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연구> 제1장 요약 (中) : 학문 영역으로서의 무술 연구

in wuxia •  4 years ago  (edited)

무술연구 제 1장 요약 중
: 학문 영역으로서의 무술 연구

#무협 #무술

번역불가? 연구의 주제와 대상

연구 주제(subject)는 “연구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 (혹은 학술적 장(academic field))을 의미하며, 연구 대상(object)은 간단하게 “연구되는 것”이다. 고로, “학술적 주제는 대상을 연구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중요한 점은, “연구 주제가 다르면 같은 연구 대상도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이다. 일례로 사회학, 생물학, 철학은 같은 “사랑”을 연구하더라도 다르게 본다. 결국, 연구 주제에 따라 연구 대상은 항상 다른 무언가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스탠리 헨닝(Stanley Henning)은 탁월한 에세이 “학계, 중국무술과 조우하다 (Academica Encounters the Chinese Martial Arts)” (1999)에서, 무술을 연구하는 데 있어 주제와 대상의 관계가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해당 에세이에서 헨닝은 중국무술이 학계에 있어 중요함을 알리고, 중국무술의 역사 또한 중국 문화나 중국철학만큼 깊음을 보이려 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무술을 알지 못하는 건 중국을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어 큰 장애물이었다.

때문에 헨닝은 무술 관련 역사 기록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번역의 문제에 집중했다. 먼저, 무술연구에 관한 근대 학자의 주장을 지적한다. 그 다음 중국어 원문과 번역을 대조하여 오역이나 잘못 이해된 부분을 찾아내고, 그 대안을 제시한다. 그 결과 상당히 다른 해석을 이끌어낸다. 이 “교정”의 문제가 헨닝의 주요한 목적이었다.

허나 저자(폴 바우만)는 다른 두 가지 이유로 헨닝의 에세이에 주목한다.

①, 헨닝의 에세이는 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위치 때문에 대상을 잘못 번역하거나 해석하는지 보여준다. 헨닝은 원로 중국학자 조셉 니덤이 중국 무술 텍스트를 전반적으로 잘못 해석하여, 중국무술 전반을 도교의 육체운동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한 것을 대표적인 예시로 들었다.

여기에 대해 저자(폴 바우만)는 서구 학자들의 편견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이 연구 전반에 지속적으로 미세하게 작용하여 나온 결과라 주장한다.

물론 헨닝 또한 인식했듯, 오리엔탈리즘은 양방향적이다. 달마가 소림사를 세웠다느니 같은 믿기 어려운 기원설화들은, 중국 정부의 준 공식적인 정책 중 하나로 대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소프트 파워의 대우를 받고 있다. 이렇게 중국인들 스스로도 자기 오리엔탈리즘화를 실행하며, 이는 민족적 정체성과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여기서 헨닝은 소위 정치적 올바름이나 문화적 감각을 학술적으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발했다. 그에 따르면 몇몇 학자들은 무술의 황당무계한 기원설화를 옹호하며, 중국인의 세심함을 지지한다는 명목 하에 오히려 옥시덴탈하면서 유사-과학적인 입장에서 오리엔탈리즘적인 기준으로 중국무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폴 바우만)가 보기에 이런 지적은 중요하지만, 몇 가지 질문을 수반한다. ②, 헨닝이 해석의 스펙트럼 사이에서 번역의 옭고 그름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정보도 중립적이지는 않다. 대상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를 해석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끝없이 다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지식은 다양하게 생산되어 계속 경합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헨닝의 ‘교정’ 또한 해석들에 대한 해석들로 보아야 한다. 게다가 헨닝은 스스로의 작업이 순수하거나 중립적이라고 여겼지만, 아카데믹한 해석이란 본디 더 넓은 문화적 담론과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이다.

담론의 진실

헨닝에 따르면 학술은 어떤 문화적 담론에 종속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텍스트에 대한 상세한 지식과 역사적인 배경 지식에 의거해야한다. 이때 탁월한 언어 및 번역 기술은 중요한 수단이자 무기가 된다.

허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소위 정당한(legitimate) 해석은 그저 언어적이거나 역사적인 지식에만 의거하지 않는다. 해석이란 어떤 맥락의 지식을 덧붙이는 일이기에 원문과 동일한 해석이란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진실과 가짜라는 이항대립 뿐만 아니라, “단일한 진실”은 유일하다는 생각 또한 치워야 한다. 유일한 현실에 대한 유일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의미는 관련된 ‘새로운 사실’보다는 각자의 평가 맥락에 더 많이 의거 한다.

