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 샷 추가요.”
진동벨이 부르르 떨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앞으로 간다. 점원이 내 마스크 낀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내가 싸늘하게 바라보자 화들짝 놀라 미소를 지으며 음료를 건넨다. 저 정도면 눈치 없는 수준이 아니라 안면인식장애다. 점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음 짓고는 커피를 받는다. 뚜껑을 열어 깊게 향을 들이마시니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는 듯하다.
오후에도 한 잔 사야지. 아, 매니저가 나 카페인 중독이라고 그만 마시랬는데. 아 뭐 어때. 죽기보다 더 하겠어. 어차피 과로로 죽나 카페인 중독으로 죽나. 거기서 거기지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스타벅스 로고가 박힌 목재 문을 밀어 열고 걸어 나온다.
방송국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타,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들여다 본다. 남색 블라우스에 검정 슬랙스, 하얀색 단화. 패션에 관심 많은 사람들은 다 알아보는 명품브랜드 제품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씻고 샵에 들렀다 오니 커피로도 피로가 회복이 안 되는지 머리가 무겁다.
피곤해 죽겠다. 앞으로 매니저한테 픽업해 달라고 할까.
생각해 보니 어제도 주말분 녹화 때문에 동 틀 때 돼서야 집에 비척비척 기어 들어갔었는데. 주 52시간 근무는 개나 줘버린지 오래다. 이렇게 개처럼 벌어서 언제 쓰지.
폰이 우웅하며 울리고, 10시 30분까지 4층으로 오라는 매니저의 문자가 화면에 뜬다. 한숨을 내쉰 후 미간을 누르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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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웃느라 턱 근육에 경련이 인다.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을 하고 상투적인 웃음을 짓고. 그래도 오늘 인터뷰하러 온 기자는 저번 기자처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분위기도 나름 화기애애했고.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인사하고 세트장을 나왔다. 이것으로 세번째 스케줄이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서울 하늘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새카만 검은색을 토해내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니 그와는 상반되는 즐비한 가로등, 자동차 라이트, 건물 불빛. 깊어가는 밤이 무색하게 도시는 바쁘게도 돌아간다.
폰을 보니 라디오 시작하기 전까지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태윤아, 나 커피 좀 부탁해.”
“아 누나 그러다 진짜 카페인 과다 섭취로 죽는다니까요! 이러다 신문 기사 나겠네. 최초로 카페인 중독 사망자 발생했다면서.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건 귓등으로도 안 듣죠?”
“카페인 중독 말고 잔소리로 질식사하겠다. 너무 피곤해서 라디오 때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래.”
태윤이는 말이 많다. 그럼에도 내가 투덜대기만 하지 사장한테 매니저 바꿔달라고 하지 않은 건, 그 나이대만의 풋풋한 분위기 때문이....라든가 그런 이유면 좋겠지만 사실 그냥 사장실에까지 찾아가기 귀찮아서다.
아,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늙은 것 같은데, 우리 두 살 차이다. 다만, 나는 이리저리 치이며 세상의 색이 섞인 혼탁한 회색빛이라면, 저 아이는 아직 싱그러운 연두빛을 뿜어내는 존재랄까. 이 어두운 연예계에서 홀로 봄에 올라오는 새싹의 색깔 같은, 흔치 않은 순수함과 열정을 간직한 아이.
마음에 안 들어.
‘띵.’
이런 내 생각을 혼내듯 폰이 울린다.
[성하
오랜만에 얼굴 볼겸 술 한 잔 할래?]
[죽은 줄 알았네. 하도 연락 없어서]
[성하
미안 ㅎㅎ 바빴어 사진집 마무리하느라. 네 동네 이자카야 어때? 라디오 마치는 시간 맞춰서 가 있으면 되나?]
[그려. 마치고 연락할게]
오늘도 일찍 자긴 글렀네, 영광인 줄 알아야 돼 넌. 내 5시간 수면 시간 중 2시간을 너에게 할애할 예정이니.
오랜만에 친구 만날 생각에 들떠 부스 안에서 대본 점검을 하고 있으니 태윤이가 커피를 가져다주며 웬일로 신나보인단다.
잠시 후, 자리에 앉아 헤드셋을 꼈다.
