대해 쭉 이야기 해보고, 이것이 구조주의적 작동 논리로서 인도 사람들의 삶에 침투해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 베다와 우파니샤드
인도 철학은 제사가 핵심이다. '인도에도 철학이 있나요'라고 한다면 보통은, 요가나 힌두교, 불교를 떠올릴 것이다. 기독교에 성경이 있고 이슬람에 쿠란이 있듯, 힌두교와 불교에도 경전, 특히 두 종교의 공통적인 이론적 토대를 세워주는 경전으로 우파니샤드(Upaniṣad)가 있다. 힌두교의 경전들은 베다(Veda)라고 부르고, 리그 베다(Rig Veda) - 성가집 -, 야주르 베다(Yajur Veda) - 기도와 제사의 법식 -, 사마 베다(Sama Veda) - 성가 편곡집 -, 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 - 주문서 - 로 이루어져있다. 베다 자체는 제사를 위한 기도문이고, 베다의 해설집으로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우파니샤드인데, 해설서이므로 계속 현대에도 만들어지고 있다. 베다는 고대 - 대략 기원전 1500년대, 이를 베다 시절로 부르겠다 - 에 만들어진 경전이므로 이를 해석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부속 학문(Vedanga)도 필요한데, 음성학(siksa), 운율학(chandas), 문법학(vyakarana), 어원학(nirukta), 제사 방법론(kalpa), 점성술(jyotisa)가 있다. 보면 언어에 관련된 게 많다. 인도는 언어에 집중하는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파니니 문법이 있다. 기원전 4세기 경 파니니 문법이 만들어져 산스크리트어의 완전한 문법학적 분석을 3.959개의 규칙으로 정리했다. 이정도 문법적 수준은 현대 사회가 이제서 따라 잡은 레벨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규칙이 문서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다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렇다. 우주에는 신(deva, 데바)이 있고 악신(asura, 아수라)이 있어서 두 신이 싸우는데, 신들이 이기면 우주는 상식적인 우주의 운행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장마철에 제때 비가 내려서 그해 농사가 잘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뭘 해야 할까? 가만히 앉아서 신들이 이기길 바라는 것이 아니고 신들이 이길 수 있게 제사(yagna, 야즈냐)를 통해서 신들에게 보급품을 보내줘야 한다. 불(agni)을 피워서 제사의 공물을 태우면,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서 신들에게 보급품이 전달이 되는 구조이다. 이것이 신과 인간이 서로서로 의지해서 사는, 큰 틀에서 우주의 작동 원리이다. 이를 베다 시절에는 리따(Rta)라고 불렀고, 이후 고전 산스크리트 시절에는 이를 다르마(Dharma)라고 불렀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브라흐만(Brahman)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와 같이 신과 인간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베다에서는 제사가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신화로, 뱀 처럼 생긴 아수라 브리트라(Vritra)가 가축과 물을 절벽 안에 숨기고 가두어 놓자, 신 중에서 가장 강력한 신인 인드라(Indra)가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 금강(Vajra)을 들고, 혼자 절벽에 가서 금강으로 브리트라를 무찌르고 가축과 물을 해방시켜주었다. 덕분에 인간들은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는데, 인드라가 싸울 때 그가 힘을 얻는 물질이 있다. 이를 사람들이 제사로 보내준다. soma라고 부르는, 마시면 환각 작용이 있는 식물의 즙을 불로 태워 제사를 지낸다. 여담으로, 신이 뱀처럼 생긴 악신을 무찌르는 신화는 참 흔하다. 인도-유럽어족 모두가 공유하는 신화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이야기한 신화소(le mytheme)에 해당하지 않나 싶다.
