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불초한 서생> 제 2장 요약 (上)
-샹카이란의 원숭이: 문학장르로서의 소설-
전문적으로 쓰는 것, 그리고 원앙호접파(鴛鴦胡蝶派)
샹카이란은 스스로 작가의 위치를 어떻게 여겼으며,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가 소설(小說)에 대해 가진 인식은 어떻게 그의 작품생활을 규정했는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바오톈샤오가 샹카이란의 집을 방문했던 1921년-혹은 1922년 초-에서부터 시작해보자.
1974년 바오의 회고록을 참고하면, 그가 샹카이란의 집을 방문한 건 일요일에 올릴 원고를 청탁하기 위함이었다. 헌데 그때 바오는 샹카이란의 하숙방에 원숭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고, 곧장 일요일에 “샹카이란의 집에 있던 원숭이”라는 짧은 글을 내었다.
샹카이란은 집에서 원숭이를 키웠다. 수컷이었다. 한 날은 원숭이 조련사가 그 집에 왔다. 그는 샹카이란의 원숭이와 비슷한 크기의, 그러나 암컷인 원숭이를 데려왔다. 두 원숭이가 서로를 봤을 때, 그들은 서로 몸을 쓰다듬으며 놀라운 애착을 보여줬다. 샹카이란은 암컷 원숭이는 자신의 원숭이에 맞는 짝으로 사려 했으나, 상황을 본 원숭이 조련사는 굉장히 높은 금액을 불렀다. 허나 그 암컷 원숭이는 이미 쇠약한 상태였다. 그런 원숭이는 4~5원이면 비슷한 걸 살 수 있었다. 샹카이란은 10원을 내겠다 했으나, 조련사는 여전히 거절했다. 원숭이 조련사가 떠날 채비를 하자, 두 원숭이는 서로의 손을 꽉 잡고 떨어지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둘을 억지로 때어놓아야 했다. 샹카이란의 원숭이는 밤 내내 흐느꼈다. (영역 인용을 중역함)
원숭이가 있는 샹카이란의 초상사진은 1926년의 것이다. 저자는 자리에 앉아 원고를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원숭이가 있다. 원숭이는 목에 사슬을 건 채 과일을 먹고 있다. 샹카이란의 하숙방보다는, 사진 스튜디오에서 찍힌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은 글쓰기와 원숭이에 대해 어떤 시각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만약 그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1926년은 샹카이란의 창작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한 10년이 끝나갈 무렵이다. 물론 그는 인생 전체에 걸쳐 글을 썼으며, 그 때문에 문인(文人)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없다. 그는 어린 시절 좁은 의미의 문학 교육을 받고, 그와 결부된 사회적 문해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 문학 능력을 기초로 자신의 생계를 잇고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다만 이 생계와 지위는 소설 쓰기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비서직, 관료직, 교육직을 수행함으로써 나왔다.
이 지점들에 특별한 것은 없다. 그와 함께 상업적인 글을 쓰던 동년배들 또한 임시적이든 지속적이든 교사, 사업가, 편집자 등의 직업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샹카이란이 유명한 것은 소설 쓰기 때문이긴 하다.
그는 1916년 유동외사 이후 1926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돌연 글쓰기를 중단했다. 1930년대 잠시 다시 펜을 잡긴 했으나, 크게 생산력 있지는 않았다. 허나 그의 글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그에게 장기적인 사회적 인정을 안겼다.
우리는 샹카이란의 인기가 얼마나 지속적이었는지, 그리고 그게 샹카이란이 스스로 생각한 문인이라는 정체성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다소 시사적인 부분을 하나 짚을 수 있다. 1947년 공산당의 장교는 그를 무협소설작가로 인식했고, 팜플렛과 프로파간다를 쓸 수 있는 문학 직장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샹카이란은 이를 거절했다.)
사실 이전 시기 무협소설가와 인민해방군 부대의 만남은, 샹카이란의 또다른 모습을 상기시킨다. 샹카이란은 소설 쓰기 말고도 수많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들에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만청의 혁명운동부터, 신해혁명, 반-위안스카이 운동, 북벌, 중일전쟁, 국공내전, 신중국 설립 등등. 샹카이란은 이 수많은 사건들에 주동적으로 개입한 편이었다.
여기서 샹카이란은 소설 쓰기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입이라고 여기는 사상 조류에 동참하지 않았다. 1902년, 샹카이란이 일본으로 떠나기 네 해 전, 량치차오는 일본에서 잡지 신소설(新小說)을 펴냈다. “만약 한 사람이 나라의 사람들을 뒤바꾸고자 한다면, 그는 먼저 소설부터 바꾸어야한다.”
