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보기 글은 다음과 같이...
①<한글은 문자. 찌아찌아어는 언어. 같이 가보려 했는데>
②<글로는 말을 다 전하지 못하고, 말로는 뜻을 다 전하지 못한다>
③<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왜? 면죄부 대량 판매로 돈벌려고>
④<중국에서 유럽 전래. 종이, 화약, 나침반. 금속활자는 빼야>
⑤<한자, 표의문자는 옛 인쇄술 발전에는 불리. 독특한 에크리튀르>
⑥<먹, 벼루, 붓과는 달리 종이는 기원 후에 발명되었다. 음...>
⑦<양피지는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수출 금지땜에 탄생했다>
⑧<진시황은 분서갱유 당시 종이책을 불태우지 않았다>
정리된 ‘언어’와 ‘문자’의 구분 기준과 ‘언어’와 ‘언어학’의 외연
(그 외연은 언급만...문자는 아직...다음에 다룰 것이고)
(가) 언어는 문자와 다르다.
모든 지역이나 나라의 언어족, 즉 어족(語族)을 분류하는 작업을 하면 마지막에 ‘어(語)’를 붙인다.
한국‘어,’ 미국‘어,’ 영국‘어,’ 일본‘어’처럼.
한국어가 있다면 이를 표현하는 방법은 ‘한글’이며, 이는 곧 문자(文字)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주 부톤 섬 남부의 바우바우 시에서 쓰는 언어의 하나인 ‘찌아찌아어(語)’를 표기하는 고유의 문자는 없다.
세종대왕 같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글’을 도입하려고도 했다(내가 알기로는 실패).
-현재 다른 민족이나 부족이 사용하는 문자를 빌려 사용 중이다.
몽골도 상당한 문자를 러시아 문자를 빌려 사용 중에 있다.
따라서 이렇듯 한국어와 한글은 이렇게 같아 보이나 엄연히 다르다.
이게 바로 ‘말’과 ‘글’의 차이이다.
한국어를 표시하는 문자를 한글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도 소위 영어로 또는 가나로 우리말, 한국어를 표기할 수도 있다.
이 또한 ‘말’과 ‘글’의 차이이다.
(2) 따라서 언어학은 언어(言語)를 다루는 학문이다.
문자가 필요한 경우 언어학 연구에 사용될 것인가?
문자학(文字學, graphology, graphemics, grammatology, graphonomy)이 언어학에 관련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렇다. 특히 통시언어학(通時言語學, diachronic linguistics)이다.
역사언어학(歷史言語學, historical linguistics)이라고도 한다.
과거 사용되었으나 지금 사용하지 않는 언어는 문자에 의존할 수 밖에.
학문 분류상 언어학(linguistics, philology)과 문자학은 서로 다르다.
언어는 language이고, 문자는 letter.
문자언어라는 용어가 사용되더라도(언어를 광의로 정의하는 예외적인 경우로서)
이는 그냥 글(writing), 문자(letter), 글자(letter)라고 이해하여야 한다고 직전 글(9)에서 얘기했다.
다시 말하지만, 직전 게시글에서
-그래서 문자언어(written language)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말자고 했다. 그냥 문자(letter)
-아울러 음성언어(vocal language)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경우 이는 그냥 말(speech), 음성
(voice), 언어(language)라고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
즉, ‘언어’와 ‘문자’를 구분하면, ‘말’과 ‘글’을 구분하는 것이다.
‘말씀’은 높힘말이고 ‘글월’은 옛말투이다.
너무 길지만, 이렇게[(9)도 포함하여] 정리를 하고 나서 소쉬르(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년)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오래간만에 펼쳐보니, 정말 똑같이 설명과 정의를 하고 있다.
이렇듯, 소쉬르가 기초적인 토대를 잡아놓고 언어학을 끌고 간다는 의미일 뿐, 나는 이 이상을 다루기 어렵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을 상론할 능력도 없다.
위에 쓸데없이 상술한 것처럼 개념상의 혼란만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언어학(言語學, linguistics)은 언어에 관한 연구로서
-음성학(음운론)/의미론/문법론
이러한 언어학도 여기에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3) ‘언어’와 ‘언어학’의 외연
그런데 우리가 아는 언어는 위의 언어학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전문 학자들의 영역이긴 하지만...
