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항일대도를 논하다 (论中国之抗日大刀)
겅샤오웨이(耿绍玮),류딩이(刘定一)
근대중국의 항일전쟁은 1931년 9월 18일 시작되어 1945년 8월 15일 종결되었다. 수많은 전투 중 자오덩위(赵登禹) 장군은 1933년 3월 11일 심야에 일본군을 급습하였고, 항일전쟁 사상 첫 승전을 이끌어냈었다.[1] 항일대도(抗日大刀)는 이 전투로 인해 수많은 항일민중의 관심을 끌었다. 이를 기념해 마이신푸(麦新谱)는 <대도행진곡(大刀进行曲)>을 썼으며, 이 노래는 장강의 남북에서 널리 불려 전국인민이 일본 침략자에 저항하도록 사기를 드높이기도 했다. 항일대도는 일종의 정신이 되어 인민의 투지를 불러일으키고, 필승의 신념을 북돋으며 항전에 있어 기적을 창조하였으니, 우리가 그 원인을 탐구할 가치가 있다.
본문의 항일대도는 냉병기 시대의 병기 중 하나를 가리킨다. 형태는 단도(单刀)와 흡사하나 무게는 비교적 더 무겁고, 칼자루는 단도에 비해 조금 더 길어 양손에 잡기 편하다. 칼등 또한 보통 칼보다 두꺼운데, 이는 항일전쟁시기 비교적 널리 보급된 일종의 살상용 무기이다.
- 항일군민이 대도를 무기로 선택한 원인
1-1. 당시 중국군대의 장비상황 분석
전쟁에 있어 무기장비의 좋고 나쁨은 전쟁의 승패를 크게 좌우한다. 중국은 막 군벌의 혼란을 겪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생산력이 낙후된 뒤라, 국가부대의 장비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때 병공창의 생산력은 수많은 항일군민의 무기장비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충분한 원료가 있었어도 사용가능한 무기를 생산해낼 수 없었다. 허나 외적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을 한시도 늦출 수 없었기에, 중국군민은 대체품을 무기삼아 대일작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2. 대도(大刀)는 중국군대에 있어 양호한 사용기초를 가져
중국은 전통공예의 역사가 유구한지라 제련 및 단조기술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대장간”은 모두 도(刀), 검(剑) 등의 냉병기를 만들어낼 수 있어 일본에 저항하는 데 쓸 수 있었다. 대도(大刀) 제작을 위한 공예는 간단한데다 칼 사용 방법도 배우기 쉬운 편이라, 대도는 널리 보급되었다. 당시 무기장비의 객관적 상황에 있어 백병전은 효과적인 전술방식이었다. 풍옥상(冯玉祥)의 서북군은 능란한 대도술로 장비의 부족을 메꿨다. [2]
1-3. 대도와 총검(刺刀) 사용의 특징 비교
총검은 가볍고, 빠르며, 공격 때에는 주로 찌르고(刺), 파내며(挑), 들이받는(顶)다. 중국의 “백병지적(百兵之贼)”인 장창[3]과 유사하며, 단지 길이만 장창에 못지않을 뿐 실전에서는 주로 민첩하게 적을 물리쳐낸다. 중국무술에서 단도(单刀)는 장창을 파훼하는 데 가장 먼저 선택되는 무기로, 항일대도가 가진 독특함은 송나라 시기의 수도(手刀)에 가깝다는 것이다.[4] 칼자루가 더 길고, 칼코등이가 한환수도(汉环首刀)와 유사한데, 그렇기에 항일대도는 각종 전통도의 특징이 한데 집약된 종합형 칼이다. 칼의 무게가 전통도에 비해 훨씬 무겁기 때문에 한 손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 두 손으로 잡아 그 강맹한 힘을 발휘해야 사용방법과 효과에 있어 총검을 잘 막을 수 있다.
1-4. 대도는 적의 심리적 요인을 잘 이용했다
일본인은 대다수가 불교를 믿고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 4 ] 한 설에 따르면 일본인은 죽을 때 시체가 온전치 못하면 그 영혼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여 윤회할 수 없다고 한다. 일본병사는 모두 엄격한 훈련을 받아 대부분 전투에 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전쟁 중 전사하면 그들은 천황에 대한 충정 때문에 윤회 후 윤택한 후세를 누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전사 후 시체가 온전치 않으면 자신의 혼백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고혼이 되어 떠돌까 근심했다. 그렇기에 백병전 중 일본사병은 자기편이 대도에 몇 조각 베이고 나면 위축되었고, 곧 투지를 상실하였으며, 부대의 전투력이 떨어졌다. 중국 군대의 대도가 가진 충격력은 전쟁초기에 선명히 드러났다.