금강을 들고 있는 인드라
따라서 제사는 우주 운행의 순리에 있어서 - 신이 승리해야 하니까 -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제사는 정확하게, 단 하나의 토씨도 틀리면 안된다. 만약에 제사에 실패하면 죽음(mrta)이 - 제때 비가 안 내리면? 굶어 죽는다 - 찾아오고, 성공하면 살아남는다(amrta). 제사를 주기의 변환점마다 - 해가 뜰 때, 해가 질 때, 하지, 동지 등과 같은, 우주의 운행이 변화하는 시기 - 해줘야 하는데,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젓는 나무가 무슨 나무여야 하는지, 불을 피울 때 어떤 종류의 나무를 어떤 순서로 태워야 하는지, 사제가 왼쪽 발을 먼저 나가야 하는지도 모두 정해져있다. 그게 안 맞으면 제사에 실패하는 것이고 죽음이 찾아온다. 따라서 제사를 전문적으로 지내는 사제가 있는데, 이를 브라흐마나(Brahmana)라고 부른다.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이 있는 계급이 브라흐마나이고, 이들에게 제사 계약을 주는 사람들을 야자마나(Yajamana)라고 부른다.
제사가 우주 운행의 순리를 위해 신에게 보급품을 보내는 것이라면, 신에게 보급품을 보낼 때 왜 보내는지도 알려야 할 것 아닌가? 그런 메세지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바로 '수리수리 마수리', '옴 마니 반메 훔'(관세음보살 육자진언)과 같은 주문들이다. 이를 만트라(Mantra)라고 하고, 브라하마나는 이 만트라를 악센트 하나 틀리지 않고, 또한 순서를 뒤죽박죽 섞어서 다 외워야 한다. 예를 들어, '우파니샤드'라는 단어를 외운다면, '드샤니파우'(5-4-3-2-1), '우니드샤파'(1-3-5-4-2) 와 같은 조합으로 모두 외우는 것이다. 왜? 발음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신라면'이라는 단어가 구전으로 내려온다고 생각해보자. 누군가는 그걸 '실라면'이라고 적을 수도 있다. 이를 방지하려면 '면라신', '라면신' 이런 식으로 다 외워둬야 한다. 이것 덕분에 기원전 천년 전의 텍스트가 악센트 하나 틀리지 않고 남아있다. 또한 만트라 중 일부는 인드라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가지고 있는지 말로 쭉 읊는것인데, 이것이 인드라에게 언어로 바치는 공물이다. 베다의 부속 학문(Vedanga)에 왜 언어와 관련된 게 많은지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브라흐만의 원래 어원적 의미는 영어로 formulation이다. 내가 말을 어떻게 표현할지라는 뜻으로, 우주 운행의 실상을 드러내는 말로 '표현'된 것이 브라흐마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보통 업보라고 부르는 카르마(Karma)는, 본디 '제사에서 하는 행위'를 뜻했다. 내가 혼자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나에게만 영향이 있는 일이지만, 제사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 다음날 별자리가 바뀐다. 즉, 뒤따르는 결과가 따라온다는 뜻이다. 이것이 제사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 적용되며 현재의 업보라는 뜻이 되었다.
업보에 따른 결과를 뜻하는 단어가 사티야(satyā)이다. 두개의 단어가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로, sa-tya: 그것에 상응한다, 미래에 그럴 것이다 라는 뜻이다. 제사터에서 동전을 오른쪽으로 민다면, 하늘에 있는 태양이 그것에 맞춰서 밀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사티야끄리야(satyākriya)이다. 사티야를 만든다는, 미래에 무언가를 구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구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왕이 '겐지스강을 거꾸로 돌릴 사람 있나?'라는 질문을 하였다. 이때 매춘부가 나타나서 '나는 지금까지 나를 찾아온 모든 고객들이 돈을 정확하게 내는 한,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내가 모두 사랑해주었다. 이게 사실이기 때문에 그 진리에 입각해서 겐지스강이 거꾸로 흐를 것이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하자마자 겐지스 강이 거꾸로 흘렀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사티야끄리야를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그럼 동전을 움직이고 커피를 마시면 진짜 별자리가 움직입니까, 라고 한다면, 그래야 제사가 성립이 된다. 따라서 브라흐마나들이 제일 고민하는 것은, 제사의 장과 현실 세계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이다. 그 고민이 우파니샤드에 주로 나오기 때문에 우파니샤드가 인도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질문이라니,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자, 그럼 내가 이 제사의 장에서 태양을 움직이는 방법을 알기만 한다면 불가능한 게 없네? 그럼 로또 1등도 가능합니까? 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아타르바 베다에는 미신적인 것들이 많이 생겼다.