여기서 누군가 ‘번역불가능성(untranslatability)’을 논할 수도 있다. 발터 벤야민이 주장한 이 개념은, 한 역사적 텍스트란 시공간적으로 현재의 관점 및 사고방식을 통해 번역되기에, 번역을 할 때 누락되거나 번역하기 곤란한 지점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셸 푸코가 <담론의 질서>에서, 하이데거가 <언어로의 도상에서>에서 각각 더 논하였다. 비록 하이데거는 서구의 영향이 진정한 동양적 삶을 훼손한다고 보았지만 말이다.

해석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이런 입장이 미심쩍다면 성경과 도덕경들이 세대마다 새로이 해석된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같은 원문이라도 매 세대마다 다른 번역을 요구한다.

무술연구로 돌아오자면, 무술연구는 학술적 글쓰기로 무술 관련자나 팬들이 원하는 그런 것은 아니며, 심지어 전통적인 학자들이 원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무술연구는 무술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연구들이 그렇듯 특정한 주제를 통해 무술을 바라볼 것이다.
“Martial Arts Studies”의 편집진 Farrer 과 Whalen-Bridge는 무술연구가 다음의 몇 종류의 주제를 통해 나아갈 것이라 주장했다.

“권력, 신체, 자아, 그리고 정체성”
“젠더, 섹슈얼리티, 보건, 식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
“전투, 의식, 그리고 공연” “폭력과 감정들” “컬트, 전쟁 마술, 그리고 전사 종교”

그리고 여기에 몇 가지를 덧붙일 수 있겠다.
“인종적 정치적 문화적 역동성”
“문화 전환의 영화적인 전파” “문화 번역의 힘과 장소” 등등

이 연구들 중 어느 것도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입증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시선으로 무술연구의 대상을 살펴보고 있다. 이 시선들은 수없이 다양하며, 각각의 방식은 학제적 결과를 만들 것이다. 이제 무술연구의 경계에 대해 논해보겠다.

분과학문의 경계들과 결정들

근래 나온 “무술과 격투 스포츠를 통한 체화 문제 탐구 : 실증 연구 리뷰”(Channon and Jennings 2014)은 무술격투 분야(MACS) 연구들을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원제: Exploring Embodiment through Martial Arts and Combat Sports : A Review of Empirical Research, 이하 리뷰)

“리뷰”는 영어권 무술 연구를 전부 리뷰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술에 관련된 모든 연구를 다룰 수도 없었기에, 연구들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배제적 제스처(exclusionary gestures)를 취했다.

① 무엇을 어째서 배제할 것인가 결정하기. 이에 따라 일정 연구 영역은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② 계층화, “리뷰”는 그들이 보기에 가장 중요한 텍스트에 집중했다.

(그 결과 “리뷰”는 영어권 연구 중에서 무술 미디어 연구와 무술 정신심리학 연구를 제외하였다.)

“리뷰”는 포괄과 배제에 따라 학과 간에 경계선을 긋는다. (첨언으로 여기서 체화(embodiment)에 관한 실증적이고 사회학적인 접근이란 인간존재가 사회적인 경험을 살고 느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영화 연구의 체화 개념과는 다소 다르다.)

이러한 경계선 긋기가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분류학적 노동은 다소 강하게 말하자면 “분과학문적 근시안(disciplinay myopia)”을 일으킨다. 분과학문의 시선에 사로잡힌다는 의미이다.

벤 주드킨스(Ben Judkins) 또한 이 “리뷰”가 향후 연구에 사용하기 부적합하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주드킨스에 따르면 “리뷰”의 분류는 향후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리뷰”의 저자들이 분류의 기준을 밝혀놓긴 했으나, 그들은 실증적인 연구만을 중심하여 ‘해석적’이거나 ‘비판적’인 모든 연구를 “리뷰”에서 배제했다.

다른 무술 연구가들 또한 분류를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이는 “리뷰”의 저자들과 다르게 그 분류 자체를 뛰어넘는데 목적이 있었다. 분명 “리뷰”의 분류는 인류학과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체육학 커리큘럼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쓸모가 있겠지만, “리뷰”의 분류 자체는 충분히 포괄적이지 않다.

주드킨스의 평가에 다소 첨언하자면, “리뷰”의 구분은 분과학문의 프로토콜을 반영한다. “리뷰”는 영역(field)를 구성함에 있어 적절한 것만 배치하거나 계열화했으며, 그 외에 적절하지 않은 것은 ‘영역’에서 배제하였다.

