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이야기 -정보, 저장, 생산으로서의 인쇄, 언어와 문자, 문자성, 글쓰기와 글읽기 : 여섯번째 글

in bookstory •  7 years ago 

다음과 같은 짧은 글로 맛보기를...

①<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왜? 면죄부 대량 판매로 돈벌려고>
②<중국에서 유럽 전래. 종이, 화약, 나침반. 금속활자는 빼야>
③<한자, 표의문자는 옛 인쇄술 발전에는 불리. 독특한 에크리튀르>
④<먹, 벼루, 붓과는 달리 종이는 기원 후에 발명되었다. 음...>
⑤<양피지는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수출 금지땜에 탄생했다>
⑥<진시황은 분서갱유 당시 종이책을 불태우지 않았다>

  1. 인쇄가 역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 대량생산과 보급

보다 강력한 인쇄매체는 목판이나 목활자가 아니라 금속활자!

우리는 늘 1450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라는 역사적 기록에 대해 폄하하거나
우리의 앞선 인쇄기술에 대한 서양의 무지에 억울해한다.

<⒜나라나 지역별 금속활자 인쇄>

①고려의 금속활자

적어도 우리는 금속활자 분야에서 1세기에서 3세기나 빠른 선진 기술을 가졌다.
-고려 숙종 1102년 금속활자 제작설이 있다. 정설은 아니다.
-고려 고종 1234년 상정고금예문은 금속활자본이다.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 공민왕 1372년 직지심체요절은 금속활자본이고, 프랑스가 유일한, 한 본 훔쳐갔다.
상하권중에 하권만 존재.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본래 명칭이다.

서구의 학자들은 이러한 정보를 몰라서? 아니다...잘 안다.

우리의 섭섭함은 자랑이 아니라 열등감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지적을 하는 학자(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도 있다.
이자겸의 난이나 무신의 난 그리고 몽고 침입이나 홍건적의 도적질은 고려 시대 책을 거의 소멸시켰다. 아니 고려 이전의 책들도 거의 사멸시켰다. 오!

오로지 남아있는 것은 팔만대장경, 고려사, 고려사절요, 문집 몇권, 금석문 일부...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남아 있는 책이 위에 언급한 것외에 없다.
거의 고려 300년 정도의 금속활자 인쇄가 가능했는데 얼마나 찍었는지 기록도 거의 없고 찍었을 인쇄본 책도 남아 있지 않다.

②유럽의 금속활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발명된 1450년경 유럽 전역에 잔존하던 책이라고 해봐야 수만권에 불과했다.
이유는?
여전히 대세이든 양피지와 종이로 된 책들이다.
대부분 필사본이다.
종이책은 중국에서 전래된 목판인쇄로도 잠시동안 만들어졌다.
이 목판인쇄도 거의 50여년 정도 밖에 이어지지 못하였으니 많을 수가 없다.
이후 50년 동안에 책은 10,000,000권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코스모스> 쓴 칼 세이건의 이야기이다.
20,000,000권이라는 기록도 간혹 보인다.

후술하겠지만 면죄부와 성경의 대량 인쇄.
요즘은 면벌부(免罰符)로 수정하여 부르는 추세란다.
벌은 사면이 가능하지만 죄(罪)의 사면은 카톨릭 교리상 불가능하기에.
그래도 가장 흔한 표현인 면죄부를 계속 쓴다.

얼마나 찍어댔으면...유럽의 이야기이다.
종류로는 4만종 가까이 되고 인쇄소도 250군데 이상으로 늘어났다.(현재의 우리나라 출판 책 종류도 연 4만여종이 된다는 확인해봐야겠다)
전부 인쇄본이다.
구텐베르크의 대량인쇄방식은 조입라인과 프레스(press)의 가동에 있는데,
이 프레스는 오늘날의 언론(Press)의 상징어가 되었다.

아...이건 마술 아닌가? 되풀이 한다. 와우...