초창기의 제사에서는, 사제들끼리 경쟁(Brahmodya)을 했다. 두명의 사제가 나와서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는데, 질문이 계속되며 질문자의 입장에서는 '너는 너가 모르는 걸 안다고 하면 머리가 터져 죽을 것이다' 라는 논리를, 대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는 너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머리가 터져 죽을 것이다' 라는 논리를 들고 경쟁을 했다. 말이 되는 안 되는 대답을 못하면 둘 중에 하나는 실제로 머리가 잘려 죽었다. 시간이 지나 서로 죽이는 것은 사라졌다. 이후 한 서양 선교사가 두 브라흐마나의 경쟁에 관해 기록해둔 게 있는데, 한 브라흐마나가 졌다. 그는 분해서 상대방 브라흐마나를 죽이겠다며, 적을 죽이는 제사를 시작했고, 실제로 그 다음날 상대방 브라흐마나가 죽었다. 서양 선교사에 따르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마비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이 브라흐마나가 제사에 성공한 이유는, 상대방을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푸코식으로 말하면 타인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 주권권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도 철학에서는 세상을 움직이는 방법을 아는 것, 즉, 아는 사람이 권력자이다. 따라서 인도 전통에서는 지혜가 정말 중요하다.
이것이 인도 역사에서 실현되어 보인 것이, 간디가 소금세 폐지를 주장하며 일어난 비폭력 행진인 소금 사티야그라하(satyāgraha) - 진리(satyā)를 찾기 위한 노력(agraha) - 였다. 간디가 어떻게 수만명을 이끌고, 영국 군인들이 총을 쏴도 멈추지 않았느냐면, 인도인들에게는 사티야, 그리고 신과의 약속을 뜻하는 브라타(Vrata)가 그들의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간디를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제사는 남자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인도에 남아 선호 사상이 생긴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간디의 소금 사티야그라하
이제 제사와 사티야가 인도 철학의 세계의 구조와 그것을 움직이는 방법을 규정한다는 것, 즉 인도의 구조주의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철학을 철학해보지 않았다면, 이건 그냥 당신의 문화이고 삶 그 자체로 숨쉬고 있을 것이다.
- 철학, 종교, 과학, 구조주의
우파니샤드에 써져있는 내용대로, 간디는 움직이고 인도 사람들은 움직였다. 고대의 말과 언어가 인도인들의 삶과 문화, 가치관을 지배했고, 이는 인도 철학, 관념론이 인도인의 말과 행동을 지배함을 알려준다. 베다와 우파니샤드가 인더스강쪽에 살던 드라비다족 - 남부 인도인들의 원류 - 원주민들을 몰아낸 아리아인들의 - 그들은 수레바퀴(Chakra, 차크라)가 달린 전차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했다 - 카스트 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패권주의적 텍스트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관념론의 무게란, 인도 반도 전체의 무게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선과 악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무서운 이데올로기로 변신한데는 기독교 사제의 마술이 숨어 있다는 니체의 설명을 생각해보자. 역사 서술의 자의적 필연성에는 패권주의가 숨어있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역사를 서술할 때 자연적 필연성은 - 나일강과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근처에서 문명이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적 법칙 덕분이다 - 언제나 존재하지만, 이를 사회적 필연성으로 비약하는 건 이데올로기적 수작, 패권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시기 동안 유대인 - 히틀러의 논리 - 또는 여성 - 파슈툰 습관법의 논리 - 불평등이 있었으니, 이 역시 필연적이라고 설명한다면, 이것이 패권주의적 역사 서술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알튀세르는 관념론과 유물론이 이 이데올로기적 수작에 '체념'을 도입하며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관념론에 해당하는 것은 철학과 종교, 유물론에 해당하는 것은 과학인데, 종교의 경우 우리의 지배/피지배가 신의 뜻 - 지하드 또는 시오니즘 - 이기 때문에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환경에 체념하게 만든다. 이는 사람들의 사고에 마약 - 마르크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 과 같은 역할을 했다. 종교의 영향력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옅어져 갔지만, 그 빈자리를 철학이 채우게 된다. 철학은 종교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 예컨대 '세계의 기원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것은 종교와의 차이점이지만, 근본적으로 대답은 달라지지 않고 이데아, 기계장치, 계산기 등으로 바꿔 불러졌을뿐이었다. 종교가 체념 장치로서 - 신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어 / 내가 불행한 것은 신의 뜻이야 - 작동한 것과 같이, 철학 역시 체념 장치로서 - 세상은 이러이러하니 나는 이럴 수밖에 없다 - 작동했으며, 체념이 내포하는 것은 패권주의이다. 관념론이 아닌 유물론에 해당하는, 과학의 역할도 마찬가지이다. 피타고라스가 무리수를 발견한 수학자를 죽였던 것을 기억하는가? 피타고라스에게 수학이란, 그들의 '수학'으로 구조화된 철학을 뒷받침하는 기둥일뿐이었다. 배우가 달라진 것이지 각본은 똑같다. 플라톤에게 기하학이 그랬고, 데카르트에게 고전 역학이 그랬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변하면 우생학 같은 것들도 나타나게 된다. 철학, 종교, 과학은 구조주의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도 이전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구조'로서 자리 잡았고, 베다와 우파니샤드가 보여주는 결론 역시 그렇다.
