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연구 제2장 요약 (下)
: 신체, 역사, (초)민족, 그리고 서사
인간을 가리다(eclipsing)
내가 어렸을 때, 일식에 대한 TV 프로그램에서 한 물건을 보았다. 그 물건은 제트기 위에서 일식을 ‘쫓으러’ 갔는데, 최대한 오래 일식을 촬영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촬영을 해두면 그냥 관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아낼 수 있다. 태양을 촬영하는 것은 태양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가시화한다.
무술에 대한 부분도 비슷하다. 중심에 있어 빛을 내뿜는 태양의 이미지는, 사실 제대로 보아낼 수 없는 부분이다. 이를 두고 철학자들은 패러다임이나 ‘보는 방법’의 은유로 사용했다. “눈은 보지만 스스로 보아낼 수 없다. 칼을 베지만 스스로를 벨 수는 없다.” 무술에 있어 가려지는 것은 무술을 해내는 전문가-혹은 마스터- 그 자체이다. 본고는 그 부분을 보아내려 한다.
이렇게 가려져 있던 ‘1차적인’ 대상을 보아내는 것은,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가정된 위계를 뒤바꾸고, 대상의 존재와 힘을 보아내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우리는 대상을 보는가, 그 대상이 다른 물체에 주는 효과를 보는가? 대상에 있어 우리의 접근은 어떤 성질을 가지는가? 이는 담론작용에 대한 수사학적 질문들이다.
만약 우리가 무술가를 가려버린다면, 한 담론이 한 대상에 대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데리다적으로 말하자면, 특정 대상에 대한 담론은 주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이는 무술 그 자체가 이름뿐인 초점으로, 다른 주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엇에 대한 담론은 언제나 이중적이고 분열되어있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많은 무술관련 연구들이 무술가를 대상으로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무술연구는 개인들이나 집단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무술은 무술가를 통해 드러나지만, 우리는 무술가를 가림을 통해 무술의 확산과 발전을 다룰 수 있다.
무술의 확산과 발전에 대한 연구들은 자주 특정 중요 인물의 이민, 이동, 행동 문제에 집중한다. 무술은 신체와 결부된 것이기에 이 일 자체는 놀라운 게 아니다. 체현된 신체 대 신체 접촉은 무술 수련의 전제이다. 허나 많은 연구들이 그 중요 인물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식하지 못한다. 사실 중요 인물(key people)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야말로, 그 주변사람들을 중요한 열쇠로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1960~70년대 영화와 미디어의 재현에 힘입어 오리엔탈의 무술이 서구에 도착하였다는 점을 논할 수 있다. 1960년대 이전 아시아 무술을 수련하는 비아시아인은 드물었다. 이러한 무술 붐은 1960년대 이민해온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이 서구에 들어오면서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무술 자체는 이 이민과 다소 분리되어 들어온 면이 있다.
일례로 1980~90년대 한국무술 태권도는 영국에서 가장 널리 퍼진 무술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전파는 한국인 이민자에 의한 게 아니라, 무술 조직이 퍼져나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는 이소룡 이전까지 어떤 중국인도 백인이나 흑인인 서구권 출신자에게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실제는 좀 더 복잡하다. 사실 웡 잭 맨(Wong Jack Man) 같은 이에게 비중국인 학생들이 교습을 받고 있었다. 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소룡과 싸웠는데, 이때의 싸움을 토대로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을 재점검했다.
