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연구> 제1장 요약 (下) : 학문 영역으로서의 무술 연구

in wuxia •  4 years ago 

무술연구 제1장 요약 (下)
: 학문 영역으로서의 무술 연구

#무협 #무술

어떤 이론이어야 하는가?

저자(폴 바우만)는 무술연구에 있어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가 이론적으로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탈구조주의는 자크 데리다가 말했듯, “텍스트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이 현실을 인지하고, 지식을 가지며, 이해하는 것 또한 일종의 “읽기”이자 “해석”이다. 이 해석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텍스트에 의거하여 일어나기도 한다.

일례로 같은 성경 같은 종교적 텍스트는 집단이나 시대에 따라 그 해석이 자주 바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의미는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영원히 정해진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거나 합당해 보이는 해석이란 사실 매우 전통적인 것이며, 언젠가는 바뀔 것이다.

또 한 가지 탈구조주의적으로 지적할 것은, 사실 텍스트는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이다. 텍스트는 독자와 조우함으로써 의미를 생산해내는데, 독자는 텍스트에 많은 것을 덧붙여서 그 의미를 해석해낸다.

여기서 탈구조주의자들이 쓰여 있는 텍스트를 기준으로 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간주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의미가 주체적으로 생성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독자는 주체적으로 해석을 해내야만 한다.

특히 그는 텍스트 읽기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이야기했다. 첫째, 작가는 텍스트 해석의 여러 가능성을 모두 알고 있는 천재가 아니다. 둘째, 이 해석 가능성들을 배우기 위해서는 학자 같은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물론 바르트가 가장 중요하게 지적한 것은, 텍스트가 여러 가능한 의미들과 요소들로 가득 찬 문화적인 순환 직물로, 각 텍스트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천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이 지점을 텍스트성(textuality)이라 불렀다.

이런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에서 재조합되어 생산된다. 이런 관점은 무술과 같은 문화적 생산물의 창안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바르트와 데리다가 텍스트성을 논한 것은, 제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논하기 위해서이다. 바르트는 그 의 에세이에서, 문학가들이 가르치는 적합한 읽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러 방면에 있어 현상유지를 하려는 것임을 지적했다.

이는 “클래식한 가라테에서 자유로워져라.”라는 이소룡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또한 의미의 생성에 관계된 중요한 이론이다. 데리다는 해체주의를 통해 철학자들이 논의를 함에 있어 사유하는 방식 중 어떤 부분이 논리적이지 않거나 필연적이지 않은지 포착하고, 이를 해체하고자 노력하였다.

1950~60년대 해체주의적 접근이 일부 독자에게 받아들여져, 담론의 정치적인 함의들이 밝혀지기는 했다. 허나 수많은 학자들은 해체주의 그 자체를 난해하고 장황한 프랑스 이론이라며 거부하곤 했다.

실제로 탈구조주의는 언어적이면서 장황하다. 때문에 탈구조주의가 무술과 어떻게 연결될지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탈구조주의란 단일하지 않다. 푸코와 데리다는 둘 다 탈구조주의의 대표로 이야기되지만, 다른 점이 많다. 일례로 데리다는 기본적으로 언어와 제도에 집중하였고, 푸코는 신체와 제도에 집중하였다. 단지 “제도가 주체를 만든다”고 인식한다는 점에서 탈구조주의적인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사회적 제도라고 부르는 것은 한 개인을 주체로 만든다.” 푸코가 든 정신과의 예시를 보자면, 정신과 의사들은 단순히 환자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누가 환자인지 아닌지 그 선을 긋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도는 사람을 환자나 범죄자라는 주체로 규정한다. <임상의학의 탄생>(1973)

또한 푸코는 지식의 설립이 어떻게 제도적이며, 그 제도적인 지식이 어떻게 제도적인 권력이 되는지, 그리고 그 제도적인 지식/권력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과 신체를 움직이는지 논했다. <감시와 처벌>(1977)

푸코는 이렇게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담론의 역사를 캐낸다. 이 방식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이지만, 담론 그 자체를 메타적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매우 역사적인 건 아니다.

푸코의 연구 자체는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푸코의 “담론”개념과 “권력/지식” 개념은 탈식민주의를 탄생시킨 기념비적인 저서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로 이어진다.

사이드는 서양이 동양을 인식하는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을 탐구한다. “동양인들은 어떠하다.” 그리고 제도에 의해 생산된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스스로를 “지식”으로 자부하며,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제도의 권력과 그 권력의 관습 및 효과를 보는 건 탈구조주의와 탈식민주의에서 널리 받아졌다. 이를 통해 문학, 사회학, 역사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푸코적 관점이 수용되어 지금까지 그 영향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무술연구에 있어 탈구조주의와 함께 중요한 것 또 하나로는, 현상학적이면서 민족지적 접근법이 있다. 이런 접근법은 종종 텍스트적 경향의 탈구조주의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곤 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Loic Wacquant는 시카고 게토의 복싱을 연구함에 있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끌어와 민족지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Wacquant. L, Body and Soul : Notebooks of an Apprentice Boxer, 2004)

(번역자: 아비투스(habitus)는 사회 계급이나 그 하위 분파의 ‘관행’을 재생산하는, 일련의 지속적인 조건들을 지칭한다.)

