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많은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 남문이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기에 웅장하고 화려하다. 좌우로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췄었다. 종갓집 대문답게 역사의 성하고 쇠함에 따라 부침도 많았다. 1395년 왕이 업무를 보고 쉴 수 있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이 완공되었다. 1399년 궁 둘레에 담을 쌓고 동쪽에 건춘문을 서쪽에 영추문을 남쪽에 정문을 세웠다. 이로써 경복궁은 완전한 궁궐이 되었다.
광화문은 처음에는 통상적으로 남문을 일컫는 ‘오문午門’이라 불렸다. 오午는 십이지 중 일곱 번째 지지다. 시간으로는 낮 11부터 오후 1시 사이다. 낮 12시를 정오正午라 부르는 이유다. 정오를 기준으로 오전과 오후가 나누어진다. 방위로는 남쪽이다. 경복궁의 남문이니 의당 오문이다. 많이들 천안문이 중국 자금성의 정문인지 안다. 아니다.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午門이다.
오午가 열두 가지 띠로는 말(馬에) 해당하니, 홍예문 천장 한 곳에 말 그림을 그려 넣었다. 사방을 지켜준다는 사신四神 중 남쪽은 주작이니, 임금만이 다닐 수 있었고, 가운데 홍예 천정에 봉황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몇 년 후에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이름이 바꾸었다. 정문에는 어진 이들이 드나드는 바른 문이란 뜻이 담겼다. 1425년 세종 7년부터 광화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집현전 학사들이 <서경> 요전편에 나오는 ‘광피사표光被四表 격우상하格于上下’에서 따서 지었다. 요임금의 성덕이 드러나 사방에 미처 온 천하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우리 임금의 큰 덕도 온 나라에 두루 비쳐 만백성이 다 밝아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광화문光化門이라 지었다. 2층 누각에는 종을 걸어 때를 알렸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 임진왜란 통에 광화문은 전소되어 250여 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도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술책에 광화문은 또다시 수난을 당했다. 1927년경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 근정문 앞에 들어섰다. 이때 광화문도 헐려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쫓겨났다. 자기 터를 떠난 건물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잃는 법이다. 해방되고도 광화문은 본래 자리를 찾지 못했다. 외딴곳에서 근근이 모양만 유지하다, 이번에는 6·25사변 통에 폭격을 맞아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광화문 동쪽 길 한가운데 섬처럼 고립되어있는 동십자각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돌로 된 벽면 여기저기에 총탄 자국이 선명해 동족상잔의 비극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건물이 무슨 죄가 있기에 사람들로 인해 매번 이런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
1968년 광화문은 본래 서 있던 언저리 자리로 돌아왔다. 불에 타지 않고 남아있던 석축 일부를 가져오고, 문루는 문화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철근콘크리트구조공법으로 중건되었다. 문의 축도 근정전의 중심축에 맞춘 것이 아니라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청사에 맞추었다. 그러다 보니 3.5도가량 축도 어긋났고, 본래의 자리보다 14.5 미터 정도 뒤로 물러난 곳에 문이 세워지고 말았다. 광화문의 현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한글로 바뀌어 달았다. 겉모습만 광화문이었지 모든 것이 가짜였다.
2006년에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환책으로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 본모습 찾기 사업이 시행되었다. 콘크리트로 된 문의 전부를 해체하고, 대대적으로 터를 발굴 조사하여 본래의 광화문 터를 찾아내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공사를 하였다. 고종 때 임태영이 쓴 글씨를 복원하여 현판으로 걸었다. 현판 때문에 약간의 말썽이 생겨 아직도 고증이 필요하지만,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추어 일반에 공개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광화문이야말로 굴곡진 한국역사의 산증인이란 생각이 든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라는 미당의 시 구절이 자꾸 입에 맴돈다.
사람들은 왜 광화문 앞으로 모이는 걸까?
“사람들은 왜 광화문 앞으로 모이는 걸까?”
지난번 촛불집회 때,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야, 대통령이 근무하는 청와대가 가까우니까”
다른 친구의 대답이다.
“아니야, 원래 터가 그런 곳이야.”라고 내가 단호히 말했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그건, 뭔 소리야” 한다.
“광화문에 새겨진 팔괘를 본 적 있어?” 내가 물으니
“그런 게 광화문에 있어?”라며 다들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다.
“나중에 가게 되면, 광화문 1층 석축과 2층 누각 사이를 자세히 봐봐. 회색 전돌을 배경으로 문양이 장식되어 있고, 그 중간 중간에 팔괘가 앞뒤 그리고 옆에도 박혀 있다고요.”
“정말! 근데 그게 뭐 어째 다는 거야”
“그거 혹시 미신 아닌가?” 한층 더 떠 이리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답답한 노릇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팔괘가 미신이면 우리나라 태극기는 뭐란 말인가. 태극기에 엄연히 하늘과 땅[건곤乾坤], 물과 불[감리坎離]을 상징하는 4괘가 들어있는데 말이다.
광화문에 장식된 것은 후천팔괘이다. 팔괘에는 일 년 사계절 변화에 맞춰 인간사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離괘는 후천팔괘 중에서 방위로는 남쪽이다. 광화문 앞문 정 중앙에 이괘를 놓은 이유다. 이괘는 불을 상징하는데, 한낮에 서로 만나 얼굴을 보는 자리란 뜻이다. [상견호리相見乎離]
지금은 밝은 마당에 불 밝히는 광화문 앞이 명당
광화문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광장이다. 조선 시대 때에도 폭이 17미터가량 되는 육조거리가 조성되었던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광화문 앞 광장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 얼굴을 보는 장소다. 애초부터 숙명적으로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터다. 밝아야 하는 곳이기에 모두 촛불을 켜 불을 밝히는 것이다.
왕조시대에는 근정전 앞마당이 명당이었다면, 국민이 주인인 자유민주주의 시대에는 광화문 앞이 명당이 된다. 밝은 마당에 모여 모두 불을 밝히고 한목소리로 밝은 사회를 만들자고 외치는 것이 그래서 아주 자연스러운 거다. 아기가 태어날 때도 불기운으로 울며 태어난다고 한다. 한세상 잘살아보겠노라고. 우리도 한번 인간답게 잘살아보자고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외친다.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고.
다만, 개인적으로 좀 바라는 것은 광화문광장 조성이다. 체코 프라하에 있는 바츨라프 광장 등을 벤치마킹하는 것은 좋은데, 우리 방식으로 광장을 꾸몄으면 좋겠다. 뭘 자꾸 세우고 꾸미려 들지만 말고, 온전히 비워두었으면 좋겠다. 한국의 마당은 비어 있어야 제격이다. 중심은 블랙홀처럼 비워두어야 힘이 생긴다. 가능하면 흙으로 되어 있으면 더 좋겠다. 빈 마당의 흙과 하늘이 서로 교통해서 좋은 기운이 만방으로 퍼질 것이다. 빈 광장이야말로 소통의 장이다. 텅 빈 광장 양옆으로는 창덕궁 금문교 앞에 있는 회화나무를 길게 심었으면 더 좋겠다.
- 글 : 서경원 건축전문 칼럼니스트
-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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