이 “리뷰”의 분류가 사회과학에 있어서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분류란 건 본디 그 자체로 단일하며 자족적일 수 없다. 게다가 “리뷰”의 분류는 자신들이 배제하고자 하는 것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리뷰”가 지향한 실증적인 연구는 이미 이론적인 기준들과 방법론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게다가 실증적인 연구는 언제나 ‘해석적’이거나 ‘비판적’인 부분과 짙게 연관되어 있다.

(“리뷰”의 저자들 스스로가 이미 동양의 무술 스스로의 배경에서 떨어져 나와, 어떻게 서양으로 이동하였으며, 또 어떻게 서양에서 변화하였는지가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상을 통해 저자는 분과학문의 “리뷰”에서 사용된 분과학문의 공고한 기준을 거부한다. 분과학문에 의거한 “리뷰”의 기준법을 해체하고, 그 시선에서 빠진 중요한 부분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첨언으로 주드킨스는 두 개의 중대한 책이 “리뷰”에서 빠졌다고 지적한다.

Farrer and Whalen-Bridge “체화된 지식으로서의 무술(Martial Arts As Embodied Knowledge)” (2011) (이하 “무술”)

Adam Frank “태극권, 그리고 작고 늙은 중국 노인을 찾기: 무술을 통한 정체성 이해(Taijiquan and the Search for the Little Old Chinese Man : Understanding Identity through Martial Arts)”(2006) (이하 “태극권”)

분과학문적 변화들

사실 “리뷰”의 누락은 그 자체로 분과학문의 질서의 실수를 의미한다. 최소한 필자(폴 바우만)나 주드킨스에게 있어, “리뷰”는 분과학문의 질서를 극복하려 노력은 했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Frank의 “태극권”(2006)은 민족지를 방법론으로 하는 인류학에 속해있으나, 그럼에도 문화이론을 도입하여 자기 학문의 질서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다시 말해, 민족지를 쓰는 일에 이론적 배경들 도입하여 스스로가 어떠한 지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고, 이를 통해서 이론에 다소 둔감했던 인류학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탈구조주의적 발전방향을 통해, Frank는 인류학이라는 분과학문이 다양한 이론적 관점을 적절한 경우에 적용할 수 있도록 재구성(reconstitution)하고자 한다.

Frank는 자아와 세계가 상호작용하게 하여 “정체성의 이동(identity moves)”을 의도한다. 이렇게 분과학문과 연구대상이 부딪치며 호응하는 연구방법론은, Frank의 연구대상인 태극 개념과 유사하다.

여기서 Frank의 “태극권”은 무술을 “정체성을 구성적으로 경험하고 건설하는 매개체”로 보며, “무술을 익힌 사람, 그들의 경기, 그리고 관련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그 정체성이 “트랜스내셔널하게 이동하는지” 파악한다.

저자(폴 바우만)이 보기에 Frank의 작업은 무술연구의 발전에 있어 중요하다. 허나 저자는 Frank와 달리 분과학문을 재구성하기보다는, 이전 분과학문에 기초하여 “새로운 구조”를 건립하고자 한다.

이론적인 필요성

무술연구에 이론은 필수적이다. 이론 그 자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술연구에 살을 붙여 독립된 분야로 성립시키기 위함이다. 그 점에서 무술연구는 역사를 중요시하지만 역사학은 아니다.

첨언으로, 여기서 말하는 “학술적 연구(academic study)”는 기본적으로 다원적이다. 다양한 분과학문들은 서로 다른 가치 시스템 아래 놓여있다. 이 분과학문들이 서로 존중하며 토론하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하곤 한다.

저자는 무술연구라는 새로운 학술적 연구를 진행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분과학문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미 각 분과학문은 서로에게 다소간의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 “이건 좀 아쉽게 다뤘는데.” 게다가 학문적 연구는 비학문적 독자에게 실망감을 안겨 줄 수도 있다.

여기서 어떤 단과학문의 기준이 무술연구를 지배할 수 없다. 역사학은 물론 중요하지만, 티모시 바티(Timothy Bahti)가 지적하듯 역사 그 자체 또한 철학 이론으로 살펴볼 여지가 존재한다. 역사를 서술하는 일에 주관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술연구는 다양한 단과학문들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이어야 한다.

다만 무술연구가 단과학문이 아님에도 하나의 영역으로 성립될 수 있는 데에는, 전적으로 이론(Theory)의 역할이 크다. 이론이 일종의 국제어로서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연결시키며 그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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