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 어깨 위를 손끝이 두드린다. 칠흑 같은 화면이 멈추고, 디졸브 하나 없이, 세계로 장면이 넘어간다. 이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멀어지는 파문처럼 차츰 깨어났다.
잠이 들었었구나. 눈은 아직 닫혀 있었지만, 빛이 드는 게 느껴졌다. 눈을 찌푸리며 찌뿌둥한 몸을 등받이에서 떨어뜨렸을 때, 작지만 빠르고 깨끗하게 나를 깨우던 목소리는 이미 다른 자리로 지나쳐간 뒤였고, 요란하게 진동하는 엔진 소리가 나를 일으키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깜깜한 속으로 희미하게 날개 판들이 조금씩 흔들리는 게 보였다. 착륙 방송이 나오고 천장에는 안전벨트 불이 켜져 있었다.
드디어 다시 한국이다.
원래 외국 촬영은 계획에 없었던 일이지만, 이번 포토에세이집을 맡은 편집자가 지금 원고에는 새로움과 유니크함이 없다며 매달렸다. 한국에서 찍은 ‘일상 속의 자전거’는 힘든 사회를 보여줄 뿐이지만 ‘자전거에 녹은 일상’은 개인과 자전거 사이의 애착을 보여주지 않겠느냐고, 끈질겼다. 매달리다 못해 헤이그에 있는 대사관에까지 연락해버린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주말을 내어 헤이그와 암스테르담의 골목골목을 들여다보고 왔다. 그 편집자도 참. 한창 떠오르는 신예 작가의 차기작을 떠맡다보니, 자기 손을 거치고 망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던 거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해할 수 있다. 회사라는 팽팽한 사회 속에서 열등하지 않으려는 버둥거림...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콜키퍼-Power Off]18/10/28 23:37, 010-xxxx-xxxx 통화버튼을 누르면 연결됩니다.
부재중전화. 저장된 번호는 아닌데... 모르지 뭐.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겠지. 피곤함에 그냥 폰을 넣으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타이밍 한 번 참...
“여보세요?”
...
톡톡.
“저기, 혹시 안 타세요?”
“네? 아... 타야죠.”
그러고 보니 택시정류장 앞이었구나. 줄 맨 앞에 서서는 멍하니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른 차에 올라 행선지를 부르고는 다시 휴대폰 패턴 잠금을 풀었다.
“네, 지금까지 Charlie Puth의 Attention 들으셨습니다.”
멈칫. 정류장에서 두드림을 느꼈던 팔에서부터 소름이 돋아왔다. 서진의 라디오였다. 마침 택시 기사가 틀어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진이 얜, 지금 괜찮은 걸까?
“아 맞다. 방송국 앞에 베이커리가 있는데, 그 아티 어쩌고 저쩌고 하하하.... 제가 그 가게 단골이거든요. 오늘따라 그 집 타르트가 먹고 싶네요. 저번에도 누가 저보고 거기서 보자고 했는데, 못 갔어요. 바빠서. 여러분들도 그런 단골 가게가 있나요? 안 가면 허전하고 막 생각나고. 제게 여러분은 그런 존재랍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저는 여러분들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하하. 막상 말하려니 쑥스럽네. 앞으로도 계속 저 많이 사랑해주세요. 제가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은 마지막 곡은, Ariana Grande의 breathin입니다. 새벽 한 시, 서진이었습니다. 은하수를 건너 별자리를 헤아리는 밤. 내일도 다시 찾아올게요.”
나도 몰래 한숨이 쉬어졌다. 서진이 얜, 대체, 얜... 왜?
“혹시, 꺼드릴까요? 불편하시면...”
신호를 받은 기사의 물음, 조심스러웠다.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아까부터 곁눈질로 내 반응을 살피셨나 보다. 기사님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시더니 말없이 엑셀을 다시 밟으셨다. 신호를 받을 때에도 창틀에 팔을 걸치고는 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였다.
시간이 흘러 꺼져가는 화면을 다시 눌러 밝히고는, 통화 기록 맨 위에 있는 번호를 찾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태윤 씨, 고성하입니다. 혹시 바쁘신가요?”
“아... 네 죄송한데 조금만 이따 연락드릴게요. 방금 막 라디오가 끝나서... 죄송합니다...”
통화가 끊기기 전 서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서진... 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문자 앱을 열어 마지막 문자를 다시 봤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던 태윤이 꼭 봐달라며 보낸 사진.
[전에 내가 라디오 끝나고 방송국 1층 아티제로 나오라 했잖아. 그때 왜 안 나왔어 서진아? 너도 나 좋아하잖아.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곤란하지 자기야.]
정류장에서 느꼈던 선뜩함이 다시 등에 퍼졌다. 아니, 그때의 감정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왜 서진은... 마지막 멘트를 그렇게 날린 걸까? 아티제 타르트를, 거길 가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왜..?
생각해보니 태윤의 전화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 서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이미 그 아이의 마음은 정해졌다는 거다. 그리고 태윤은 서진에 대해 더 아는 바가 없다. 있으면 아까, 진작 말했겠지. 애초에 나한테 전화가 온 것도, 옛날에도 그런 일 있었냐고 물어보러 온 거지 알려주려고 온 게 아니잖아. 그리고 태윤이라면, 만약 뒤늦게 떠오르는 일이 있다 해도 곧바로 문자를 보낼 거다. 그렇다면 서진의 요즈음을 가장 잘 알 사람은...
통화기록을 내리다 서진의 이름에서 손이 멈췄다.
아니다, 아직은 이르다. 다시 스크롤,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 네? 아, 이 시간에.. 방금 라디오 끝난 거 듣고 전화했죠~ 이제 막 네덜란드에서 사진 찍고 돌아오는 길인데, 아니 돌아왔는데, 택시 탔더니 선배 라디오가 딱 끝나가고 있더라고요.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뭔가 선배 생각하니까 신문사 있을 때 생각도 들고.. 왜, 선배 PD로 가시기 전에 저랑 같이 신문사에서 인턴했었잖아요~ ... 네, 그렇죠.. ... 이야, 근데 은별은, 진짜 오래 가는 이유가 있네요. 아까 들으니까 멘트 하나하나가.. ... 네? 아, 당연히 선배가 PD로 계셔서 그렇죠, 선배님! 하하 ... 아, 그럴까요? 전 뭐, 이제 프리하죠. ... 피곤하긴 해도, 선배 뵙는 건데요 뭘.. 아, 네네. 바로 가겠습니다.”
박하준 PD, 언론정보학과 2년 선배, 눈치 빠른 걸로 학교에서부터 유명했다. 그 눈치로 라인도 잘 타서 지금은, 속칭 ‘은별’, ‘은하수를 건너 별자리를 헤아리는 밤’ 3번째 메인PD.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한 움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오늘 다시, 밤샘이다.
written by witz-bald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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