가장 인기 있는 전설에 따르면, 이소룡은 비중국인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중국인 커뮤니티에서 도전 받았다. 하지만 웡에 의하면, 결투는 단지 이소룡이 여러 무술 유파들을 이길 수 있다고 도전의 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소룡은 웡을 이겨냈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비중국인 학생 때문에 싸운 게 아니라, 이소룡의 도전 때문에 싸운 것이라는 점이다. 이소룡에 대한 할리우드 성인전은 그를 인종주의에 포위된 누군가로 그렸었다. -백인 미국인 사회와 중국인 사회에 의해서 말이다.-
이소룡의 중요한 점은, 비중국인에게 무술을 가르쳤다는 게 아니라, 할리우드 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또한 백인이나 흑인이 무술을 배우지 못한 것은, 중국인 사회의 인종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시아 무술이 스크린에게 나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무술을 배울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몇몇 미국인들이 일본이나 한국을 다녀와서 그곳의 무술을 익히고 있긴 했었지만, 광범위한 욕망은 영화와 미디어에 의해 구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에서 무술을 요구 받았다. 이 수요에 따라 중국인 무술가들이 서구로 이민 온 것이다. 아담 프랭크의 민족지 “태극권”(2006)은, 서구의 수요에 따라 이민 온 중국인 무술가 관련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다.
위와 같이, 무술의 이동과 무술가의 이동은 상당히 구별되는 문제이다. 두 문제가 겹쳐지기는 하지만 그 시간성과 논리는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프리드리히 니체나 주디스 버틀러 등이 언급한 ‘춤과 댄서’, ‘ 연기와 연기자’의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 따르면 ‘연기’ 밖에 연기자가 미리 존재한다는 생각은 존재론적 오류이다. 연기자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상을 생각해 볼 때, 무술과 무술가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무술가는 체화된 총체임이 분명하지만, 무술의 전파는 가지런하게 뻗어나가는 현상이 아니다. 모든 소통은 –무술의 이동을 포함하여- 불연속과 파열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모든 상속인은 단순한 반복자가 아니라, 어느 정도 변형하여 ‘다시 말하는’ 이이다. 이런 반복은 미디어 시대에 증폭된다. 이소룡의 ‘운동 이미지’는 욕망을 불러와, 모방하는 큰 조류를 생산해냈다.
이소룡의 영화는 수많은 모방작을 불러냈다. 그의 동작-이미지는 수많은 교육학적 관계를 보강하고 뒤엎었다. 이소룡 이후 던지기와 차기로 구성된 고전적인 가라테는 다소 아둔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실, 이소룡의 운동-이미지는 프랜차이즈 시스템과 엮여있으며, 화려하게 높이 차는 한국 태권도의 흥성에 공헌했다. 높이 차는 것에 대한 욕망은, 영화의 스펙타클함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자, 태권도 협회로부터 지속적으로 채워진 것이기도 하다.
이소룡으로 대표되는 무술영화의 스펙타클은 다중적이면서 상반되는 효과들을 낳았다. 몇몇에게는 정식적인 무술도장을 운용하게 했고, 몇몇에게는 그들의 손으로 무술을 만들게 했다. -이는 이소룡의 반체제적인 절권도에 부응한다.- 기술과 동작은 영화에서 따와졌고, 무기는 집에서 만들어졌으며, 사람들은 어디서도 나온 바 없는 검은띠를 차기 시작했으며, 훈련 영상이 인터넷에 돌고…… 이제 당신이 어떤 식으로 무술을 소비하든, DVD나 유튜브에 의한 것이다.
무술은 신체에서 신체로 바이러스처럼 이주한다. 어떤 무술은 그리스의 판크라티온처럼 세계 2차 대전 후 재건축 되어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또다른 병원체와 결합하여 판데믹처럼 번지기도 한다. 영화를 통해 일어난 첫 판데믹은 1970년대로, 이때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Everybody was Kung Fu fighting”
또 다른 판데믹은 배트맨 비긴즈(2005)에서 볼 수 있듯, 이미 임박해 보인다. 해당영화는 전투 안무를 짬에 있어 새로운 무술들을 이용했다. KFM(Keysi Fighting Method) 스타일을 고안한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자신들의 ‘새로운’ 무술을 퍼트리려 하고 있다. 그들은 훈련 영상이나 등급 제도를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의 무술 혁신자들은 스스로를 신체적으로 가장 ‘리얼’하다고 표현한다. 훈련은 상대가 있어야 하며, 실전적인 길거리 싸움에서 나왔거나 이를 위해 디자인 되었다고 선전한다.
