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ㅇㅇ(ehrrhrnvo) in AKB48 갤러리
2019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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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기 전에. 마츠이 쥬리나(松井珠理奈)는 AKB48의 자매그룹인 SKE48 소속의 멤버다. 2018년 6월 시점에서 AKB48 그룹 내 최고 인기멤버였으며, 프로듀스48에서도 일본인 참가자 중 뛰어난 실력과 카리스마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2018년 6월 18일 열린 AKB48 총선거에서 그룹 내 경쟁자인 미야와키 사쿠라(현 아이즈원)에게 고함을 지르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한 뒤 프로듀스48에서 하차하고 AKB48 그룹 활동에서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본문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긴장 상태가 지나치면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자신을 다그치고 있는 게 아닌가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벌써 10년이 지나가는데 그룹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으니까요. 그걸 지탱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밖에 없어요.”
턱에 하얀색 마스크를 찬 긴 머리칼의 여자가 의자에 앉아있다. 책상 건너 그녀를 마주보며 앉은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낮게 한 숨을 쉬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시야를 좀 더 넓힐 수도 있잖아요? 혼자서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려 하면 도리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
“무엇보다 자신이 힘들잖아요? 모두 앞에서 그렇게 자신을 잃은 채로 쏟아내고 나니 기분이 어떻던가요?”
“... 자괴감...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고... 사람들이 절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어요. 내가...”
“내가...?”
“내가... 무너지는 느낌...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느낌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이 그걸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에요. 지나치게 에고가 강한 상태이다 보니 상황을 한없이 비장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오히려 마음을 좀 내려놓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혼자 있을 때 마다 이렇게 되뇌어 보세요. ”나는 가라앉는다. 나는 가라앉는다.“”
“가라앉는다?”
“네, 자신과 그룹의 위치가 추락하는 것에 과민한 상태라면 도리어 확 풀어버리는 게 심리적으론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보다 조금 덜 빛나도,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도 괜찮다고, 그 상태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그 상태에서 여유를 가지면 다시금 올라갈 수도 있다고 반대로 자기 암시를 거는 거죠.”
“어렵네요.”
“일단 제 말대로 해보세요. 마음을 내려놓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요. 약은 지난번처럼 처방해둘게요”
“알겠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여자는 진료실 문을 열고나오며 턱에 건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윽고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쥬리나? 마츠이 쥬리나씨?”
“네.”
“약 나왔고요. 진료비 결제하시면 됩니다.”
그녀는 SKE48의 마츠이 쥬리나였다. 쥬리나는 불면증과 우울증, 정확히는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감정의 수면에 파도가 일고 자아가 휩쓸렸다. 며칠 전 그룹 총선거 리허설 현장에서는 문득 몰아친 격정을 참지 못하고 수십 명 앞에서 울고 소리 질렀다.
“죽기 살기로 하세요. 죽지 않으니까. 어중간한 맘으로 하다간 그룹이 끝납니다!”
“이젠 우리가 누구와 싸우느냐, 더 이상 akb가 아니라 노기자카야!”
결제를 하고 병원을 나오는 길에 다시금 그때 생각이 났다. 수치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가라앉는다. 나는 가라앉는다.)
의사가 알려준 말을 얼른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기분이 드는 것도 같았다. 이렇게 주문을 외우면 akb의 현실도 달라질 수 있을까?
쥬리나는 지난주에도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프로듀스 48>이란 방송의 촬영장에서.
akb에서 한국과 합작해 글로벌 걸그룹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쥬리나는 한 줄기 서광을 보았다. 지난날의 영광은 퇴색되고 akb는 성장 동력을 잃었지만, 합작 그룹을 통해 다시금 데뷔한다면 노기자카, 케야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추진력을 얻게 되겠지.
ske의 홈그라운드에서 열리는 총선에서 자신이 우승할 것이라는 데 쥬리나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akb 10년의 역사가 서린 망토를 걸치면, 그 다음 수순은 당당히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데뷔 이래 십년 간 운영진의 푸쉬를 받아왔고 선발 멤버에서 빠진 역사가 없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 믿었다. 가혹한 서바이벌과 지옥 같은 스케쥴을 접하기 전까진.
고토 모에가 댄싱퀸으로 선발돼 춤추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두 볼이 젖었다. 제작진에겐 모에가 성장한 모습이 대견해서라고 둘러댔지만, ‘B 클래스’ 옷을 입은 채 기수로나 총선순위로나 까마득한 후배의 들러리가 된 처지가 서러웠다.
“빛을 따라 올라간 언덕이 길이 끝나는 절벽이었어.”
쥬리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건널목에 서서 녹색 신호를 기다리다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나는... 가라앉는다.... 나는... 가라앉는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스다 아카리는 불안한 맘을 감출 수 없었다. 요즘 마츠이 쥬리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명백히 도를 넘었다. 총선이 열린 오늘 오전부터 눈에 핏발이 선 채 안절부절하더니 손톱을 깨물며 혼잣말까지 뱉었다. 나는... 뭘 한다고?
급기야 쥬넨사쿠라 무대에서 쥬리나는 폭주했다. 들 뜬 기색으로 묘하게 일그러진 웃음을 짓고 동선도 없이 무대를 돌아다니다가 미야와키 사쿠라에게 벽력 같이 고함을 질렀다.