'사회에는 특정한 구조가 있나요?'라는 질문에 긍정하는 이론이 구조주의(structuralism)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세계 여러곳의 신화들을 분석해보고, '신화소'를 찾아내며 공통된 언어의 구조를 찾아냈다. 또한 현대 사회뿐 아니라 부족 사회에서도 근친 결혼을 금지하는 것을 보고, '호혜성의 원칙'을 발견하여 각기 다른 사회간의 동일한 구조를 발견해냈다. 이후 여러가지 이론들로 인해 구조주의는 발전했다. 구조주의가 함의하는 바는, 한 체계의 구조가 체계 내의 구성요소들을 결정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합리성을 가져오고 주체성을 죽였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부족 사회 사람들이 비합리적이라는 서구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났으며, 그 스스로는 역사란 규칙이 아니라 우연의 소산이며 무질서가 지배하는 거대한 경험의 수프라고 서술했지만, 구조주의의 결론이 주체성을 죽이며 모든 것을 객관화시킴으로서 전체주의적 독선을 나타낸다는 부분에서, 종교, 철학, 과학이 하던 일을 정확히 똑같이 수행할 능력이 있음은 자명하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구조주의의 기반이 되는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 개념에 대해 이런 논의를 해보자. 사전을 켜고 '멈추다'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자.
'멈추다'의 뜻, 네이버 국어사전
'멈추다'라는 기표의 기의는 '사물의 움직임이나 동작이 그치다'이다. 이렇게 기표-기의의 연결 구조가 완결 되었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논리인데, 데리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사물의 움직임이나 동작이 그치다'를 기표로 보았을 때, 이것의 기의는 무엇일까?
'사물의 움직임이나 동작이 그치다'의 뜻, 네이버 국어사전
여기서 계속 나아간다면? 과연 '멈추다'라는 기표의 뜻을 알아낼 수 있을까? 이를 끊임없는 의미의 차연(différance, 디페랑스)이 생긴다고 표현한다. 즉, 언어 간의 구조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구조의 해체에 집중한다. 구조에 잠식된 개인이 아닌, 각 개체의 존엄성과, 구조에서 소외된 타자, 구조,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 전체, 객관성, 영속성이 아닌 부분, 우연, 순간에 집중한다. 따라서 현재의 탈구조주의는 ‘허구의 진실성’, ‘순간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그런 측면에서 파편화와 다원주의, 중심에 대한 해체, 즉, 반메시아적, 반유토피아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장애인 인권이나 여성주의 같은, 시대적 약자를 위한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체란 서구 철학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그 개념에서 벗어나려는 철학적 시도이지, 철학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탈구조주의는 그 자체로 자기 모순을 가지고 있는데, 구조를 해체 하거나 탈구조를 하고 싶으면, 아무튼 해체할 대상이 원래 있어야 하고 또 탈피할 구조가 원래 있어야 한다. 그 대상과 구조의 중심은 어디있는가? 중심이 이미 없는 텍스트는 해체될 수 있는가?[4] 이 논의가 탈구조주의가 내제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순이다.