2000년대의 이런 현상은, TV의 UFC가 1990년대 초 –훨씬 큰 규모로- 성취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UFC는 ‘룰이 없다’ ‘최종적이다’ ‘진실하다’ 등을 내세우며, ‘리얼리티’의 이름으로 유파들을 해체시켰다. 하지만 UFC 또한 결국에는 TV 미디어의 스펙타클을 위해 발전된 것이다. (광고를 위해) 경기장의 길이를 고쳤고, (관객을 지루하게 하지 않기 위해) 스펙타클한 기술들에 집중하고, (프로그램 스케쥴을 위해) 싸움 시간을 정했다.
곧 UFC의 해체는, 오히려 그 자체로 자신만의 유파를 생산해냈다. MMA(mixed martial arts)가 그것이다. 초기에는 그라시에(Gracie)가 만든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주도권을 잡았는데, 사실 UFC 자체가 그라시에 가문의 발명품이었다. UFC가 유행하자, 브라질리언 주짓수는 세계적으로 주요한 무술 중 하나가 되었다.
리얼함, 리얼리티, 길거리, 실전적 등의 근래 변형은 사실 미디어 시대의 포스트모던적 문화 산물이다. 때문에 무술에 있어 문화는 –운동을 다시 쓰는 것들은- 대개 2차적으로 취급되지만, 사실은 1차적인 것이다. 문화는 무술을 이루며, 퍼지게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하든, 혼종적이든, 클래식하든, 전통적이든 간에. 때문에 무술가야말로 미디어-이미지에 있어 2차적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와 효과를 생각해보기 위해 무술의 이동을 가렸었는데, 여기서 다시 무술의 이동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될까? 롤랑 바르트가 지적했듯, 그것은 ‘중심’에 놓인 어떤 기원이나 기초가 아니라, 단지 ‘분별해내기 어려운 무늬(a figure in the carpet)’이다. 이는 데리다적인 감각으로 보자면, ‘중심(centre)’ 자체가 일종의 현존-효과이기 때문이다. 푸코적으로 말하자면, 중심 형상은 권력/지식의 관계가 빚어낸 효과이다.
다시 말해, 중심형상은 시뮬레이션으로, 데이비드 카라딘(David Carradine)의, 1970년대 TV쇼 쿵푸에 나오는, 방황하며, 오리엔탈리즘적인, ‘노란 얼굴’의 콰이 창 카인(Kwai Chang Caine) 캐릭터를 보고 일종의 언캐니함을 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술이 단지 피, 땀 그리고 신체 접촉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정신으로 신체로 전이되는 과정을 통해 이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완전히 허구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진실된 실체이다.”
이러한 이론 경로를 따라, 본고는 이 챕터의 주제들 중 많은 부분이 독특한 ‘cross-culture’나 ‘트랜스내셔널’ 영화 –키아누스 리브스의 감독 데뷔작, 맨 오브 타이치(Man of Tai Chi)(2013)-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민족과 무술의 관계를 중심으로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원시적 열정과 정체성 위기
레이 초우는 1995년 쓴 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에서, 현대중국영화를 둘러싼 시각성, 섹슈얼리티, 민족지의 문제를 통해 “원시적 열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원시적 열정은 현대중국영화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다음과 같은 작동양상을 가지고 있다.
- 원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문화적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다. 문화적 위기의 순간이란, 여기서 하고 있는 논의의 용어를 사용하면, 의미를 생성하는 테크놀로지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가운데 문어(文語) 같은 전통적 문화기호가 그 우위성을 빼앗기는 때를 말한다.
- 우세한 전통문화의 기호가 의미작용을 독점하지 못하게 되면서, 요컨대 민주화가 강요되면서 기원에 대한 환상이 생겨난다. 이 환상은 어떤 속성을 가진 관련 영역을 통해서 펼쳐진다. 전형적으로는 동물, 야만인, 시골, 토착민, 인민 등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것들은 잃어버린 ‘기원’과 관련된 어떤 것을 대신한다.
