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기간은 한 달
기간으로 보자면 절강성 국술여유대회는 준비기간이 불과 한 달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대규모 전국국술대회를 여는 건 준비위원회에게 있어 실로 작지 않은 도전이었다.
<절강국술유예대회회간(浙江国术游艺大会汇刊)>(이하 <회간(汇刊)>)에 따르면 준비위원회는 회의부와 집행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집행부 이하에는 총무, 비서, 교제, 장무(场务)의 4개 처가 있었다. 총무처는 재무를, 비서처는 대외 홍보와 오고가는 문서 작성을, 교제처는 전국무림인사의 신청 및 초청 작업을, 그리고 장무처는 대회회장의 설비시공을 맡았다.
모든 준비 업무 중 경기장 건설이 가장 중요했다. <회간>에 따르면, 경기장은 본래 항저우 서대가(西大街)에 건설될 예정이었으나, 재정청에서 “해당 지역은 대중들을 수용하기에 편리치 않다”는 답신을 보냈다. 이에 경기장은 항저우 통강교(江桥) 옛 무서(抚署) 자리로 변경되었다. 구무서는 30묘의 부지였으나 신해혁명 때 혁명군이 담장 하나 빼고 다 불태웠다. 장무처는 당장 안에 비무대를 세워 바로 사용코자 하였다.
<회간>에 적혀있는 경기장 설계도면을 보자면, 비무대는 정사각형으로 높이는 4척이고 길이는 56척이었다. 비무대 뒤에 심판석을 설치하고, 그 심판석 좌측에 군악대 자리가, 우측에는 신문기자석이 있었다. 후면에는 휴게실 7칸이, 좌편에는 보급실 3칸이, 그리고 우편에는 의무실 4칸이 있었다. 각 선수의 요구에 응하고자 의무실에는 중의사와 서양의사를 모두 두었다.
비무대 앞 관중석은 부채꼴 모양으로, 좌우에 특별관람석을 설치하고 정면은 일반관람석으로 삼았다. 관람의 편의를 위해 관람석은 안쪽이 낮고 바깥이 높게 설계되었으며, 관람장 실내의 벤치만 대략 2만여 개에 달했다. 이 밖에도 경기장 정문에는 매표소, 직원휴게실, 그리고 주차실을 설치하였으며, 정문 밖에는 임시상가까지 늘어서 있었다.
이는 설계에서 시공까지 대략 1달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80년 전에도 준비인원의 작업 효율이 높았으며 그 설계이념이 선진적이어서, 뭇 사람들을 감탄케 한다.
경비 조달을 위해 절강성 정부는 1기 국술참관권을 발행했다. 소위 국술참관권은 사실 한 세트라, 정가는 4위안에 10장의 표가 들어있었다. 각각은 4전에 1장이었는데, 소매로 파는 5전짜리에 비해 다소 쌌다. 게다가 참관권은 경품추첨에 참가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라 할만 했다.
5전은 대충 얼마인가? 저우웨량(周伟良) 교수가 기자에게 말하기를, “당시 5전은 최상품 돼지고기 1근을 살 수 있는 돈으로, 현재 인민폐로 하면 대략 30~50원 정도에 해당한다.” 당시에도 이런 표는 싼 편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나중 들어 참관권 발행에 문제가 생겼다. 1929년 <상해화보(上海画报)>에 <절강성 국술유예대회 참관권 발행의 내막>이란 기사가 실렸다. 이 문장에 따르면 국술참관은 원래 11월 13일에 복권을 추첨하기로 했는데, 청부업자 쉬신푸(徐信孚)가 대회에 낸 10만원 보증금이 지연됨에 따라 복권추첨은 23일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쉬신푸는 본디 서호박람회에서 독일 폐결핵 약을 팔던 상인이었다. 그는 관람권이 이익을 낼 거라 보고 참관권의 90%에 대해 판매를 청부하고자, 선불로 10만원의 보증금을 내겠다고 했다.
허나 사실 쉬신푸 본인은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그래서 항저우의 다오셩(道胜)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 했다. 헌데 일이 목전에 닥칠 즘 은행대출 일이 잘 되지 않았다. 때문에 발행날짜가 임박했지만 보증금이 오지 않게 된 것이다. 다행히 이때 항저우 현지에서 한 상인이 도와 800장의 참관권을 사기로 하여, 그제야 참관권이 순조롭게 시장에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항간에는 참관권 추첨 비리라는 검은 그림자가 계속 떠돌아다녔다. 기자가 중앙국술관주가 발행하는 잡지 <국술주간(国术周刊)>에서 본 바에로, 어떤 이는 복권 1등상 2만원 사금이 결국에는 리징린에게 들어갔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재미있는 것은 <국술주간>의 대답이다. “리징린 주임이 얻었다고 하여 무슨 흑막이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 참관권 사건의 풍파로 원만했던 준비공작에 그늘이 드리워졌었다.
