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죽이는 꿈을 꿔본 적 없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억압이 심한 성격일 수 있다.
꿈은 무의식의 욕구를 보여주는 장치.
살아가는 동안 죽이고 싶도록 미운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그는 <죽음> 장면을 순화시켜
전혀 다른 꿈 장면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이 크다.
A씨는 죽이는 꿈이 아니라 자신이 죽는 꿈을 꾸는 편이다.
마음 깊은 곳의 공격성이 자신을 향하는 성격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해의 위험이 있는지
또는
자신에게 불리한 선택을 반복하며 살아가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던 어느날 A씨가 드디어 죽이는 꿈을 꾼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니요. 모습은 보이지 않아요.
저는 아버지를 해부하고서야 장례를 치르겠다고 선언했어요.
아버지 친구라고 하는 노인이 조문을 왔어요.
돈다발을 내놓으며, 해부를 포기하고 장례를 치르면
이 돈을 주겠대요.
저는 돈뭉치를 보고 맹렬한 흥분을 느낀 것 같아요.
흥분을 참으며 거절하죠.
하얀 지폐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저는 그 장면을 좀 애잔한 기분으로 바라봅니다.
A씨는 당시 경제적으로 몹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고 한다.
아주 온건한 방식으로 A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얻어질
유산과 조의금에 대한 욕망을 꿈으로 만난 셈이다.
무의식의 욕망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다.
합리적이지도 지성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
배고프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먹어야 하고
섹스를 못하면 아무나 덮치고 싶고
화가 나면 살인도 불사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무의식이다.
흔히 이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에 대해
"눈이 뒤집혀서"
혹은
"이성을 잃고"
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A씨의 꿈은 아버지를 간접적으로 죽이는 꿈이었지만
A씨의 진짜 욕망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현실의 불편을 타개하는 것이었다.
좀 더 분노에 차 있는 사람이라면
좀 더 공격적이고 과격한 방식으로
꿈 장면에 시체를 등장시키거나
상대를 폭행하는 장면을 통해
무의식적 공격성을 해소할 것이다.
꿈에 누군가가 죽었다고 해서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차마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욕구가
꿈 장면을 통해 해소되어야
우리는 지성적이고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현실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