- 기원은 이제 ‘민주적으로’ (재)구성되고 공유장소와 상식, 즉 공유지식이면서 참조점이 되지만,이것은 우리의 현존재에 앞서서 존재했던 것이 된다. 회복 불가능한 공유/장소(common/place)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원시적인 것은, 이처럼 언제나 사후(事後)의 발명이다. 말하자면 포스트(post, 以後)의 시기에 프리(pre, 以前)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 이렇게 정의된 원시적인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 가능케 한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이란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룰 만큼 보편적이고 누구에게나 투명하게 보이는 동시에 시간과 언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 원시적인 것은 이처럼 상상의 공간에만 자리할 수 있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환영(幻影) 같고 문자 그대로 이국적이다. 어떤 특정한 속성을 지님과 동시에 상식적으로 공통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이국취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관행과 같은 여러 문화에 걸쳐서 쓰는 경우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어떤 하나의 문화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서술의 특징이기도하다.
- 20세기 중국 같은 ‘제1세계’ 제국주의와 ‘제3세계’ 내셔널리즘 사이에 끼여있는 문화에서는, 원시적인 것은 정확한 역설, 즉 ‘문화’와 ‘자연’이라는 두 의미작용 양식의 합금이다. 서양에 비하면 중국문화는 ‘후진적’이라는 경멸적인 의미에서 ‘원시적’ (‘문화’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고 ‘자연’에 가까운) 일지도 모르지만, 태곳적의 문화라는 긍정적 의미에서 ‘원시적’(서양제국보다 훨씬 오래된)이다. 근원적이고 전원적인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강력한 감각은 이렇게 해서 한편으로는 중국의 시원성(始原性)에 대한 확신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국가 중국은 영광스러운 문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으뜸가는 근대국가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신념을 낳는다. 중국을 희생자인 동시에 제국으로 간주하는 원시주의의 역설이, 근대의 중국지식인을 이른바 중국 강박관념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 자체는 –이것이 원시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제한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새로울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 ‘감성의 구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 영화라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제안하는 바이다. (번역서 45~46p에서 인용)
원시적 열정이 출판된 1995년 이래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90년대 초를 대상으로하는 초우의 분석은 더 이상 ‘현대적’이진 않다. ‘영화’의 개념도, ‘중국’이라는 개념도 현재에 이르러 많은 부분 유동적으로 변화했다.
때문에, ‘원시적 열정’에 대한 초우의 핵심적인 분석에 대해 오늘날 ‘현대’ ‘중국’ ‘영화’ -의 의미가 모두 뒤바뀐 현재에도-에도 의미가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원시적 열정은 지금도 동일한가? 작동 양상에는 차이가 없는가 등등.
초우는 “원시주의(primitivism)”이 “산업화된 근대의 상상의 원천”이며, “지리적 설정에 관계 없이 문화적 생산에 있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원시주의는 “문화적 위기에 순간에 1차적으로 일어나며”, 이 위기란 산업화된 근대성이 생산해낸 문화적 위기와 연결 지을 수 있다. (근대성의 결과이자 부수효과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일종의 징후로 ‘원시적 열정’은 ‘근대성의 위기’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만약 근대성의 위기가 동양과 서양에 있다면, 이는 현대무술영화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내게 있어, 홍콩 영화를 포함해 수많은 중화권 무술영화가 ‘근대성’과 그 외 여러 ‘위기’들 –그것이 식민적, 제국적, 혹은 폭력배적 자본자이던 간에- 징후적으로 대답한다는 건 놀라웠다. 이소룡의 1972년작 정무문(Fist of Fury)은 20세기 초 상하이에서 정무체육회와 그를 탄압하는 일본인의 이야기로 꾸려져 있다. 해당 영화에서, 정무체육회는 명백히 중국을 나타낸다. -국외 세력에 의해 포위되고, 분열되며, 추방되고, 억압되며, 그리고 저항하는 형세로-
그리고 이런 위기의 시간과 상황에 대한 주제는, 왕기위의 일대종사(The Grandmaster)(2013)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내려오고 있다. 물론 일대종사는 엽문의 일대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줬다고 찬사 받지만, 이는 사실 주인공 남성 캐릭터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남방과 북방 중국 무술의 결합 욕망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이 영화에서 그 결합에 의한 기관은 스스로 붕괴한다.)