Wacquant의 책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흥미롭다.
첫째, 근래 비판 받는 아비투스 개념을 굳건히 방어함.
둘째, 포스크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던적인 접근을 하는 사회학 및 인류학에 대한 비평을 진행함.
셋째, 민족지와 탈구조주의 사이를 오고가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몇 가지 코멘트를 넣음.

일단 무술에 대한 부르디외적 접근을 시도하는 연구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무술의 다양한 측면–의례, 신념 체계, 이데올로기-을 다루고자 하는 학자들은 부르디외적인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허나 데리다와 랑시에르는 부르디외적 사회학을 이미 역사적으로 비평했다. 특히 데리다는 “Who‘s Afraid of Philosophy?”에서 부르디외가 객관성(objectivity)에 따라 대상의 진실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부르디외의 이론적 위치가 반철학적이라고 공격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부르디외에 대한 데리다의 공격이 Wacquant의 권투 연구에서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Wacquant는 시카고 게토에서 노동자 및 준 노동자 계층 남성들이, 흑인 권투와 어떻게 결합하는지 그 ‘진실’을 파악하고자 했다. 헌데 데리다는 그 ‘진실’ 파악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데리다는 부르디외에 대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① “대상 그 자체에 접근”하는 것.
② 대상 그 자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학술작업의 “위선적인 구조”.
데리다에 있어 주제란 언어에게 침입 당하기 때문에 대상과는 구별된다. 고로 데리다에게 있어 대상의 진실은 포착할 수 없다.

데리다의 문제 제기는 부르디외의 접근법이 사회학과 그 관련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잡아가는 것과 관련 있다. 또한 Wacquant의 부르디외적 접근법에 대해서는 다소 검토해야 할 면이 있다. 허나 이 부분들을 검토하기 전 잠시 랑시에르의 문제제기를 살펴보자.

랑시에르의 문제제기는 데리다와 살짝 다르다.

부르디외적 사회학은 계급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어 교육이 제 역할을 하는 데 실패했을 분만 아니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헌데 랑시에르는 이 주장에 대해 “불평등의 가정”이 있다고 지적한다.

“불평등의 가정”이란 “인민은 리더나 교육자가 필요하다”거나 아이는 선생이 필요하다는 가정으로,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안 노동자가 학자들에 의해 노동자로만 –다시 말해 작가, 학자, 예술가, 연구자가 아니라- 이해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일종의 계급 숭배자로, 예술과 문학에 탐닉하는 노동자들을 자꾸만 일탈이라며 제 위치에 놓으려고 한다.

랑시에르는 모든 계급과 그룹에는 제 자리가 있다는 환상을 지적하며, 부르디외가 사회학자와 같은 상위 계급이 노동자나 인민 같은 하위 계급을 ‘대상’으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도 완전한 파악이라는 잘못된 환상을 반복한다. 고로 부르디외의 연구는 그 자체로 자신이 지우기 원했던 계급관계를 재생산한다.

여기서 탈-부르디외적 사회학 연구들은 랑시에르의 지적을 받아들여, 특정 계급의 사람들이 제 자리-혹은 ‘아비투스’-를 벗어나는 모습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Wacquant의 게토 복서 같은 하위 계층이 제 자리를 벗어나 위로 올라가는 걸 열망한다고 (혹은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Wacquant는 “Fighting Scholars” 시리즈의 서문과 결론을 담당하며, 랑시에르의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대답을 해낸다. 결론부분에서 Wacquant는 스스로가 링에서 복서들과 부대낀 것은 순전한 기쁨뿐만이 아니라, 링이 사회적 권한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일원됨을 수여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여기서 아비투스 개념을 쓰는 것은, 아비투스를 이미 결정된 무언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비투스 스스로는 결코 의미를 실천하지 못한다. 사회적 공간과 결합되어야만 행동이나 표현을 생산해낼 수 있다.” 요컨대 Wacquant는 아비투스가 훈련된 행위자랑 결합해야만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이는 데리다가 아비투스를 ‘수행적인 것(performatives)’으로 인식한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Wacquant에게 있어 아비투스는 행위자(agent)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을 조사하는 데 유용하다. 이 아비투스 개념은 실증적 연구에 있어 행위자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여기까진 좋다.

Wacquant는 부르디외 사회학이 불평등을 증가시킨다는 랑시에르의 지적에 대해서는 더 논하지 않는다. 이는 랑시에르의 비판이 Wacquant 자신의 작업과 크게 연관되지 않는다고 느껴서 일수도 있다. 다만 Wacquant는 부르디외의 사회학에 다소 맹목적이고, 자신이 복싱클럽에서 얻어낸 연구 결과를 어디에나 적용하려는 문제가 있다.