1922년 루쉰은 중국 인민들의 몸을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의 혼을 바꾸고자 문학의 길로 나아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마오쩌둥은 옌안 문예강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예술은 혁명의 부품으로 잘 어울린다. 그것들은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단합시키며, 적을 공격하고 부수는 강력한 무기로 기능할 수 있다.”
허나 1931년의 샹카이란은 근대협의영웅전을 재연재 함에 있어 이렇게 서술했다.
민국 15년(1926년), 나, 불초생은 근대협의영웅전을 65화 정도 썼었으나, 내 일 때문에 상하이를 떠났고,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이는 5년 전으로, 나는 당시 책을 중도에 끝내기로 결정했었다. 내가 보기엔, 소설 쓰기란 전적으로 먹고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군인이 아니라, 부대를 훈련시킬 수도 없고 전투에서 싸울 수도 없다. 따라서 나는 군인 세계에서 가장 하잘 것 없는 지위도 얻지 못했다. 또한 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입을 자유자재로 놀릴 줄도 모르니, 정치의 세계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또한 내가 가진 특정 과학지식이나 기술이 적어, 교육이나 상업으로 밥을 벌어먹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순전히 기술이 없어, 진실로 살아갈 방도가 없었기에, 이 미미한 붓에 의지하여, 다소 아무래도 상관없을 소설을 써내려가 먹고 살 밥을 얻어낸 것이다.
허나 5년 전에는, 섭리가 기대치 않게 그 손을 뻗어오니, 그 사이에 떠도는 직장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한 번 굶주리는 일 없이 소설 쓰기를 그만두니, 나는 퍽 기쁘게 이 별 볼일 없는 붓을 치워두었다.
나는 언제고 이러한 엉뚱한 소설을 사서 읽는 사람은 단지 시간을 떼우기 위함이니, 이 책을 완결하나 하지 않으나 큰 차이가 없으리라 여기곤 했다. 헌데 상상치도 못하게 상당수의 독자가 편지를 써,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소설을 완성시키도록 북돋아주었다.
근래 몇 년간 나는 하남성과 즈리를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를 보고 들으니, 이 앞전 8권짜리 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게다가, 우연히도, 나는 떠돌아다니는 직업을 잃어 내 옛 일을 다시 시작해야했다. 내가 보기에, 새로운 작품을 시작해 실망에 빠진 책 독자들을 긁고 내버려두기보다, 이전 작품을 먼저 끝내는 것이 좋아보인다. 때문에, 다시 한 번, 내 부족한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쓴다. (영역 인용을 중역함)
이 서문은 두 가지 관련 질문을 만든다. ① 작가의 창작 동기 ② 소설(小說)의 성격, 지위, 그리고 가치.
냉담한 자기비하적 분위기 아래, ‘저자-서술자’는 자신을 상업작가로 부르며, 재정적 편의만이 동기임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군인, 정치인, 과학자, 교육자 등의 –국가에 가치 있는- 인재와는 대비됨을 지적하며, 전문 소설작가를 낮은 지위에 놓았다. 그에게 있어 소설이란 무가치한 일이라, 무료할 때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아무래도 좋을’ 물건이었다.
이상의 지점에서 아까 제시한 사진과의 연관성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저자는 원숭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유희적이며, 휴머노이드이지만, 전적으로 사람은 아닌, 손에는 과일이 있으나, 목에는 사슬이 걸린- 그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별해내기는 어렵지만, 샹카이란의 자화상을 세 가지 면에서 읽어내는 것은 유의미할 것이다. 작가의 경력, 대중소설에 대한 근대 비평, 그리고 소설의 기능과 성질에 대한 전근대적 이해.
텍스트의 서술자가 역사적인 저자 그 자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 서술들을 샹카이란의 커리어에 맞춰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샹카이란은 직업이 없을 때는 상당량의 소설을 써내었다. 그가 비서나 관료직에 있을 때 글 쓸 시간이 적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가 소설 쓰지 못하는 것을 후회했다거나 글을 다시 쓰는 걸 반겼다는 증거는 없다. 추가적인 사료는 샹카이란이 소설을 기꺼이 돈으로 교환했다는 인상을 강화시켜준다.
위슈원(1907~1996)은 중일전쟁 시기 안휘성에서 샹카이란과, 그가 첫 작 유동외사를 쓸 때에 대해 나눈 대화를 회고했다. 당시 그는 강호기협전을 쓰고 있었는데, “나는 상하이에 어느 정도 머물면서, 타락한 이들을 이끌고, 사창가, 댄스홀, 술집, 그리고 아편굴에 하루 종일 빠져있었다. 긴 형식의 소설을 써내는 것만이 내가 원고료를 받아, 낭비벽에 드는 돈을 충당하고 빛의 산더미를 갚을 길이었다.”