다시 말해, 홍콩, 타이완, 중국의 무술영화는 어떤 ‘위기’에 대한 대응이다. 이 위기의 원인이 일본, 러시아, 서구제국주의, 식민주의, 자본주의, 혹은 산업 근대화의 진행이던 말이다. 허나 여기서 레이 초우는 지적한다. 무술영화에서 드러나는 판타지들은, “동물, 야만, 국경, 토착, 혹은 인민과 관계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문화의 이전 단계’를 옹호하는 것을 통해 구축된다.
여기서 저자 폴 바우만은 ‘“문화”의 이전 단계’가 “자연”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레이 초우의 주장에 망설인다. 왜냐하면 무술영화에서 가치 있는 것은, 제도, 분과, 전통 등의 측면에서 볼 때, “조직되어 달성된 문화”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우만은, “문화의 이전 단계”가 ‘자연’에 가깝다기보다는, ‘중국적 자연’ 판타지에 가깝다고 본다. “중국적 자연은 문화다.”
저자는 초우의 지적을 변형하여 다른 방식으로 탐색하고자 한다. “중국무술영화에 있어, 위기는 보통 싸우는 순간, 그리고 그 유산, 전통, 그리고 제도적인 상속물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달려든다.” 데리다적으로 말해, 무술영화는 다음의 문제를 탐색한다. “외부적 힘의 방해, 교란, 전복 및 변태에 직면하여, 스승에게서 제자/후계자로 고정되고 안정적이며 완전한 지식을 부드럽게 소크라테스적/플라톤적 전달하는 것을 보증하는 방법.”
무술영화에서 원시적 열정은 단순히 문화와 대치하는 자연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다. 오히려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불가능하게 이상화된 관계에 대한 것이다. 외부가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며, 내부를 내부로 남겨놓는 작용을 한다. -외부가 외부로 남아있으면서- 중국무술영화는 제도를 유지하는 문제에 대해 논한다. (이는 가끔 문화와 자연을 대비시킨다.) 이는 대개 제도와 제도의 대립이다. 이것이 무술영화의 제도들에 든 경향이라면, 우리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무술영과의 다른 문화권과 제도들은 어떻지?”
동방과 서방의 원시적 열정
흥미롭게도, 원시주의 판타지와 원시적 열정은 ‘서구’ 무술담론- 및 할리우드 영화-에서 더욱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담론의 정점은 UFC다. 해당 장르는 스스로 가장 리얼하며 최종적인(ultimate)인, 무규칙(no rules)적인 것이라고 인식한다. 이렇게 규칙과 제약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들을 생산하는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헌데 모순적이게도 UFC는 초기에 다양한 유파들을 마주하게 하여 우열을 가르려했고, 이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동물성의 치세’이다.
UFC의 첫 산물은 MMA로, 유파, 분과,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지위를 지우면서도 그 지위를 새로이 유지하는 컴뱃 스포츠이다. 동시에, MMA의 수사와 담론은 순수한 워시적 동물성을 판타지화시킨다.
이렇게 전통, 규칙, 관습을 넘어, 또 다른 ‘원시적 자연’을 추구하게 하는 충동은, 파이트 클럽(1999)에서 영화적으로 형상화되었다. MMA와 파이트 클럽의 원시주의적 판타지는 동일하다. “억압되었던 원시주의적 ‘진실’을 다시 발견하는 것.” 파이트 클럽과 MMA는 소비사회에 있어 남성성의 위기에 나름의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다.
