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운동의 한 종류인 '조정'이다. 내가 오늘 얘기하려는 '조정'과는 사뭇 다르다. 사진 협찬 : 연합뉴스]
조정은 잘 활용하면 좋은 제도다. 정식 재판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반면, 조정은 조금씩 양보해서 금방 마무리할 수 있다. 판사로서도 무거운 짐을 하나 덜게 된다. 사안에 대해 판단을 하고, 판결문을 작성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때로는 무리하게 조정을 강권하는 판사들도 있다. 그런데 오늘은 판사보다는 조정위원에 대해 말하려 한다.
조정에 회부되면, 조정위원이 조정을 진행한다. 정식 재판은 판사가 법대 위에서 내려다본다. 반면 조정은 평평한 테이블에 조정위원과 당사자들(원고, 피고 혹은 신청인, 피신청인)이 앉아 대화한다.
조정위원들은 법원에서 위촉하는데,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지원하고 위촉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은퇴한 교장 선생이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의외로 '법알못'들이 많다. 그러나 조정 자체가 조금씩 양보하자는 것이고 조정위원은 그 양보를 주선하는 역할을 수행하니, 조정위원에게 법률 지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조정위원들이 무리하게 조정을 성사시키려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형사 조정에서는 조정위원이 남자 피의자에게 “남자답게 (여자 피해자에게) 사과하세요!”라고 호통치는 경우도 봤다.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걸로 보아, 조정 성사 비율에 대해 일종의 인센티브(재계약 체결 여부 등)가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며칠 전 이혼 사건의 조정이 있었다. 나는 여자 쪽 소송대리인이었다. 남자는 이혼을 원하고, 여자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혼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조정위원은 중년여자였다. 먼저 남자와 얘기할 테니, 여자(와 그 소송대리인인 나)는 잠시 비켜달란다. 한참 얘기하더니 (아마도 남자에게 화해 및 재결합을 권유했을 것이고, 남자가 완강하게 거부했을 터) 우리 보고 들어오란다. 조정 성사를 위해 우리에게 이혼을 권하리라는 것은 예상했으나, 이 조정위원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거침없이 넘기 시작했다.
조정이 결렬되어서 정식 재판 절차로 넘어가게 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내 친구 중에는 10년 걸린 경우도 있다. (친구가 헨리 8세인가?)
요즘은 판례가 바뀌어서 유책배우자도 이혼한다. (나도 모르는 판례변경이 있었나 보다. 누가 홍상수에게 이 희소식을 전해주시라.)
그렇게 재판이 장기화되면 아이한테도 오히려 좋지 않다. (이게 아이 생각해서 이혼 못하겠다는 사람한테 할 말인가? 다른 곳도 아닌 법원에서?)
가급적 법정에서는 필요한 말만 하는 편이지만, 이쯤되면 나도 참기 힘들어져서 한 마디했다. 조정위원님, 말씀 도중에 죄송하지만, 진행 방식에 이의있다, 피신청인(=여자)이 이혼의사 없음을 확인했으면 그냥 조정 불성립 처리하셔야지 왜 자꾸 이혼하라고 무리하게 설득하시냐. 그랬더니 당황했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오해인데, 저 이거 공익을 위해 하는 거고, 교통비나 나오려나? ...
결국, 예상대로 그날 조정은 불성립되었다. 퇴정 후 복도를 걸어가는데, 우리보다 앞서 나가는 조정위원의 뒷모습이 오늘은 허탕쳤다는 듯 힘이 없어 보였다.
간혹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조정에 회부되었는데 조정위원이 ...라고 말해서 일리가 있는 듯해 조정에 응했다.” 아마도 조정위원이 법을 잘 알고, 따라서 자신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었을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조정위원은 당신의 이익에 관심 없다. 오로지 조정 성사에만 관심 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 그저 조정을 성사시키려할 뿐이다.
따라서 조정에 임하게 되면 잘 생각해야한다. 필요 이상으로 양보하는 악수를 둘 우려가 있다. 당신이 완전승소를 거둘 사건이어도 조정위원은 일단 당신에게 양보하기를 권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불필요하고 불리한 양보를 해서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선택을 한다 한들, 아무도 당신을 만류하지 않는다.
모르면 당한다. 그곳이 법원이라 하여 달라질 건 없다. 조정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 있는 것 같아 몇 자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