3,2,1 온에어
여러분이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언제인가요? 저는 요즘 같은 가을이에요. 가을이 완연한 하늘은, 모든 걸 담을 수 있을 듯 보이죠. 티셔츠 한 장만 걸치기엔 춥지만 얇은 점퍼를 입으면, 그 위로 스쳐지나가는 가을의 서늘하고도 차분한 바람.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스쳐지나가듯 가벼운. 때로는 그런 가벼움이, 선명하게 남아있거든요. 너무 스스로를 무겁게 하지 말아요. 스쳐지나가듯, 담담하게 걷다 보면, 요동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아등바등 무겁게 사는 스스로에게, 때로는 가을처럼 선선하게 수고했다 한 마디 건네주세요. 남들에겐 수고했다, 고맙다 잘만 하면서 정작 스스로에겐 왜 그리도 엄격한가요. 여러분,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어요. 지금은 밤 열한 시, 저는 서진. 은하수를 건너 별자리를 헤아리는 밤.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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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사연을 들어주는 코너, 여러분을 헤아리는 밤입니다. 오늘의 사연은 서울에 사는 여고생 이가영 친구가 보내줬는데요.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학원 끝나고도 1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집 오면 다들 자고 불도 다 꺼져 있어요. 제 친구들은 다 뭐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열심히 한다 이러는데 저는 딱히 꿈도 없고, 미래에 뭐할지도 모르겠고, 대학도 어디 갈지 모르겠어요. 우울해요.
“아… 일단 오늘도 열심히 달려온 가영 양, 너무 수고했어요. 사실 뚜렷한 뭔가 없이 달리는 건 힘들죠. 앞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죽어라 뛰는 거니까. 근데 어른 돼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하루하루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는데, 그날이 그날이잖아요. 딱히 뭘 해야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땐, 좋아하는 노래 들으면서 잠깐이라도 좋으니 산책하며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뭘까… 하고요. 아직 하고 싶은 걸 못 찾은 사람은 많지만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은 없죠. 그게 꼭 꿈과 연결되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걸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눈빛부터 다르더라고요. 그리고 그 나이대에 꼭 꿈이 뚜렷할 필요 없어요. 아직 십몇년밖에 못 살았는데, 앞으로 40년, 50년의 계획이 뚜렷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거죠. 친구는 지극히 당연한 고민을 하고 있고, 스스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전 오히려 멋있어요.”
“노래 듣고 올게요, 볼빨간사춘기의 나의 사춘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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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를 4분 남겨놓고 마지막 노래를 틀고 헤드셋을 벗었다. 아, 오늘도 끝났다.
부스를 나오는 나에게 태윤이가 팬이 보낸 선물이라며 편지와 종이백 등을 건넸다.
오늘은 친구랑 약속 있다는 말로 태윤이를 보내고 탄 차 안. 카시트에 몸을 파묻으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이러다 졸음운전하면 어떡하지.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리다가, 조수석에 연하늘색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편지봉투가 눈에 띄었다. 무심코 집어들고 봉투를 안에 있는 편지를 꺼내 펼쳤는데...
세상에. 편지로도 이렇게 수다스러울 수가 있나.
안녕하세요 서진님!
매일밤 11시 은별 너무 잘 듣고있는 ()()고등학교 단비라고합니다!
서진님은 어떻게 매번 그렇게 따뜻하고 예쁜 말들을 해주실 수 있는건가요? 정말 항상 힘이 되는것 같아요..그런 말들은 서진님만 하실 수 있는거잖아요ㅠㅠ
PS. 사실 제 취미가 친구들 고민상담이거든요..이건 제가 운영하는 사이트 주소인데 시간되실 때 꼭 한 번 들러주셔서 저에게 고민상담의 진수를 보여주셨으면 좋겠어요ㅎㅎ너무 존경합니다!😆
정말 오랜 팬 단비로부터...
뭐긴 뭐야. 대본이지.
피식.
생판 모르는 남인데 공감은 무슨 공감.
내 주변에 왜 이렇게 순진한 애들이 많아.
편지를 대충 접어서 다시 봉투에 집어 넣고는, 문자를 보낸 뒤 시동을 걸고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 지금 출발. 30분 있다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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