요컨대, 많은 중국 및 홍콩 무협영화에 나오는 ‘원시적 열정’은 자연 상태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어떤 외부 조정의 위기를 마주해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무매개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시적 열정은 이상화된 제도적 상태로, 단순한 ‘자연 상태’가 아니다. 그보다 ‘자연 상태’에 대한 원시적 열정은 서구 영화 담론에서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동양에서 서양을, 중국에서 미국을 도식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두 지역은 영화적으로 오래 교류해왔다. 원화평(Yuen Woo Ping)과 그 이외 수많은 이들은 할리우드를 비롯해 홍콩, 타이베이, 베이징 등에 자리 잡았다. 더 나아가 제인 박(Jane Park)은 그녀의 책 Yellow Future(2010)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오리엔탈적 스타일’을 더 많이 포착할 수 있으리라 입증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리엔탈’ 시네마에서 할리우드 스타일을 볼 수 있는가? 물론 그렇긴 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중국 영화(Chinese cinema)’를 문제적으로 논하며, 이런 문제들을 영화, 문화, 원시적 열정, 그리고 위기와 함께 논하고자 한다.
맨 오브 타이치
키아누스 리브스는 맨 오브 타이치(2013)로 감독 데뷔를 했다. 해당 영화는 다언어 영화로, 베이징과 홍콩을, 영어와 중국어를 오간다. 영화는 부산한 베이징에서 덜 모던한 내륙지역으로, 그리고 백만장자의 라이프스타일에서 관료주의적인 따분함으로 나아간다. 하얀 머리의 태극 고수가 있는 황폐한 절도 더해서 말이다. 이 절은 당연히 중국 문화유산이고, 머리 하얀 사부는 중국 문화-혹은 ‘중국성’-의 어느 정점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잔여물이다.
태극 유파의 유일한 학생인 타이거 첸(Tiger Chen)은, 마지막 배움을 받을 준비가 거의 다 되어 있다. 허나 그의 사부가 말하기를, 타이거는 자신의 기(氣)를 정확히 제어하지 못한다고 한다. -요컨대, 기에 휘말린다.- 게다가 타이거는 태극의 원리인 부드러움이나 감각성 등에 집중하지 못하고 폭력과 어두움에 어느 정도 손을 대고 있다.
영화 초반에서, 그는 아침 5시에 기공을 연습하고, 차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문장을 따라한다. “옳은 일을 하라(Do the right thing)” 영화에서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의 사부는 타이거가 힘을 싸우기 위해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허나 타이거는 텔레비전에 나와 상대를 두들겨 판다. 백만장자 도나카 마크(Donaka Mark, 키아누스 리브스 역)는 상대방을 죽이길 거부한 파이터를 살해하는 캐릭터로, 타이거를 TV에서 보고는 기쁘게 주장한다. “결백해(innocent)!” 도나카는 타이거로 하여금 자신의 불법적인 매치에 참여하게 한다.
타이거는 도나카가 제공하는 돈이 명예를 훼손한다고 생각해 거부한다. 하지만 그의 사부가 절이 재개발 때문에 헐릴 것을 염려해 타이거를 퇴출시키자, 타이거는 절을 보수할 돈을 위해 도나카 밑에서 일하기로 한다. 타이거는 비밀경기장과 TV쇼를 오간다. 그는 잔혹함 때문에, “경쟁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TV 쇼의 결승전에 오를 기회를 박탈당한다. 허나 타이거는 이미 잔혹한 동물성에 맛을 들인 뒤였다.
타이거의 동물성은 도나카의 경기장에서 빛을 발한다. 허나 더 근본적으로, 도나카와 그의 심복들은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걸 좋아해!” 다르게 말해, 그의 안에 있던 원시적인 피의 욕망이 타오르기 시작하며, 사부가 말한 “그 자신의 기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간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그는 성숙하지 못했고, 준비되지 않았다. 그는 갈림길에 서있고, 정해야만 한다. 옳은 일을 할지, 틀린 일을 할지.”