“영웅첩”이 뿌려지다
한편에서는 장무처가 경기장을 짓느라 분주하기 그지없었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준비위원회가 “영웅첩(英雄帖)”을 뿌려 각지의 무술인재를 모으는 작업을 요란하게 진행하였다.
준비위원회는 각성과 각 특별시 정부에 보낸 전문을 보면, 이번 국술대회는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찾는 일이었다 할 수 있다. “남녀불문은 물론, 승려인지나 속가인지도 따지지 않는다.” 기량만 뛰어나다면 모두 와서 솜씨를 펼쳐 보일 수 있었다.
무협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머릿속에 대략 대문파 화산의 논검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국술여유대회에는 얼마나 많은 문파의 무림고수가 찾아왔을까? 저우웨이량 교수가 기자에게 알려준 바에 따르면, 실제 상황은 무협소설 중의 묘사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중국무술에서 문파의 개념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무협소설에 쓰인 그런 치밀한 조직이나 분명한 경계는 없다. “중국무술은 대략 130여 개의 권법 종류가 있고, 각 종류 아래에는 문파들이 있다. 이 둘은 관계가 있으나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태극권은 일개 권법 종류(拳种)이다. 그 밑에는 권법 만 있는 게 아니라 태극검, 태극창, 그리고 태극의 각종 무술이 공부(功夫)가 있어, 하나의 무예(艺业)를 이룬다. 게다가 타극권은 점차 5개의 파로 형성되었다. 양식(杨式), 진식(陈式), 손식(孙式), 오식(吴式) 등이다. 이게 바로 문파다.”
이는 요컨대, 같은 권법 종류를 수련하는 사림이 반드시 같은 문파라고는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런 국면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서호봉이 기자에게 말하기를, 명청 600년간 무술을 금지한 때문에, 무술을 익히는 이는 상대적으로 폐쇄된 환경에서 몰래 기예를 전하고 무술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폐쇄된 환경에서 같은 권종(拳种)도 다른 전인의 깨달음, 연역(演绎), 승화 등을 통해 다른 특색을 가지도록 진화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표면상의 단절상태 또한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서로 다른 권법 종류 또한 접목되는 상황이 나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태극매화문(太极梅花门)은 태극권과 매화권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때문에 중국무술에 문파가 얼마나 많은지, 한 권사가 어떤 문파인지 말하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다.
서호봉은 국술유예대회 조직형식의 뛰어난 점으로 문파의 경계를 허물고 각성 정부나 각지 무술관 단위로 인재를 선발한 것을 꼽았다. “국술관은 국가교육기구이며 어떤 문파에 속하지 않는다. 겨룬 이가 문파의 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고, 때문에 누군가가 졌어도 한 문파의 패배라고 느끼지 않게 했다.”
문파의 영예 문제와는 연관되지 않아, 무림인사들은 홀가분하게 싸움터로 나갈 수 있었지만, 각 성시의 명예가 걸려있었고 각 조직은 여전히 상당히 중시되었다. 각 성시는 국술유예대회의 회신에서 볼 수 있었듯, 어떤 보증기관은 각지의 국술관이었고, 어떤 것은 성이나 현 정부가 공모를 담당한 것이었다. 베이핑(현 베이징) 특별시는 뜻밖에도 시장이 직접 관여했다.
요컨대 자기 성의 영예를 위해 각 성과 시 조직은 상당히 고심하였다 할 수 있다. 어떤 남방의 성시는 무풍이 흥성하지가 않았던지라 특별히 사람을 보내 감숙성에서 용병을 구하기도 했다. 이 광경을 보고 중앙국술관의 부관장으로서 리징린은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관장 장지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대회 참가자들은 대략 50여 명으로, 모두 국술에 노련한 명가(名家)들입니다. 연습하고 고심하기를 그치지 않기를 40년으로 이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요. 이번에 저는 검술을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순전히 개인 자격으로 초대되었고, 대다수는 항저우에 오기를 허락했습니다. 각 성에서 참석자를 고르는데 달인이 있는가 없는가는 알게 못되고, 강소성과 절강성 국술관 교원 전원이 시합에 참가한다는데 …… 관에서 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지라, 신속하게 고수를 초빙한다는 제 얕은 소견으로 각 성의 조롱을 면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장즈쟝은 상당히 담담했다. 회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내 경기는 승패가 어떻게 나던 관계없이, 모두 동포이니 영욕을 얻고 맘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이번 경기의 주된 의의는 상무정신을 고취하는 것이며 쌓여온 약함을 제거하는 데 있으니 …… 본관은 이름 없는 고수도 마다치 않습니다만, 회의 참석을 위해 따로 초청할 필요는 없는 듯합니다.”