- 항일대도의 발전과정
2-1. 항일대도를 제창한 대표인물
혹독한 전투와 피 튀기는 경험 하에, 사람들은 대도(大刀)를 쓰는데 있어 힘뿐만 아니라 훈련이 필요하며, 실용성 또한 가미해야함을 인식했다. 단칼에 죽이려 노력하고, 적의 영혼에까지 공포를 줘야했던 것이다(力争一刀毙命,慑敌魂魄). [5] 그러자 사용하기 간단한 대도 도법이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개발되었다. 대표인물은 다음과 같다. 리야오천(李尧臣), 장즈쟝(张之江), 마펑투(马凤图), 장즈종(张自忠) 등.
2-2 항일대도의 4개 개발 단계
2-2-1 전통대도의 투로(套路) 연습단계
이 단계는 기본적으로 군벌의 혼전 단계로, 각 군은 사병의 작전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존에 이미 있었던, 연습하기 쉬운 방법을 선택하여 비교적 실용적 투로를 중심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당시 대부분의 군대장비는 비교적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부대의 전투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대표적인 투로는 <무극도(无极刀)>이다.[6]
2-2-2 대도 투로연습의 간단화 단계
이 단계는 기본적으로 군벌혼전의 후기로, 대도 발전에 있어 중요한 단계이다. 사람들은 부대가 사병을 훈련시키는 최종 목적이 적을 죽여 승리하는 데 있다는 의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투로에 있어 살상력이 가장 큰 초식을 뽑아 엮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사병으로 하여금 시간이 많이 드는 실용성 떨어지는 초식을 연습하는 것을 방지하고, 도법의 실용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대표적인 투로는 <군벽십이식(军劈十二式)>이다.
2-2-3 실용초식 연구개발 단계
해당 단계는 항전초기 시기다. 투로의 간소화는 사병의 훈련효과를 매우 크게 향상시켰지만, 목적성은 강하지는 않았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후 일본군의 선진적인 무기와 프로이센식 훈련은 중국군대로 하여금 연달아 패배케 했다. 일본의 총검기술을 진정으로 격파하기 위해, 무림인사들은 총검의 공격기법에 대해 연구 분석을 진행했으며, 마침내 일본군 총검기술의 약점을 찾아냈다. 동시에 그 약점을 공격할 초식을 연구해냈는데, 이후 대일작전에 있어 이러한 초식 설계가 가진 정교함과 실용성이 명확히 드러났다. 대표적인 투로는 <파봉팔도(破锋八刀)>이다.
2-2-4 항일대도 형성단계
해당 단계는 항전 초기부터 중기까지다. 항일대도의 발전은 이 단계에 이르러 이미 매 초식 간의 연계를 중시하지 않고 완전히 실용성을 우선시했으며, 훈련 중에는 기본공 연습도 강조하지 않았다. 가장 큰 특징은 경험이 도법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전우에게 전수한 것은 모두 일본병사와 필사적으로 싸울 때 얻은 경험이었다. 이 시기 항일대도는 구성이 없어 보이고, 일정한 규율을 따르지 않는 듯하지만, 항일대도의 살상력은 오히려 매우 크게 발휘되어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2-3 항일대도의 특징
2-3-1 항일대도의 무게와 길이 디자인
항일대도는 보통 도(刀)보다 조금 더 무거운 약 2킬로그램으로, 칼등은 두툼하며 칼날의 앞은 예리하고 뒤는 넓다. 도신은 대략 80cm이다. 원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항일군민의 무기장비가 낙후되어있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매복전을 위주로 해야 했다. 때문에 전사들은 먼 길을 걸어서 지리적 이점을 획득해야했다. 사병들은 2kg의 대도를 장시간 메고 행군했는데 체력 소모가 크지는 않았다. 이는 사병의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게 하였다. 도신이 두터운 것은 일본군 총검이 찔러오는 걸 막는데 효과적이었고, 칼날의 앞부분이 예리한 것은 대도가 사람을 찍어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상을 직접 찌를 수 있게 하여 대도의 실용성을 증강시켰다. 칼의 길이는 약 80cm로, 휴대가 간편하여 몸동작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칼자루를 길게 한 것은 사용할 때 양속으로 칼을 잡아 힘을 내는 데 이익이 있게 함이었다.
2-3-2 “선파후격(先破后击)”은 항일대도의 구별되는 특징
무게에 있어 항일대도는 일본 총검보다 훨씬 무겁기 때문에 사용 시 총검만큼 재빠르지는 못했다. 때문에 공격속도의 측면에 있어 총검에 비해 다소 느렸다. 만약 직접 진공하는 방식을 선택한다면 살상효과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기 쉽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도를 사용할 때에는 대개 적이 방어토록 해야 하며, 방어동작을 틈타 힘을 발휘해 대도의 타격속도를 높여, 상대가 총검술을 쓴 후 회수하는 때를 활용해 치명적인 공격을 완성해야한다.