결승전 전, 타이거는 자신에 대한 영화를 관객들이 보는 걸 목격했다. 도나카가 몰래 자신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목소리는 ‘결백하고 순수한 태극 수련자를’ 살인자로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전달해주었다. 도나카는 반복한다. “이건 죽음에 이르는 불법 파이트에 대한 게 아니라, 결백한 이가 살인자로 변화해나가는 것에 대한 것이다.”
중국과 미국 영화의 원시적 열정을 고려해보자면, 맨 오브 타이치는 무엇을 이야기해주는가? 주제적으로, 이 영화는 ‘중국’ 무술영화보다는 서구의 몇몇 영화를 재조직한 면이 크다. -에디 머피 영화 대역전(1983)을, 트루먼 쇼(1998) 및 스타워즈: 제다이의 귀환(1983)와 섞었다.-
시각적으로 영화는 매트릭스(1999)처럼 보이는 걸 피하려고 했던 듯하다. 몇몇 장면은 매트릭스에서 원화평이 키아누스 리브스를 위해 안무를 짜준 걸 상기시키지만 말이다. 사실, 영화 발매전에 나온 정보는, “즉,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는 키아누스 리브스가 타이거 첸을 영화 매트릭스 싸움 씬을 위해 훈련시킬 때 태어났다.” 둘은 친구가 되었고, 중국과 미국 양쪽에서 투자를 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이건 중국 영화인가?” 이런 인종적이고 민족적 질문은 영화연구에 대한 지역적 접근에 흐르는 원시적 열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허나 맨 오브 타이치는 할리우드적 전통과 연결될지라도, 다른 이들은 내가 모르는 아시아적 선례들을 보아낼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여러 형식, 장치가 번역되고 조정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내가 이 영화에 집중하는 것은, 서구의 원시적 열정을 전적으로 동양적 상황에 돌렸다는 점 때문이다.
원시적 잔혹성은, 파이트 클럽 (과 서구 MMA)에 있어 “문화로부터의 해방”이나 “트랜스 문화석 진실”로 채색된다. 타이거가 치명적 일격을 가하자, 키아누스 리브스 역의 도나카 마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게 네 안에 있는 줄 알고 있어.”
허나 이는 파이트 클럽이 아니다. 도나카 마크를 죽인 건 타이거의 원시적 증오가 아니라 기쁨이다. 요컨대 그를 죽인 건 문화적으로 가장 높은 상태의 판타지 중 판타지로, 죽은 것은 개인주의의 원시적 열정이다.
다음 장면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관료들이 허연 수염 휘날리는 태극권 사부 앞에서 문화와 발전에 대한 연설을 듣고 있다. 그리고 사부는 전통적인 도장으로 서류에 날인하고, 우리는 절이 어떤 공원으로 발전될 것임을 알게 된다.
이는 중국의 가장 유명한 테마 파크인 소림사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문화는 복제품으로 ‘보존’될 것이며, 우리가 영화 매트릭스에서 본, 밀레니엄적인 복제품보다도 더 완벽할 것이다.
여기서 레이 초우는 말한다. “이러한 기원은 공통 공간과 이상적인 일로 (재)구축되며, 우리 존재보다 앞선 공통 지식과 대상이 된다. 원시적인 것은, 공통/공간의 돌이킬 수 없는 형상으로, 항상 사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시간적으로 ‘이후’에 일어난, ‘이전’이란 허구-”
따라서, 맨 오브 타이치는 지속적으로 ‘중국’을 해체하기도 하고 강화하기도 하며, 현대세계에서 ‘민족적’ 실천에 대한 무술연구의 접근에 시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이 챕터에서의 쓰기, 민족, 서사에 대한 설명에 있어, 우리는 실제, 스타일, 문화, 동물성 등 더 살펴볼만한 문제적인 것과 조우했다.
번역자: 엉망진창으로 요약한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걸 100p 보아냈습니다. 이제 말이 되게 잘 요약&해설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