여기서 구텐베르크 이야기를 조금 더 붙인다.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이나 사망일이 같은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도박(주사위나 카드나 체스 등)으로 돈을 탕진했으나 이 도박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라고 할 수 밖에.
그는 도박의 패를 나무로 만들면서 목판 인쇄를 시도했고 나무의 취약성을 알고 나서 금속활자를 발명하게 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것도 처음에는 면죄부의 대량인쇄, 나중에는 성경의 대량 인쇄로 큰 돈을 벌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당시 마인츠는 선제후(選帝侯) 국가였다.
선제후 국가는 왕이나 황제는 아니었다.
마인츠의 선제후는 세석제후가 아니라 성직을 가진 성직제후였다.
다만 신성로마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투표권을 가진 자가 다스리던 나라였다.
신성로마제국(神聖로마帝國)은 어쩌면 가상의 제국이라고도.
프랑크왕국의 왕에게 로마 교황이 유럽의 분열을 우려하여 시작된 신성로마제국은 어쩌면 5세기에 소멸한 로마 제국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다.
프랑크 왕국이 베르됭 조약으로 3분되면서 독일 지역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교황이 정치에 간여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이 이어지게 되었다.
19세기초 나폴레옹에 의해 사라지게되지만.

그리고 1453년에는 동로마 제국마저도 사라지는 시기이다.
이는 유럽의 동쪽행이 막히는 것으로서 서쪽의 바다로 향하는 대항해의 계기가 된다.

당시 구텐베르크가 태어나고 자란 마인츠의 선제후는 대주교이면서 가장 많은 면죄부(면벌부)를 찍어대던 자였다.

③그럼 조선은?

정도전의 조선은 유교국가로서의 대의의 유포를 위해 과감하게 금속활자 인쇄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금속활자 인쇄문화는 문화가 아니었다.
국가 시책이었다.
인쇄본 책을 읽는 인구의 증가도 없었고
지식의 개방과 해방도 없었고
지식의 값싼 공급 또한 없었다.
유자의 나라는 양반의 나라, 확대하면 반상의 나라.
그래도 국가가 찍은 책은 양반에게만 배포되었다.
(그래도 예산이나 인력 동원을 무시하면 안될 것이지만 나도 많은 학자나 언런이들처럼 이렇게 자기비하적으로 적게 된다)

고려든 조선이든 모든 금속활자는 국가의 소유였다.
구텐베르크의 소유처럼 민간의 소유가 아니었다.
선조는 이전의 ‘주자소’와 ‘교서관’을 통합하여 ‘교서관’으로 하여금 활자 주조와 출판을 맡게 했다.
그러니 유통도 국가의 독점이었다.

국립도서관에 가면 세책(貰冊)과 방각본(坊刻本)을 만날 수 있다.
방각본이란 민간인이 영리를 목적으로 목판인쇄를 통해 간행한 책.
조선 후기 18세기말에서야 일어난 일이다.
이게 금속활자본이 아니다.
전부 손으로 베끼거나 판각본(版刻本), 즉 조판(雕版)인쇄본이라는 것이다.

그 빌린 책에다 낙서와 외설그림 그리기는 많이 했다.
외설책도 많이 만들었다. 사람들하고는...

그런데 직전 글에서 김탁환의 소설 <혜초>를 종이 때문에 인용하였는데
오늘은 인쇄 때문에 그의 소설 <방각본 살인사건>을 인용하게 된다.

소설의 키워드는 ‘매설가’와 ‘방각소설’이라는 점.
어떤 이는 매설가로 살아가려면 책 5,000권은 읽어야 한다는데...엄청난...
김탁환은 18세기 후반 상업의 발달과 함께 필사소설이 방각소설로 바뀌는 사회상을 상세히 묘사했다.
민간인 방각업자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매설가로부터 작품을 사면서,
서책의 판각, 인쇄, 유통이 이뤄지며,
세책방(도서대여점)을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서책이 전해진다.
당시 소설은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
소설 마지막 대목에서 정조는 살인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방각소설을 모두 불태워 없애라고 명한다. 과연 소설이지만 정조마저도....

그런데
국가가 아닌 사람은 현실적으로도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소유할 수가 없었다.
왜?
돈이 너무 든다.
보관비가 너무 든다.
보관 장소가 너무 크다.
왜?
알파벳이 아니라 표의문자, 한자어로 금속활자를 만들어야 하니
그 활자의 숫자를 몇 개까지 만들어야 했을까?

