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씨의 영화 리뷰 (1) 백종관, <순환하는 밤>

in cyclical •  7 years ago 

스티밋이 처음이라 연습 삼아 한번 올려봅니다.

예전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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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보


제목 : 순환하는 밤 (Cyclical Night)

감독 : 백종관

장르 : 실험

상영시간 : 17분

제작국가 : 한국

제작연도 : 2016년

기타 : 2016년 17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감독상 수상

            2016년 21회 인디포럼 신작전 출품

            2016년 17회 대구단편영화제 경쟁부문 출품



영화 소개


<이빨, 다리, 깃발, 폭탄 (Frequency Resonance, 2012)>, <와이상 (I - image, 2015)> 등을 연출한 백종관 감독의 단편 실험영화. 2016년 17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졍쟁 감독상을 수상하고, 2016년 21회 인디포럼 신작전과 2016년 대구단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한 작품. 감독은 이 독특한 실험 작품에서1960년과 1980년, 1987년, 2015년이라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에서 찍힌 사람들의 사진에서 얼굴 부분만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해 기이한 느낌을 주는 얼굴 이미지에 셰익스피어의 <햄릿>, 단테의 <신곡>,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 데리다와 스티글레르의 <에코그라피>에서 발췌한 문장들을 나레이션 혹은 자막으로 삽입해 이음매를 벗어난 시대,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고뇌하는 유령,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고민하는 인물들의 순환하는 밤의 기록을 보려주려 한다.


한가한씨의 리뷰


<순환하는 밤>은 자막이 이끌어가는 영화다.지금까지의 영화에서 자막은 장면과 장면 사이의 블랙스크린에 존재하면서 무성영화의 대사나 지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고, 화면에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의 압축적 요약을 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영상 내용에 대한 부가정보나 해설의 제시 또는 외국어나 이해하기 힘든 발음 등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만, 즉 영상에 종속된 도구로서만 존재해왔다. 하지만 <순환하는 밤>에서 자막은 감독의 의도에 따라 적절히 배열되면서 이음매를 벗어난 시대,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고뇌하는 유령,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고민하는 인물들의 순환하는 밤의 기록을 보여주는 식으로 사실상 영화 전체를 주도하는 인상이다.<순환하는 밤>의 자막은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 속 주석처럼 인용과 창작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마지막에 역시 자막으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감독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W.G.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 자크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에코그라피』에 등장하는 문장들을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에 배열하여 새로운 플롯을 구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물론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영화에 맞게 변형되고 현대적 감각으로 재창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자막은 이 영화에서 주도적인 위치로 올라섰으니 그야말로 자막의 재발견인 셈이다.자막이 주도적인 위치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영상과 대사의 위치와 역할이 재조정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영상은 자막이 제시하는 메시지에 맞게 적절하게 배치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영상의 변형에 대한 논의는 좀 더 진지하게 검토하기 위해 잠시 미뤄두고 우선은 대사의 역할과 위치 변화에 대해서만 집중해 보기로 하자. 사실상 <순환하는 밤>에서 가장 축소된 장치는 대사인 셈이다. 대사는 영상과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자막에만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관계라는 것도 종속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막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인용될 때 그 대사 부분에서만 나레이션이 흘러나오는데, 이는 마치 ‘이 자막에서 인용된 것은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희곡’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역시 유령이나 햄릿의 대사를 굳이 구분하려는 의도도 없으며 감정선 따위를 살리려고도 않고, 한 사람의 동일한 톤으로 그저 차분히 낭독되는 정도일 뿐이다. 이렇듯 대사는 최대한 절제되어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 하지만 간혹 강조하려는 문장을 재차 말하기도 하고 냉정함을 잃고 더듬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마치 세상에 철저한 객관은 없다는 듯이.

<순환하는 밤>은 또한 '얼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영화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등장한다. 영상은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얼굴들, 그 얼굴들을 확대한 이미지, 의도적으로 변형되거나 윤곽이 지워진 듯 한 얼굴의 이미지, 그 지워진 이미지가 또 다른 얼굴로 대체되어 수많은 얼굴들로 재생산되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이 얼굴 이미지들은 자막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내용에 따라 보조를 맞춰 제시되는데, 이런 점에서 <순환하는 밤>의 영상은 자막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보조적인 위치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영상 속 얼굴 이미지의 변화는 정확하게 자막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영상이 독자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것은 자막이 담아내지 못하는 정보의 계열이 영상의 얼굴 이미지 속에서 전달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자막에서 드러나는 ‘1960’, ‘1980’, ‘1987’, ‘2015’의 의미를 우리는 이미 영상의 사진 이미지 속에서 선취할 수 있다. ‘1960’은 4·19혁명이 일어난 해이고, ‘1980’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로 맞이하게 된 '민주화의 봄' 시기이며, ‘1987’은 6·10 민주항쟁의 해이고, ‘2015’는 이른바 박근혜 정권의 ‘복면금지법’에 반대해 전국적으로 ‘가면 시위’가 일어났던 해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주요한 국면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민중들의 민주화 투쟁의 현장이며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서 찍힌 사진 속 얼굴 이미지의 영상을 통해 자막에서 추상적이고 객관적으로 제시되었던 거대 담론들이 구체적이고 주관적이며 실제적인 미시 담론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유령’이나 ‘기억’, ‘궤도를 벗어난 시대’나 ‘기록’, ‘순환’ 따위의 추상적 용어가 죽은 것이 아닌 살아 꿈틀거리는 것으로 의미와 생동감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후에서야 우리는, 이 영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이 보내는 짧지만 강한 메시지에 감응하고 전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활동을 멈추고 정지된 순간들이 마침내 동력을 얻어 움직이게 되는 순간의 그 짜릿한 흥분과 뭉클한 감동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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