그와 별개로, Wacquant는 아비투스 개념을 통해,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영미 인류학의 객관주의적 풍토, 그리고 대상에 대한 급진적인 개입은 허용하는 프랑스 인류학의 주관주의적 풍토 사이에서 나름의 방향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는 그냥 다가가는 것(go native) 보다는 “무장한 채 다가가기(go native armed)”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요컨대 이론적이고 방법론적인 틀을 동반한 채 대상의 경험을 객관화시키면서 또 대상을 구성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관여하게 하는 것이다.

허나 이 지점에서 문제가 있다. Wacquant는 자신의 무술 연구물이 자기참조적인 탈구조주의적 인류학이 아니고자 한다. Wacquant는 탈구조주의가 대강의 연구 기반을 세우는 데에는 도움을 주지만, 막상 연구 대상의 객관성을 지나치게 부정하여 연구를 상대주의에 빠트린다고 본다.

또한 그에 따르면 연구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은 탈구조주의적 인류학자들이 그러는 것과 달리, 연구가 끝난 후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해나가는 것이다. 대상을 선택하고, 이론을 세우고, 관찰하는 동안 계속.

이에 대해 저자 폴 바우만은, 사실 Wacquant의 비판이 (그 자신의 의도가 어떠했던 간에),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탈구조주의자가 그 자체에 대한 게 아니라, 탈구조주의 사조를 받아들이면서 생긴 인류학과 사회학의 난점을 겨누고 있다고 지적한다.

Wacquant가 제시하는 “새로운 방향”은 분명히 아비투스 개념 아래서 신체와 행위자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의 독자들은 크게 비판할 게 없겠지만,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독자들은 다르다. 데리다의 독자들은 Wacquant의 지적 위치를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왜냐하면 Wacquant가 포스트모던 이론을 비난함에 있어 인류학과 사회학이라는 특정 분과학문의 위치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Wacquant는 언어를 일종의 도구로 본 채, 문학이론을 시종일관 자기참조적이라 이해하고, 객관적인 사회학자라도 객관적으로 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데리다적으로 보았을 때 언어는 깊이 숙고되어야 할 보충물(supplement)이다. 아비투스 개념은 사실을 진술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진술은 불가능하다.

물론 몇몇은 Wacquant가 대상에 오래 침투한 점 –시카고의 권투 클럽에 오래 다닌 것-을 들어 그 진술의 신빙성을 주장할지도 모른다. 허나 Wacquant 스스로도 권투 클럽에 다닌 것은 그저 지역 공동체에 침투하기 위한 방법 –입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인터뷰에서, Wacquant는 자신의 연구가 게토에 관한 정형화된 미디어, 정치, 학술의 어떤 담론에 도전하기 위해 쓰여 졌다고 이야기했다. Wacquant는 기존 문헌이 게토에 대해 “멀리서 바라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통계학 등에 의거한 이 문헌들은 게토에 1차적으로나 2차적으로 접근한 지식도 없어, 게토의 모습들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지 못했다.

랑시에르적인 관점에서 보면, Wacquant의 ‘빈민(the poor)’에 대한 개념화는 이중적이다. Wacquant는 게토의 ‘빈민’에 대한 미디어 등의 기존 견해를 무너트리고자 하면서도, 또한 그 스스로 ‘빈민’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세운다.

(이렇게 무언가를 규정하는 견해는 ‘여성’, ‘원주민’, ‘국민’ 등 다양한 영역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세워진 ‘빈민’에 대한 견해는 ‘그들의 아비투스’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하며, 그 지점에서 부르디외의 교조적인 면이 반영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헌데 폴 바우만이 보기에 Wacquant의 저작은 ‘빈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체육관과 그 안의 여러 주체(복서, 트레이너 등)에 대한 것으로, 체육관이라는 ‘장치(machine)’가 어떻게 복서를 생산해내는지 보고 있다.

Wacquant의 방법론은 설문지나 통계에 의존하는 일부 부르디외적 방법론과도 다르고, 랑시에르가 비판하듯 대상을 교조적으로 지도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Wacquant는 정형화된 게토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인류학적이고 사회학적 시선으로 보여준다. 사회학자는 대상을 알고자 하는 게 아니라, 매 작업마다 자신이 대상에 대해 무지함을 보아내야한다.

그 점에서 아비투스는 본질적이거나 고정된 게 아니라 형성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되어 있는 과정 중의 것으로 아비투스를 본다면, 그 물질적이고 비교적인 부분을 포착할 수 있다.

Wacquant 또한 담론의 고정된 ‘정체성’이란 개념을 피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민족지적 방법론이란 기존의 게토 담론 같이 정치적으로나 지적으로 억지스러운 견해들을 부수는 방안이자, 이론적으로 스스로를 고안해나가는 방안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는 단순히 타자(혹은 ‘빈민’) 들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가는 대상의 신체적인 지식과 그 미시적인 통치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적인 것은 ‘언어로’ ‘체화된 지식과 기술에’ 개입하고, 생각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어떻게 배짱(guts)에서 지식으로, 그리고 살에 대한 이해에서 텍스트에 대한 지식으로 이어나갈 것인가?” 폴 바우만은 다음 챕터에서 이에 대해 답해나가고자 한다.

번역자: 50p 요약하는데 1주일이나 걸렸습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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