강호기협전은 독자의 입맛을 개발해냈다. “ 때문에 나는 안정적인 보수에 대한 소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것은, 누군가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사회에 이득을 주고 교육하는 글쓰기와는 비교조차 할만한 게 아니다.” (영역 인용을 중역함)
근대협의영웅전을 재개하는 글에서, 작가의 평판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이나 그의 작품에 대한 즐거움을 읽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저자-서술자는 글이 자기-표현의 산물이라거나, 어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진보를 위한 장치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는 그 당시의 신문학자들과는 많이 다른 태도였다.
샹카이란의 글쓰기 특징은 마치 죄를 고백하는 것처럼 들린다. 당시 신문학자들은 끊임 없이 “원앙호접파(鴛鴦胡蝶派)”라 불린 이들을 공격했다. 1910년대 후반 나타나기 시작한 신문학자들은, 1921년 마오둔(茅盾)이 소설월보(小說月報)를 주관한 이래 자신들을 구시대적인 것과 구분하여 인식했다. 그리고 1930년대 초 국가적 위기가 극심해지자, 좌익들은 당시 대중문화를 장악하고 있던 원앙호접파를 극렬하게 공격했다.
당시 신문학자들은 원앙호접파는 예술적으로 후진적이며, 형식적으로도 구식이고, 예술적 자각이 없으며, 시대에 뒤쳐진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반동분자적인 생각을 심어준다는 등으로 규정지었다. 이러한 규정 아래 원앙호접파는 근대이전시기 소설과 뒤섞여 구문학(舊文學)으로 분류되었다. 허나 원앙호접파는 현대 시장을 위해 생산되는 문학-특히 소설-이었다.
“구문학”과 “원앙호접파”에 대한 신문학의 공격은 문학의 성질과 목적에 대한 것이자, 신문학이 문학장에서 자리를 잡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또한 신문학의 문학관은 문학이 도(道)를 전하는 것이라는 전근대적인 인식과 공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소설(小說)은 “작은 이야기”, “보잘 것 없는 말들”이었다.
소설은 고대에만해도 비주류 철학담론이나, 정사에 포함되기 어려운 역사기록 –야사(野史)라던가-을 의미했으나, 점점 명청시대에 이르러 다양한 언어•형식을 가진 대중적인 서사들을 이르게 되었다. 전근대 문인들에게 소설은 하찮으면서 불쾌한 것이었다. 소설은 도(道)에서 멀 뿐만 아니라, 허구로 사실성을 훼손하고, 폭력, 괴이, 성욕 등 허락되지 않은 것들에 탐닉했다.
소설의 옹호자라고 해서 이를 전면적으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단지 소설의 사실성 및 어떤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주장한다거나, 그 교훈성을 강조하려고 들 뿐이었다. 옹호자들은 소설의 무가치함을 인정하면서도, 소설의 오락적이고 유희적인 역할은 유지했다. 또한 구조 및 서사 면에서 소설의 미학을 끌어올렸다. 명나라 후기부터, 주석과 서문을 통해 소설의 미학을 끌어올리는 글들이 유통되었고, 개인적인 표현이나 도덕적 요구, 사회정치적 비평-실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유로 소설 텍스트들이 만들어졌다.
이상의 문제를 고려해보았을 때, 근대협의영웅전 66화에서 샹카이란이 쓴 글은 서구식 소설 이해가 들어오기 전, 전근대 소설(小說)의 자기 인식을 보여준다. 저자의 역사적 커리어나, 신문학자들의 원앙호접파 공격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저자-나래이터는 상업적인 동기를 가지고 독자를 즐겁게 하는데만 집중했다고 밝혔으며, 또한 신문학 측에서 원앙호접파를 무가치하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 딱히 평가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샹카이란의 자기인식을 진입점으로 삼아, 소설(小說) 그 자체가 어떤 성격과 논리를 가졌는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소설의 문학적 전통 요소와 교섭한다는 측면에서 샹카이란의 글을 읽는 것은, 글 그 자체, 글의 관계망, 그리고 문학적 실천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킬 것이다.
신문학의 헤게모니가 도전을 받은 것은 1980년대 포스트-마오쩌둥 시대이다. 당시 학자들은 5.4 신문학이 –원앙호접파나 구문학 같은- 문학적 타자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해나갔다는 것을 밝혔다. 이와 동시에 신문학이 문학적 타자로 세웠던 원앙호접파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혹자는 원앙호접파에 씌워진 어떤 비난을 반박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각도에서 원앙호접파의 위치를 새로이 잡아나가거나, 중국의 근대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으로 파악했다.
또 다른 이들은 5.4 신문학이나 원앙호접파라는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 민국시기 글을 읽어나가려고 했다.
본고는 이러한 노력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본고는 5.4신문학을 구체적인 범위로 보려고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이 신문학-구문학을 구분했음에는 주의를 기울이려한다. 본고의 목적은 문화담론 등에서 대안적 근대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민국시기 소설의 미학과 시학을 탐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