① 의식에 집중하던 전통적인 철학이 언어로 촛점을 옮긴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언어는 철학의 도구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언어는
의식의 도구인가 의식이 거주하는 집인가?
의식이 먼저인가 언어가 먼저인가?
엊그제 내가 이랬다.
<글로는 말을 다 전하지 못하고, 말로는 뜻을 다 전하지 못한다>
-직전에 타임라인에 내가 올린 글이다.
-근데 이글 원문은 ‘書不盡言, 言不盡意’(서불진언, 언불진의)이다.
-공자의 《주역》십익(十翼) 중 <계사전>에 나오는 글이다.
-공자의 십익은 주역‘경(經)’의 해설서인 ‘전(典)’이 10가지인데 그 중에 하나가 계사전
-경전(經典)은 말씀 원전이 ‘경’이고, 해설서가 ‘전’이라는 말이다.
-공자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말은 뜻이 전달되게 할 뿐이다(사, 달이이의)(辭, 達而已矣)>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온다.
이것 또한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갑자기 던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뜻이 먼저인가 언어가 먼저인가?
이는 즉 의식이 먼저인가 언어가 먼저인가?
당연히 의식(뜻)이 먼저 아닌가?
왜 당연한 말을 하나?
이미 데카르트가 ‘생각’의 선존재(先存在)로 근대 철학을 열었는데,
그 앞에 언어(言語)를 놓겠다고 한다?
② 지금의 철학과 철학자들은 무엇을 부수려하나?
이를 내파라고 한다.
맥루한의 내파나 원자물리학의 내파나 소쉬르의 내파나 데리다의 해체나...아...모르겠다.
뜻이나 의식보다 ‘언어’가 먼저이라는 긴장의 조성은 내가 뭔가 답을 줘야만 해소가 될터인데...마지막 줄까지 가보자...
이러한 언어철학(言語哲學)으로 관심을 높이면...아....머리가 띵해진다.
언어를 신호적, 기호적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 있다.
메를리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더 나아간다. 설명이 필요하다고? 더 헛갈린다.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은 언어놀이를 하며 확 방향을 튼다.
분석철학 또는 논리실증주의까지 가버린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가다머(Hans-Georg Gadamer),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모르겠다. 아는 척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냥 느낌은...
사고(思考)(데카르트. 이건 알잖는가?) 이전에 실존(實存)(카뮈, 니체...선험적 존재라는...사고 이전에)...
그리고 실존 이전에 언어(言語).
<‘말(언어)’ 뒤에 있는 의미(뜻, 의식)는 보통 언어소통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분석철학자, 논리실증주의자 비트겐슈타의 말이다.
시작할 때는 언어와 문자, 말과 글을 분리하더니,
이제는 언어를 떼내어
의미(그리고 의식)를 해체하는 극단(極端)으로 밀어올리고 있다.
③ 캬...이거 정말...이렇게 적고 보니....
인간의 물리적 궁극은 뭘까? DNA=정보. 바로 이것이다. 그럼
인간의 정신적 궁극은 뭘까? 언어=정보. 바로 이것 아닌가?
바로 이 언어를 최근에 철학의 중심(中心)에 놓고 다루기 시작했고,
위의 사람들이 그 철학자들이다.
언어철학자들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과 견해의 그냥 철학자들이다.
인간의 정신적 궁극을 ‘의식’에서 ‘언어’로 돌려 세우는 것이 아닌가.
④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언어가 아니라 문자(文字)로 도망갔다.
근대를 비판하는 새로운 시선을 ‘문자’를 통해본다.
이는 언어에 대응하는 것보다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자학,’
<그라마톨로지(Gramatology)> (1967)를 토대로 하는 ‘새로운 글쓰기’를 통한 ‘언어’ 밖의 차이(差異)를 넘는 차이(差移)/차연(差延)(différance)(*difference가 아니다)을 찾아간다. 이것 또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서 빌린 아이디어를 이렇게 증폭시킨다.
며칠전에 내가 사용한 낱말 에크뤼티르(écriture)도 데리다의 용어이다.