그렇더라도 책의 배포는 필요한 만큼은 배포되었다고 봐야.
대량 인쇄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배려할 수 없지 않겠는가?

중국 동한(東漢)시대의 허신(許愼) <설문해자> 9,353자
육조시대 고야왕 <옥편> 16,917자
송 <광운> 26,194자
명 <자휘> 33,179자
청 <강희자전> 42,174자
일본 <대한화사전> 48,902자

한자는 자전에 따라 2, 3만여 글자를 넘나드는데 다 만들수도 없고,
오천자 정도의 활자도 대단한 작업. 또 자주쓰는 오백자 정도는 수십벌씩 준비해야.
그런데 실제는 조선은 주조할 때 4만여자의 한자를 만들고 한 글자당 10만개 이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와우!
민간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조선 시대 무슨 왕 시대에 무슨 금속활자를 만들었나를 수업시간에 외우곤 했다.
그런데 기억하는가?
여기서 더 거론하지 않는다.

④중국은?

원(1260년∼1368년)의 왕정(王楨)이 13세기 말에 목활자 인쇄술을 처음 시작하였다고 하기에, 중국의 금속활자시대는 명청시대로 밀려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명(1368년~1644년) 그리고 청(1616년~1912년).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여러 가지 기록상으로는 우리보다 빠른 금속활자 인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증거물이다. 역사의 증거물이 없다. 가장 큰 원인은 엄청난 문화재의 파괴를 초래한 문화대혁명일것이지만...
그러니 그들 또한 금속활자에 국가적 도전의 이유는 우리와 큰 차이가 없다.
마지막 부분에 정리하였지만.

<⒝금속활자 인쇄술의 역사적 의미>

①최근의 해석 경향 - 우리를 낮추는 경향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세상을 바꿨다.
중세를 부수는 길을 열었다.
종교전쟁과 르네상스.

반면에 우리의 금속활자는 그 세상을 공고화하였다.
오히려 중세 유겨적 지배체제를 더 강화하였다.
근대로의 길을 여는 단초가 전혀 되지 못하였다.

지금 세계사는 근대를 경험했는가 아닌가의 평가기준이 가장 크다.
우리는 비켜나 있었고 지금도 비켜나 있는 것이 아닌가?

출판과 번역이 개방(開放) 아니던가?
개방(開放)이 역사발전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노예, 여성이 인간으로 인정되는 역사가 개방의 역사 아니던가?

대중에게 뭘 알릴 것인가? 책을 써야지.
다른 나라들은 뭘 하는가? 번역을 해야지.

17세기 네덜란드도 예를든다. 출판과 사상의 자유 국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유럽의 지식인들이 모여들던 곳.

출판과 번역으로 근대국가가 되었다고 자부해도 무방한 일본.
번역으로 일본을 분해해도 책이 여러권 나올 수 있는 곳이다.
이미 1710년께 일본은 서점이나 출판업자가 359개나 되었단다.
임진왜란의 덕택이다.
어쩌면 세계대전의 원흉인 일본의 6.25를 통한 복구와 도약보다도
임진왜란을 통한 조선의 선진문물의 도입이 오늘날의 일본의 큰 밑천이 되었다고 하는게 맞을 수도.
이후의 국학(國學)과 신도(神道)와 일본신화(日本神話)의 정비와 왜곡은 근대를 위한 기초 능력이 되었고,
이는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근대화된 국가만이 갈 수 있다는 제국주의(帝國主義)의 길을 간 것이다.
지금의 아베는 ‘정상헌법’과 ‘정상국가’로의 도약을 통해 신제국주의(新帝國主義)의 길로 가고 있지 않은가?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이러한 근대화에 뒤처진 나라가 되었고
원인의 하나는 이러한 (한편으로는 뛰어났으나) 중앙집권적 인쇄 제도와 문화때문이었다는 것을.

②과연 우리의 금속활자는 역사적 의미가 없는가?