2-3-3 “호선공격(弧线攻击)”은 항일대도의 기술특징
항일대도의 초식 설계는 전통적인 도법과 달리 동작의 여러 과정을 중요시여기지 않았고, 연습자에 대해서도 요구사항을 많이 줄였으며, 그 결과 대도를 한 번 휘두르는 데까지 단순화시켰다. 칼이 무겁기 때문에 칼을 뽑을 때 직선으로 나가지 않았고, 그렇기에 칼이 호선을 그리게 하여 칼의 관성을 사용해야했다. 그리하여 그 날랜 움직임을 통해 목표를 공격하고, 베어 죽이는 면을 넓혀, 적으로 하여금 도망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호선 공격은 항일대도의 기본 특징이 되었다. 수비를 할 때에 먼저 대도에 속도를 주고, 공격을 완성한 뒤에는 힘을 내어 대도로 하여금 비교적 큰 관성력을 얻게 하여, 회전하는 속도를 빌리고 적당한 변위를 더해 공격을 완성하는 것이다.
2-3-4 항일대도의 전형적인 초식
항일대도의 고전초식은 다음과 같다. 양속으로 대도를 잡고, 적의 총검이 들어올 때 칼등을 이용하여 총검을 막는다. 이때 칼은 머리 위에 있어, 기세를 몰아 내려찍어 적에 대한 공격을 완수한다. 또 다른 고전적 초식은, 적의 총검이 올 때 대도로 총검을 막고, 기세를 몰아 총신을 따라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상대방을 찍어 누를 수 있다.
- 결론
3-1 수많은 항일군민이 항전무기로 “대도(大刀)”를 선택한 것은 당시 객관적 조건의 제약 아래 옳은 선택이었다.
당시 중국은 생산성력이 낙후되고 무기장비에 들어갈 경비 또한 부족한 상황이라, 대부분의 군대장비가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고, 그 조건 하에 비용이 저렴하고, 생산하기 쉬우며, 또 실용적인 대체품을 사서 부대의 전투력을 보강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군대의 장교 다수가 무술 실력자였고, 그들은 경험을 축적하고 총괄한 뒤 “대도(大刀)”를 군대의 무기장비로 선정하였다. 중국의 항전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이러한 방법론은 민간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민간항일대오의 중요한 무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3-2. 항일대도, 육탄전에서 적극 물리치고 승리하는 열쇠가 되다
대일 육탄전에 있어, 수많은 무림인사들은 풍부한 작전 경험을 쌓았고, 이에 따라 일본병사의 총검기술을 조금씩 분석 연구하여 파해했다. 결국에는 그 특징이 뚜렷한 항일대도를 완성하였는데, 때문에 모든 항일대도는 목표성이 뚜렷하다. 항일대도는 만들어진 뒤로부터 여러 차례의 육탄전에서 스스로의 실용성을 증명하였다.
3-3. 항일대도의 출현은 필연적이니, 곧 중화무림 인사의 집단지성 결정체다。
항일대도의 출연은 필연적이니, “군대무술(军旅武术)”은 이를 위한 좋은 기초였다. 대도의 특징은 항일군민으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대도를 선택하도록 하였다. 대도는 단순한 도법(刀法)이 아니라, 수많은 도법의 통칭으로 중화무림인사 집단지성의 결정체이자, 서로 다른 초식이 그들의 개량을 통해 적을 제압하는 묘수가 된 것이다.
- 결어
항일전쟁시기 “대도”는 일종의 항일이미지로 이미 정신영역으로까지 승화되었다. 대도는 중화민족의 영원히 굴복하지 않는 기개와 꺾이지 않는 지조를 대표한다. 대도정신은 인민의 투지를 고무하며, 사람의 마음을 모으고, 수많은 항일군민의 신념을 일깨웠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도는 무기장비로는 점점 퇴출되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있다. 우리는 때문에 항일대도를 연구하여, 이런 정신을 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한다. 아울러 대도를 무기로 쓴 것은 항전 당시 어쩔 수 없었던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1] 이웬(亦雯), <대도, 침략자의 머리를 찍어내리다 --- 항일열사 자오덩위 장군의 딸 자오쉐펀 인터뷰(大刀向鬼子头上砍去———访抗日烈士赵登禹将军之女赵学芬)>, 《북경당안(北》京档案)> [J].2005(10):6-8.
[2] 천바오창([2]), <서북군 “파봉팔도”고찰(西北军“破锋八刀”考)> [J], 군사체육진수학원학보(军事体育进修学院学报), 2006,25(2):35-38.
[3]푸야광(傅亚光), <중화고대무기집록(中华古代兵器辑录)>, [J] 체육문사(体育文史),1995(4):33-36.
[4]주탕(朱棠), <일본인 인생 예의에 있어 “사망” 금기어 탐구(日本人人生礼仪中“死亡”的忌讳语探究)>[J], 기술정보(科技信息) (과학교육(科学教育)),2007,(36):187- 224.
[5]레이위(雷雨), 문단의 결말(文胆的结局) [J].중외 다이제스트(中外文摘),2011(15):56-58.
[6] 후전궈(胡振国), 장리(张力), <연미단도(燕尾单刀)> [J].정무(精武),2005(5):46-47
번역자: 오래간만에 다시 쓰네요! 잠시 아팠다가 밀린 일 하고 나니 한 달이 훌쩍 가는군요... ㅠㅠ 문득 민국무림 뽕이 와서 한 번 번역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