사실이 증명해주듯, 리징린의 우려는 괜한 것이었다. 절강성 국술여유대회에서 중앙국술관의 교사들이 우쭐대긴 했지만, 오히려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던 인물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했다.
대회개막
절강성 국술여유대회는 1929년 11월 15일 14시에 개막될 예정이었다. 하느님 무심하시게도 큰 비가 내리자, 준비위원회는 일정은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기자가 11월 16일 <항저우민국일보(杭州民国日报)>를 보았을 때, 준비위원회는 1면에 개제한 “긴급통보”에서 대회가 16일 9시에 개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통보 끝에 조직위원회는 “비가 온다면 순연함(天顺延)” 네 글자를 적어두어, 일기예보 없는 어쩔 수 없음을 드러내었다.
다행히 11월 16일은 맑았다. 오랫동안 잠잠했던 항저우 구무서는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이기 그지없었다. 민국정부의 중요인물 장챵(张强), 절강성 주석 장징쟝(张静江), 민정청 청장 주쟈화(朱家骅), 항저우 시장 저우샹셴(周象贤) 등 정계의 중요인물이 각각 경기장에 도착했다. 9시 정각이 되자 경기장에 방울소리 울리며 군악합주가 벌어지니 절강성 국술여유대회가 정식으로 개막했다.
개막당일 3만여 관중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1929년 11월 23일자 <절강상보(浙江商报)>에는 이런 생동감 있는 묘사가 있다.
입구에는 컬러액자와 꽃종이가 선연했다. 현판에는 리징린 장군의 대련(长联)이 걸려있었다.
종오산 절수의 장관(综吴山浙水之大观)
뛰어난 인물들 모두 모이니(间气所钟)
용과 호랑이, 폭풍우라도 안색이 질리겠네 (龙虎风雷齐变色)
북에서 모이고 남에서 물리치니 그 강함이 같을터 (萃北胜南强于一室)
사방에서 모여오도다 (四方来回)
단련한 공력은 기재마저 찢어 죽이리 (鸟熊功力屠奇才)
시상대 위에는 우승자에게 줄 은병풍 펼쳐져 있었다. 시상대 쪽에는 중서 임시 의원이 설치되어 부상인원을 편리하게 치료할 수 있었다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온 곳에서 온 관중이 어찌 그저 만 명 뿐이겠는가. 소수의 1위안짜리 좌석과 특수자격자 외에도, 모두 시상대 앞에서 모여선 것이 마치 구멍의 구더기마냥 우글우글하니, 정말 볼만한 것이었다.
당시 기자는 두 명의 모직코트를 입은 묘령의 여성 둘이 인파에 밀려 창백해지다 못해 울먹이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다행히 경찰이 제 때에 그 두 여성을 인파 밖으로 밀어주었다.
대회 초반 나흘 동안은 시범을 보였고, 5일째가 되어서야 비무를 시작했다. 비록 시범 당시는 비무 때처럼 열기가 폭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수만 명의 항저우 관중이 몰려들었다.
국술여유대회는 민국무림의 유명인사들을 거의 망라했다. 오씨 태극권의 창시자 우졘췐(吴鉴泉)은 태극권을 시연했고, 의권(意拳)의 창시자 왕샹자이(王芗斋)은 창해용음(沧海龙吟)을 시연했다. 리징린은 아내와 딸을 데리고 태극검을 추었고, 쑨원의 경호원이었던 남북대협(南北大侠) 두신우(杜心五)는 귀두수(鬼头手)를 시연했다. “발끝으로 서 장내를 나는 듯이 세바퀴 도니……”
그해 대회가 끝나고, 리징린은 무술대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한 장관을 보여줬다. 민국무림 정점들을 드러낸 화폭이라 할 수 있다.
번역자: 한문만 나오면 번역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한 번 따로 배우던지 해야지... 대련(长联) 부분은 정말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