-한자, 표의문자는 옛 인쇄술 발전에는 불리. 독특한 에크리튀르.
암튼 이 모든 것을 데리다의 ‘해체’라고 한다.
근대에 재정립된 로고스 중심사회의 통념들을 새로운 문자학과 글쓰기로 파괴,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그냥 재해석이다.
이것도 크게는 아직도 진행 중인 후근대(post-modernism) 현상일까?
하긴 근대(modernism)도 착종되어 아직도 진행중이건만...
비록 데리다가 언어 대신에 문자를 잡았지만, 아이디어는 언어의 ‘기표(記表,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signifié 시니피에)’의 구분[소쉬르(Ferdinand de Saussur)의 용어]에서 왔기에 그 또한 넒은 의미에 언어를 통한 새로운 철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도.
⑤ 그럼 이런 경향은 어쩌면 자연과학과 과학적 연구방법론에 기초한 많은 분파 학문의 도전과 공격에 쪼그라든 철학의 생존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연과학적 연구방법론을 흉내내며 인문철학을 다루어야 한다는 철학자들의 강박증때문인지도 모르겠다.
⑥ 그런데 이런 서양철학자들은 공자의 다음 말씀을 알고나 있을까?
그들의 말장난 철학을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동양은 뛰어넘고 있었음을.
공자는 이렇게 남겼다. 논어 양화(陽貨)편에 나온다.
<나는 정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子曰:予欲無言.
子貢曰:子如不言,則小子何述焉.
子曰:天何言哉, 四時行焉,百物生焉,天何言哉?
공자왈:여욕무언.
자공왈:자여불언,즉소자하술언
공자왈:천하언재, 사시행언,백물생언,천하언재?
공자 왈.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자공 왈. “선생님께서 말씀을 아니 하시면 저희는 무엇으로 도를 말하고 전하겠습니까?”
공자 왈.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가 바뀌어 가고, 만물이 생장하건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
이럴진대, 노장(老莊)으로 넘어가면 더더욱.
(라) 정리하면...
나의 관심은 원래 의미의 언어, 언어학, 언어철학, 그리고 언어에 집증하는 철학으로는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의 ‘신(新)문자(철)학’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냥 환기만 시키면 숨쉬는 것은 알아서 잘 하지 않을까...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자신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문자언어(이 용어 안쓰기로 했다), 문자, 글(자) 그 자체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고대 그리스가 페니키아 알파벳을 받아들이는 얘기를 먼저...
현실 지식으로 정말 필요하므로...
..to be continued...
목차
- 정보의 저장고
가) DNA
나) 대뇌피질
다) 문자, 책, 도서관 - 뭘 더 알아볼 것인가? (이번 글)
- 정보의 저장 방법 - 소리 전달 이후의 글쓰기
가) 어디에다 글을 썼을까?
나) 책(冊, book)이란 낱말은 어디서?
다) 책의 형태는? - 정보의 대량 생산
가) 인쇄 기술의 발전과 배경
나) 종이와 인쇄술 - 인쇄가 역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 대량생산과 보급
- 무엇을 쓰고, 인쇄하나 - 언어와 문자의 구분
- 정리된 ‘언어’와 ‘문자’의 구분 기준과 ‘언어’의 외연 (이번글)
- 문자성과 문자의 우월성이란 실체인가 허상인가?
- 글쓰기와 글읽기가) 흥미있는 서두 열기
나) 먼저 글쓰기
a) 서론
b) 고대 그리스 글쓰기 시작 - 문자의 도입
c)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글쓰기 - ‘물구나무 쓰기’부터
d)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글쓰기 - 소몰이 쓰기법
e) 로마자(라틴 문자)의 시작
f) 로마자(라틴 문자)의 변화 - 소문자 등의 등장
g) 로마자(라틴 문자)의 변화 - 오늘날의 글쓰기 시작
h) 한자문화권의 우종서와 좌횡서
다) 이어서 글읽기
a) 글읽기와 관련된 몇 가지 개념
b) 글읽기와 관련된 몇 가지 관점
c) 성독과 묵독에 관한 맛보기 글
d) 글읽기의 대상 – 문자의 종류
e) 글읽기 – 성독
f) 한자문화권의 글읽기
g) 여담 몇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