금속활자가 처음 주조된 1450년 당시 유럽은 이전의 십자군 전쟁 준비를 위한 군수산업의 영향으로 상업이 활성화되었고 상업조직인 길드가 유럽을 종횡으로 누비고 다녔다.
시장과 화폐와 상인과 도시가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변화는 이탈리아가 가장 먼저 받아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러 왕국의 왕실은 권력유지를 위해 합종연횡이나 분쟁으로 정치자금이나 전쟁자금이 필요하니 경제사회적으로 걷어들이기에 한계가 생기면서 상인세력과 결탁하게되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출현과 거대한 금융그룹인 유대인그룹 출현의 배경이 된다.

구텐베르크는 그야말로 도박으로 탕진한 재산을 다시 모으기 위한 생각으로 궁리 끝에 타락한 카톨릭의 면죄부(면벌부)를 그리고 나중에는 성경을 보고 돈 벌 기막힌 길을 찾았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우리의 고려말과선과 비교하면서 역사를 음미하여야하지 않겠는가?
유럽 중세 봉건시대와 고려, 조선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이 둘의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특히 한자어 사용국가의 문어는 조선 세종까지는 한자이니 한자를 해독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는데 책을 비싼 돈 들여 대중용으로 만들 필요는 가지지 못한 것 아닌가?출판과 유통이 국가의 독점이라하더라도 책의 배포는 어느 정도 이뤄졌고 부족한 것은 양반 각자가 필사본으로 만들어 사용하였겠다.

더 자세한 고려나 조선의 정치체제나 사회는 대략 알고 계실 것이니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요할 듯.

이런 상황에서 금속활자에 도전한 것은 오히려 지식인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표상 아닌가?

다만 여기서는 다음 글을 추가하면서 단서를 던지고는 물러나는 것이다.

<⒞우리와 유럽의 금속활자인쇄로의 도전 이유>

마지막으로 고려와 조선은 왜 금속활자에 도전하였는가?
지배권력과 지식권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것 말고는 답을 찾기가 어렵다.
고려는 학승들의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자 불교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라는.
조선은 유자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유교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라는.
그러니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만들기를 도전한 것 아닌가?

그러면 구텐베르크의 도전은 무엇때문인가?
우습게도 처음에는 그는 카톨릭의 면죄부를 만들어 돈을 벌다가 곧 바로 마음을 바꾼다.
바로 성경의 대량 인쇄로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카톨릭에 빌붙어 돈을 벌려다가 종교개혁까지 이르게 만든 이 우스운 역사의 전개가 재미있지 않은가?

...to be continued

목차

  1. 정보의 저장고
    가) DNA
    나) 대뇌피질
    다) 문자, 책, 도서관
  2. 뭘 더 알아볼 것인가? (이번 글)
  3. 정보의 저장 방법 - 소리 전달 이후의 글쓰기
    가) 어디에다 글을 썼을까?
    나) 책(冊, book)이란 낱말은 어디서?
    다) 책의 형태는?
  4. 정보의 대량 생산
    가) 인쇄 기술의 발전과 배경
    나) 종이와 인쇄술
  5. 인쇄가 역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 대량생산과 보급 (이번글)
  6. 무엇을 쓰고, 인쇄하나 - 언어와 문자의 구분
  7. 정리된 ‘언어’와 ‘문자’의 구분 기준과 ‘언어’의 외연
  8. 문자성과 문자의 우월성이란 실체인가 허상인가?
  9. 글쓰기와 글읽기가) 흥미있는 서두 열기
    나) 먼저 글쓰기
    a) 서론
    b) 고대 그리스 글쓰기 시작 - 문자의 도입
    c)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글쓰기 - ‘물구나무 쓰기’부터
    d)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글쓰기 - 소몰이 쓰기법
    e) 로마자(라틴 문자)의 시작
    f) 로마자(라틴 문자)의 변화 - 소문자 등의 등장
    g) 로마자(라틴 문자)의 변화 - 오늘날의 글쓰기 시작
    h) 한자문화권의 우종서와 좌횡서
    다) 이어서 글읽기
    a) 글읽기와 관련된 몇 가지 개념
    b) 글읽기와 관련된 몇 가지 관점
    c) 성독과 묵독에 관한 맛보기 글
    d) 글읽기의 대상 – 문자의 종류
    e) 글읽기 – 성독
    f) 한자문화권의 글읽기
    g) 여담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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