“춤 똑바로 추지 못해!!!”
스다 아카리는 곁눈질을 하며 무대를 이어갔지만 쥬리나가 걱정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고 TV에 생중계까지 되는데 괜찮은 걸까? 평소 쥬리나가 사쿠라에게 품은 경쟁심은 잘 알고 있었다. 쥬리나와 사쿠라는 늘 선발곡 무대의 2열에 나란히 섰고 드라마에서 상대역을 맡았지만, 운영진의 복심은 사쿠라에게 기울어 있었다. 97 라인이 대거 참가한 <프로듀스48>이란 방송에서도 사쿠라는 쥬리나를 제치고 A등급을 받았다고 들었다. 자존심 강한 쥬리나가 어떤 상처를 입고 돌아왔을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만 했다.
(‘춤’이라... ‘춤’. 그래, 쥬리나는 사쿠라가 지금 추는 쥬넨 사쿠라가 아니라 등급 평가 때 췄다는 그 춤을 떠올리며 분노하는 거겠지.)
(쥬리나, 너는 늘 우리들에게 어깨를 편 채 뒷모습만 보여줬지. 팀원들은 그 모습을 의지하며 따라갔지만, 사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속을 터놓을 줄 모르는 미숙함과 치기는 아니었을까.)
스다 아카리는 자신 보다 여섯 살 어린 이 자존심 강한 선배가 평소 동생으로도 윗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 총선이 끝난 후에는 둘 만의 대화 시간을 청해 봐도 괜찮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쨌건, 오늘 밤은 나고야의 승리로 끝날 가망이 높으니까. 당장은 자신이 쥬리나와 함께 AKB의 양익을 차지할 수 있을지가 더 중요했다.
“총선 3위를 발표합니다. 3위는... 미야와키 사쿠라!”
축포가 터졌다. 사쿠라는 오열했고, 쥬리나는 환호했다. 가장 담담한 사람은 2위를 차지하게 된 스다 아카리였다.
(그래, 이러면 된 거야, 이러면)
스다 아카리는 오늘밤이 쥬리나가 다시금 용기를 찾는 전야제가 되길 바랐다. 쥬리나가 총선 후 인터뷰에서 ‘그 말’을 할 거라곤 예상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전부 말할 게요 (正直言いますね全部話しますね)”
“저는 목숨을 걸고 전력으로 춤췄어요. 노래했어요. 그렇지만, 춤추는 저를 보고 아무 생각도 안 하는 애도 있어요. 저를 선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래요. 사쿠라에게 "더 똑바로 춰"라고 말했어요. 안 그러면 AKB가 끝장나니까,”
먹이감을 포착한 기자들은 일제히 플래쉬를 터트리고 타이핑을 쏟아냈다. 순간 얼굴이 경직된 운영진이 기자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쥬리나를 대기실로 데리고 가 호되게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무슨 정신인 거야? 그런 식으로 말했다간 아무도 너를 좋게 봐주지 않을 거다!”
“저는... 저는 진심을 말했을 뿐이에요! 잘못은 내가 아니라 사쿠라에게 있다고요! AKB를, 우리가 사는 이유 AKB를 이대로 잃어도 괜찮다는 건가요!”
“시건방진 소리 하지마! 그룹을 운영하는 건 우리 어른들의 몫이야. 너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며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돼!”
쥬리나는 동심을 짓밟힌 아이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무참하게 주저앉았다. 얼굴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그녀의 등 뒤로 사시하라 리노가 다가와 어깨를 안고 귓속말을 했다.
“내 망토 입고 울지 말아 줄래? 더러운 게 묻잖아.”
그 말은 쥬리나의 가슴에 마지막 일격을 꽂는 단도가 돼 꽂혔다.
“쥬리나 짱, 쥬리나 짱!”
스다 아카리는 과호흡으로 가슴팍을 움켜잡고 헐떡거리는 쥬리나를 붙잡고 흔들었다.
“여기 앰뷸런스 좀 불러줘요, 제발! 빨리!”
쥬리나는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덜컹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렸다.
“여기는...?”
“말 하시면 안 돼요. 가만히 누워 계세요.”
쥬리나는 간이용 의료침대에 누운 채 구급차에 실려 가고 있었다. 입에는 산소 호흡기가 달려 있었다.
반쯤 감겨진 눈에 비친 조명등이 어둡게 흔들렸다.
11살에 SKE에 입단해 최초의 본점 겸임 멤버가 됐고 수십 곡의 센터를 맡았다. 지난 시간이 뭉개구름처럼 피었다 사라져 갔다. 찬란하던 시절, 동경하던 선배들, 자신의 긍지를 이루던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총선거 1위. 오늘은 마츠이 쥬리나가 삶의 대망을 이루어낸 날이다.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는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른 후 천천히 발 밑이 꺼지고 낙하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아래로,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고 발에 닿지 않는 저 아득한 아래로...
“...”
“네? 마츠이 쥬리나 씨? 뭐라고 하셨어요?”
“... 나는... 가라앉는다.... 나는... 가라... 앉는다...”
사이렌 소리는 흩어지고 구급차는 도심의 적막한 원경 속으로 소실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