다시, 역사 서술의 자의성을 생각한다면, 구조는 그 자체로 패권론을 암시하며, 따라서 구조의 해체에 새로운 구조를 대입하는 것은 도돌이표이다. 현시대를 현상화하는 구조는 무엇이 있을까? 민족 국가주의의 자리를 국민 국가주의가 대체 - 대한민국이란 한반도를 포괄하는 개념에서 실효 지배중인 남한만을 뜻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 또는 거꾸로 돌아가는 것 - 한다던지, 가부장제의 자리를 여성주의가 대체하는 것 - '여자는 ~해야 한다'를 '남자는 ~한 역사/사고를 가지고 있다' 와 같은 방향으로 대체하는 것 또는 가부장제로 거꾸로 돌아가는 것(일본) 등 - 에 대한 지지와 반향이 왜 있는지를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구조의 시간적 변화가 곧 발전이라는 헤겔식의 관점은 푸코, - 푸코의 <감시와 처벌>: 형벌에 인권이 생긴 역사 -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깨졌기 때문에, 예컨대 가부장제로의 복귀 또는 여성주의로의 변화가 철학적 견지에서 '진보'라는 단어로 쉽게 이야기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이렇게 논증된다. 각각의 '~~주의'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떠나서,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 correctness) 방향이 철학적으로 올바른(philosophical correctness) 방향이 되려면 계몽주의적인 구조적 대체 일변도가 아닌, 구조적 해체와 더불어 구조 자체에 대한 탈구조주의적 모순의 해결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나, 라는 생각을 한다.
현 시대 구조 간의 충돌, 민족주의
현 시대 구조 간의 충돌, 여성주의
현 시대 구조 간의 충돌, 신자유주의
정리하자면, 독일 철학, 프랑스 철학 같은 단어는 철학'사'적의 편의를 위함이지, 철학은 독일과 프랑스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독일인, 독일 철학자라고 모두 독일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독일어를 써도 차연은 각 개인마다의 언어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뛰어난 철학자들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철학은 철학자들에게 귀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인들에게 의미 없는 것도 아니다. 푸코와 마수미가 권력 이론을 구축하며 말했듯, 모든 개인의 공간과 시간에는 이미 권력이 행사 되어있다. 우리 스스로 철학에 대해 철학하지 못하면 그것을 느낄 수가 없다. 또한 서양 철학사 고전들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철학에 대한 공부를 그리스 철학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레코-로만(Greco-Roman) 패권주의적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학이 좋아하는 고상한 기원 - 생존에 위협이 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사회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등 - 이란 '지금'을 감추고 패권주의적 형태에 근거를 붙이기 위한 아무 의미 없는 형이상학적 연장에 불과하다. 인도 철학, 베다와 우파니샤드가 보여주는 것은 서구 중심주의적인 사고를 깰 수 있는 하나의 명징한 증거이며, 또한 그것이 인도인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해봤을 때, 철학이 서양의 철학자 일부가 아닌 모두에게 돌아가야 하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즉, 데리다가 말한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e)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그 벗어난 곳에 - 인도 철학 -, 모두에게 - 인도인, 베다나 요가를 접해본 누군가 - 새로운 '로고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 역시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해체'가 새로운 구조가 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탈구조주의의 가장 큰 모순점이다.
당신의 시대, 당신의 환경, 당신의 생각은 또 다른 하나의 관념이 되고 철학이 된다. 니체가 신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니체가 천재여서도 있지만, 중세를 지나 19세기 사람들이 조금씩 종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까뮈와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2차 대전기 그들이 씻어낼 수 없는 삶의 부조리함을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그들의 천재성과 위대함이 사라지진 않지만, 어쨌든, 질문을 바꿔보고 싶다. '너는 어떤 시대를 살고, 어떤 언어와 문체를 쓰며, 어떤 구조와 관념이 있는가?' 이를 '철학을 철학하기'라고 규정하고 싶고, 이를 통해 주체성의 회복, 즉 해체를 할 수 있다.
