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주인공의 기행, 자해, 눈물, 악몽 등을 나열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캐릭터에 공감하기를 관객에게 강요할 뿐, 영화는 시작한 지 1 시간 가까이 되도록 좀처럼 시작할 줄 모른다. 악당들은 단 2 명인데 암살을 하러 가서는 한적한 주택가에서 요란스레 폭탄을 터뜨리며 자수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른다. 주인공 남아의 아빠는 악당을 피해 아이를 데리고 피난처로 굳이 험준한 산을 택한다.
테일러 쉐리던이 ‘시카리오1’, ‘로스트 인 더스트’, ‘윈드 리버’를 ‘frontier trilogy’라 불렀고, 이걸 ‘변방 3부작’이라 옮기기도 하는데 거의 오역이다. frontier는 경계이며 최전선이다. 경계이기에 이방인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최전선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선구자들 덕분에 도시의 중산층은 오늘도 평온하다. frontier에 ‘변방’이라는 ‘변두리’의 어감은 없다. 경계를 변두리라 여기는 건 중앙집권적 사고방식(우리는 “서울 올라간다”고 말한다)에 익숙해 벌어진 오해다.
쉐리던 영화 속의 중앙집권 수사기관인 FBI, CIA는 지역 수사기관이라 할 보안관(이름도 비슷한 ‘쉐리프’)에 비해 무능하거나 부패하게 묘사된다. 이번 영화에서도 악당들은 굳이 첩첩산중을 정장에 넥타이까지 목에 두르고 중앙에서 파견된 공무원 룩을 선보이며 주인공들 사냥에 나선다. 악당들이 FBI를 사칭하며, “나는 이곳이 싫어”라고 푸념을 반복하다 선구자들에게 총맞아 죽는 건 당연한 수순이자 운명이다.
최전선에서 영토 확장에 여념이 없는 선구자를 추앙하는 사이, 남의 땅을 빼앗았다는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쉐리던에게 진보는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이고, 보수는 영토보전을 위한 진압이다.
전작들에서는 여자주인공들이 무기력하거나 미숙하여 선구자의 앞길에 방해만 되었다. 반면 이번에는 안젤리나 졸리가 툼레이더 출신답게 악몽을 극복하고 악당을 진압한다. 그러나 남자 동료들과 완벽히 동화되고(음담패설을 공유하고,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게임에서 ‘남자로서’ 성공하며 남자들의 환호와 인정을 받는다) 남성화되어서야, 비로소 쉐리던 월드에 시민권을 부여 받았으니 우리 쉐리던이 변했어요, 라며 성급하게 추켜세울 일은 아니겠다.
윈드리버에 이어 재탕한 무색인종 남자와 유색인종 여자의 관계는 연구대상이다. 유색인종 여자와 관계를 맺은 무색인종 남자들은 모두 불행해진다.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자손님을 희롱하던 (“전자담배나 피는 저런 남자를 왜 만나냐”) 졸리의 동료 소방관들이 마지막에 영웅으로 등극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최소한의 양식마저 결여했음을 자백하고, 산사람들의 찬가라 할 칸츄리 송이 울려퍼지며 산림청 홍보 영상처럼 마무리하는 것으로 조촐하게 자폭한다.
자의식 과잉 속에 남발한 실언 같은 장면들(예. 식당에서 밥 먹던 늙은 보안관에게 뜬금없이 뒷자리 손님이 네 아내에게 전화왔다고 알려주는데 늙은 보안관은 전화를 거부하고, 얼마 뒤 총 맞아 죽는다. 악당들이 불을 놓자 여자조연은 이불치불이라는 듯 화염방사기로 맞선다.) 역시 지난 한 5 년 영화계를 풍미했던 쉐리던이라는 거대한 허명의 몰락을 예고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간 쉐리던은 흙, 바람, 물, 불을 4원소로 규정한 고대 철학자가 재림한 듯, 흙, 바람, 물, 불 속에서 분투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제법 재주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 모두 휘발된 듯하다. 바람의 뜻을 잘못 읽어 불행해진 여자주인공이 불 속에서 악당을 제압하고 물 속에서 생명을 연장한다는 이야기는 서사라기보다 도식에 가까워보인다.
나는 테일러 쉐리던이 쓰거나 만든 영화들을 ‘시카리오1’ 이후 다 챙겨보았다. 그중에 그나마 재미있게 본 건 ‘시카리오2’뿐이었다. 가장 재미없었던 건 제목처럼 먼지밖에 기억 안 나던 ‘로스트 인 더스트’였다. 이제 그 순위가 바뀌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말단에 당당히 진입했고, 당분간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어보인다.
아까 노트북 숨기고 이거 썼구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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