筍子, 성악설을 주장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배운 내용의 모든 것이다. 그 후로 내가 순자하면 생각나는 것은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 할마시와 발음이 같을 뿐이다. 내가 학교다니던 시대에 순자같은 왜색 이름은 거의 없었다.
30대를 넘어서며 동양고전을 조금씩 읽었다. 20대 후반에 읽었던 논어를 다시 보고, 사기 제왕본기, 세가, 열전을 읽고 다시 논어, 맹자, 중용, 도덕경, 한비자, 손자병법, 장자, 열국지, 묵자, 귀곡자를 읽어보기는 했다. 내가 한자 실력이 없는 것이 아쉽고 다행이다. 아쉬운 것은 더 깊이 있게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고, 다행인 점은 그래서 하나에 경도되지 않고 실용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본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보긴 본 셈이다.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제자백가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나온다. 儒子에 대한 논의는 손자병법을 빼면 끊임없이 대립의 구조로 나온다. 특히 진왕 정이 시황제가되어 전국을 통일하고 이 과정에서 이사와 한비장의 이야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筍子 선생밑에서 공부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순자는 보편적으로 그리 유명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지인중에 내가 사서를 읽는 중인 걸 보시더니, 우리 딸래미가 '순자' 전공인데 하신 기억이 난다.
순자에 대한 이야기 전에 이 책을 보면서 든 생각은 이렇다. 공자, 맹자, 노자, 한비자, 손자, 묵자, 귀곡자등 다들 시대의 사상가이며, 지식인이며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과 꿈이 반영된 사건은 있지만, 그 꿈과 이상이 실현된 세상이 존재했는가?라고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왕은 지식인이 만들어 내는 지식의 창출력은 부족하지만, 지식을 현실에 구현하는 능력은 지식인이 훨씬 부족하다. 그래서 상생과 협력이 필요하다. 때, 장소, 지위라는 상황에 어떤 것이 적합한가와 내가 지향하는 방향의 일관성은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방법적인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이들의 지식이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생각, 행동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들의 단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대기업 총수가 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天人之分(천인지분)이란 표현이 미세하게 다르다. 우주만물의 원형이 인간속에 내재되었다고 보는 맹자적 시각과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써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라는 관념적 접근은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性을 태어날 때의 그러한 상태로 보고, 僞를 통해서 인위와 작위로 사람들이 보다 질서정연하고 체계화된 구조를 지향한다는 것을 善으로 보기에 인간의 性을 惡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는 善하지 않다는 것이 非善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惡이라고 보는 것은 좀 과하다고 생각한다. 아무짓도 안했는데, 남을 돕지 않았다는 것이 유죄라면 좀 억울한 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우주만물의 요체가 인간안에 내재하기 대문에 性善을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을 볼 때 순자의 사상은 체계적인 통치의 철학으로 봐야한다. 사실 도덕경도 무위자연이 법칙처럼 도가 세상에도 통요되길 바라는 통치의 철학이고, 이것을 좀더 체계적으로 제도와 법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도전이 법가라고 생각한다. 유가도 인의예지라는 교육을 통해서 세상을 운영하려는 통치의 설학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즉 仁義는 禮라는 말로 광범위하게 실현되고 이것이 곧 제도, 법률, 이 사이에 類라고 명칭된 다양한 관습 사이에 영향을 주게 된다. 맹자와 순자가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예를 바탕으로 선을 추구한다고 본다면 내 입장에서는 그걸 갖고 논쟁하거나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다보면 질문도 생긴다. 치사편(150p)의 왕자지인(왕자가 되는 사람), 왕자지제(왕자의 제도), 왕자지론(왕자의 고과), 왕자지법(왕자의 정책)에 대한 설명을 바라보면 왕자가 되는 사람과 왕자의 정책 대해서는 큰 질문이 없으나 나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옛것만 존중하면 발전이 없고, 세상의 운영은 항상 바른 군자와 성인에 의해서만 움지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가 증명하는 그 많은 사건과 사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조선시대에 이런 말을 했다면 경을 쳤을지 모른다. 그렇게 주자의 관념론적 주해에 토달기 놀이가 실용을 떠나서 교조적으로 변한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 착근하지 않는 것은 유희 그 이상이 되기 힘들다.
그런데 그 마지막장에 우치야마 도시히코는 이런 禮로 통치되는 국가도 궁극적으로 인민을 군주의 권력으로 억압하기에 허구라는 일침은 일본인들의 관점을 보게한다.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명을 통한 성장을 추구했다는 시각과 자각을 보게 한다. 감성적으로 맞지 않아도 지적인 분석에서 일본학자들의 관점은 꽤 괜찮다.더불어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란 亂(난)의 과정에서 생성되었는데, 亂을 治(치)의 방향으로 이끄는 관점에서 비판하면 제자백가의 존재기반을 부정하는 것인가라는 문제제기도 생각해 볼 부분이다.
교양서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렵다. 체계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중간에 괄호와 설명이 읽기 불편한 점이 조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