기존의 도덕을 따르지 말고 본인의 도덕을 세우라는 니체의 철학은 위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구현된다. 결국, 진정 철학적인 질문이란 단 하나, 자살, 즉 '각 개인의 관점에서, 삶이 고생하며 살아볼 가치가 있는지'라는 까뮈의 말은 지금에 와서야 더욱 울림을 주는 것이다.
즉,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필연성이 논해진다면, 그것은 대게 패권주의적 논리가 적용되는 경우가 많고, 우리를 둘러싸는 관념론들, 철학, 종교, 과학은 우리의 삶, 문화로서 스며들어 있기에 철학을 철학하기를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말과 삶은 그 구조속에 있을뿐이다.
따라서, 베다는 과학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각주1) 분석 철학을 영미 철학이라고 부른다면 독일, 프랑스에 이어 완결성이 있었겠지만, 분석 철학의 시작이 비트겐슈타인(각주1-1)과 같은 독일어권 - 분석 철학에 있어 언어의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영어와 독일어가 같은 서게르만어군(각주2)이라는 점은 이에 대한 필연성을 떠올리게 한다 - 철학자들의 영향이 컸다는 점, 영미 지역이 분석 철학의 주축이지만 프랑스나 독일처럼 문화와 그 철학이 연관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녹아들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영미 지역의 특성이라고 보긴 어렵다. 양자역학의 인식론에 관해서 코펜하겐 학파나 아인슈타인, 데이비드 봄 같은 과학자들이 EPR 역설이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등을 가지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그것을 정립할 때, 미국의 과학자들은 '그게 뭐가 중요해?'라며 - 한 과학자가 미국의 과학자 집단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는데, 출처는 불명. 하이젠베르크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 원자폭탄과 원자로 등을 만들어 냈던 걸 생각하면, 영미의 문화와 맞닿아 있는 철학이란 차라리 실용주의나 정치철학에 가깝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각주1-1) 안슐루스 직전에 오스트리아를 떠나 이후 영국 국적을 취득했기에, 독일어권 철학자지만 국민 국가로서의 독일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고향이자, 분석 철학의 기틀인 빈 학파 구성원들이 안슐루스와 2차 대전 이후 영국과 미국으로 떠나며 영미 지역에서 분석 철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가 6일 차이로 태어난 1889년 4월 생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태생이고, 1903년과 1904년 사이에 같은 레알슐레(Realschule) - 한국의 특성화 중학교 정도에 해당 - 에 다녔다는 점은 운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1904년, 오스트리아 린츠의 레알슐레에서
(각주2) 영어를 만든 앵글로-색슨족은 윌란(유틀란트) 반도의 앙겔라 지방에 살던 게르만족과, 작센(각주2-1)에 살던 게르만족이 현대의 영국으로 이주한 것이기 때문에, 게르만어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앵글로-색슨족의 이주
(각주2-1) 여기서 이야기하는 작센과 현대의 작센은 상당히 다른 위치에 있는데, 대략 평양과 부산 정도의 거리 차이가 난다. 그 변화의 과정이 놀라운데, 아래 그림으로 정리했다.
작센의 영토 변천사[1]
작센의 작위 변천사[1]
(각주3) 튀르크어권은 터키(튀르키예) 일부와 캅카스 일부(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우즈벡, 카자흐 등)를 뜻한다. 터키와 캅카스 일부에 인도-유럽어족이 분포되어 있는 이유는 그곳이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 - 둘 다 이란계 - 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터키는 범튀르크주의의 부활을 위해 위의 튀르크어권 국가들 간의 연합체인 OTS(Organization of Turkic States, 튀르크어권 국가 기구)를 발족했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사실만으로 이정도 규모의 연합체를 만든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에르도안의 튀르크-국수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보자. 사견으로는 터키가 카스피 해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투사할 수도 없거니와, 구성국들의 동상이몽으로 큰 반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OTS 구성국. 터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옵저버), 헝가리(옵저버)
(각주4) 인도는 확실한 하나의 공용어가 없다. 힌디어와 영어 정도가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지만 힌디어조차 지역마다 다르다. 심지어 남부 따밀어는 인도-유럽어족도 아니고 드라비다어족에 속한다. 방언 수준이 아니고 계통적으로 아예 다르다.
인도 언어 분포[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