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1. 녹취록 정리를 시작하면서

in wisdomandjustice •  6 years ago 

서울대 규장각은 ‘한국현대사와 군’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를 실시하면서 이대용 장군에 대한 녹취록을 작성했다. 이대용 장군은 월남의 마지막 공사로 알려져 있다. 당시 주베트남 대사관 공사로 근무했으며 월남이 패망할때 교민들 보호때문에 철수를 하지 못하고 월맹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외교관은 포로로 잡지 않는다는 국제법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이대용 공사를 5년간 감옥에 가두고 북한으로 보내려고 했다. 이대용 장군은 끝까지 이들의 회유와 억압을 거부했고 결국 귀환했다. 2012년 11월부터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의 녹취록을 읽고 있다.

이미 전에 언급한바 있지만 이대용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한국전쟁 당시의 영웅으로 알려진 심일 소령의 전설이 거짓말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얼마전 이중간첩 이수근이 재심에서 무죄가 되었다. 당시 이대용 장군은 사이공에서 이수근을 직접 체포했다. 나중에 포로에서 석방된 이후에 이수근이 간첩이 아님을 증언했고 당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중이던 이수근의 조카가 무죄로 풀려난 바 있다.

이대용 장군은 한국전쟁 3년을 중대장과 대대장으로 130여차례의 전투를 치루었고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이후에는 대쪽같은 삶을 살다가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하고 준장으로 군문을 떠났다. 이후 주월남 공사로 근무했으며 교민을 보호하기 위해 남아 있다가 포로가 되어 5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감옥에서 풀려나 귀환해서는 과거에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이 허구라는 것을 밝혔다. 만년에는 한국전쟁 당시 육탄으로 북한군 자주포를 파괴했다는 전사기록이 사실이 아니고 허구라고 밝혔다. 당시 이대용 장군이 중대장으로 직접 그 상황을 보았으며, 기실 심일은 자주포 파괴는 커녕 가지고 있던 대전차포 1문을 잃어버리고 도망쳤다고 증언했다. 이대용 장군이 그런 사실을 밝힌 것은 군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판치면 안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원래 심일의 전공조작 사건때문에 이대용 장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에 녹취록을 읽으면서 정리를 시작하려고 한다.


1925년 11월 20일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 우봉리 142번지에서 출생했다. 삼형제중 막내였던 아버지는 재산을 많이 물려받지 못해 형제들 중에서 빈한한 생활을 해야했다. 모두 6남매로 2남 4녀중 장남이었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8세쯤에 백마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보통학교 6년을 마쳤으나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공부를 잘했기 때분에 백마보통학교 교장이 배려를 하여 학교를 1년 더 다닐 수 있도록 해주었으나 결국 그 다음해에도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이후 중학교 2학년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 독학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나온 강의록을 보고 혼자 공부했다. 그 이후 전액 관비였던 경성사범학교 3학년 과정에 편입할 수 있었다. 1년과정의 교사과정과 6개월의 연구과정을 마치고 교사가 되어 황해도 고향으로 배치되었다. 해방이 되자 서울사범학교에 다시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으나 치질과 폐병에 걸려 병석에 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울 사범학교에 들어간 이대용은 신문을 돌리면서 고학을 했으나 제대로 먹지 못해서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사범학교 김기수 선생의 배려로 서울대학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해서 치질은 치료를 했으나 먹지 못하고 쉬지못해 폐병은 차도가 없었다.

이대용의 북한의 김일성 대학에서는 무료로 공부시켜 준다고 하여 서울사범학교 교수들에게 상의를 했다. 당시 정순택 교수와 사범대학장이던 신기범 교수는 통일되면 김일성 대학이나 서울대학이나 마찬가지니 당장 돈이 들지 않는 김일성 대학으로 가라고 권유를 했다. 마침 먼저 월북했던 이극로 박사와 연락이 되어 김일성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1946년에 북한으로 넘어간 이대용은 1947년 봄이되자 우선 교사로 취직을 했다.

그러나 북한의 정치적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김구가 장개석에게 광산권을 팔아먹었고 이승만이 미국이에 철도권을 팔아먹었다며 학생들에게 김구와 이승만 그리고 한국민주당이 민족반역자라고 가르키라고 했다. 한편 이대용에게 조선공산당 당원이 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이대용은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고 사양을 하면서 회피했다.

당시 북한에는 교원이 부족해서 교원학교를 만들었다. 능력있는 교사들이 모두 이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교원을 시급하게 양성해야 했다. 이대용은 인민학교 5학년 담임을 담당하는 동시에 교원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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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

덕분에 좋은 공부하고 가요^-^

항상 많은 배움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훌륭하신 분입니다.
뒷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올려주신 글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