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는 중국이 스탈린에게 북한에 대한 기득권을 양보한 듯한 언급을 한다.
“마오쩌둥과의 회담에서 소련이 중요한 양보를 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손실을 보완하기 위해 소련은 태평양 진출을 위한 항구와 부동항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스탈린은 조선을 자신의 세력범위 안에 포함시키기로 결심했다”(368)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미 북한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을 자신의 세력범위안에 포함시키고 말고할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1950년 초부터 한국전쟁끼지 스탈린과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가 하는 문제는 스탈린이 어떻게 세계전략을 구상하고 수행했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이 모스크바에 와서 한반도 전쟁에 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협의하자고 평양에 통보했다.
한편 스탈린은 북한과 논의한 문제를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중이었던 마오쩌뚱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고 션즈화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이 마오쩌둥의 대화는 철저하게 비밀로 이루어졌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간 마지막 단독회담의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관해 서로 의견을 나누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성급하다.
스탈린이 마지막 순간에 북한에게 마오쩌뚱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한 것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는 아시아 혁명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과 서로 연계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쟁 중에 모택동이 스탈린의 지도를 수용한 것은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국의 주도적 역할이라는 당근을 포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한편 김일성은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5월 12일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하기로 결정했지만 중국의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결과를 설명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마오쩌뚱을 만나고 싶지 않았으며, 스탈린에게 ‘자신의 모든 요구가 모스크바에서 충족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다시는 중국의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전달했다.’(368, 주 43. 쉬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보. АВПРФ, ф.059а, оп.5а, п.11, д.3. лл.100-103)
한편, 50년 5월 13일 베이징에서 북한과 중국의 회담은 순조롭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으로부터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을 들었으나 이는 자신들이 과거에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과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13일 23시 30분 조우언라이가 소련대사관에 와서 김일성이 통보한 내용에 대한 스탈린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369, 주44, 로쉰이 모스크바에 보낸 전보, 1950년 5월 13일, 심지화편 조선전쟁해밀문건 p.383)
스탈린은 5월 14일 중국에 다음과 같이 회신을 했다.
“조선동지와의 회담에서 스탈린동지와 그의 동료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고려해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조선인들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반드시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하며, 만약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다시 토론해야 한다”(369, 주 45,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0년 5월 14일, АПРФ, ф.45, оп.1, д.331. л.55)
스탈린의 답변에 대한 마오쩌뚱의 대응은 매우 미온적이다. 마오쩌뚱은 스탈린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유감을 표한다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의 견해에 찬성을 표했다. 여기서 중국이 조중조약의 체결을 통일후로 미루겠다는 정도로만 답변했다. 션즈화는 조중조약의 체결을 미루자고 제안 한 것이 마오쩌뚱의 불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지만 그 설명이 타당한지는 불확실하다.
한편 5월 15일 김일성과 마오쩌뚱의 회담내용은 당시 소련과 중국간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마오쩌뚱은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후 조선이 남쪽을 공격하면 중국이 조선에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이 현재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으면, 이것 또한 중국과 조선의 공동과제이기 때문에 이 결정에 동의하면서 필요한 지원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마오쩌뚱은 만약 미국이 참전하면 중국도 곧 부대를 파견해 조선을 지원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변경지역으로 일부 중국군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는지 또는 무기와 탄약의 지원이 필요한 것인가를 물었다.”(370, 주 47, Goncharov, Lewis and Xue, Uncertain Partner, p.145)”
김일성은 마오쩌뚱의 제안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마오쩌뚱이 김일성에게 언급한 내용중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후 조선이 남쪽을 공격하면 중국이 조선에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점이다. 무엇을 우선순서로 삼는가하는 것은 중요하다. 중국이 당황한 것은 한국전쟁을 개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아시아에서의 과업 우선순서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중국은 소련에게 대만을 먼저 점령하는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고, 스탈린은 그에 대해 확답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김일성을 통해 한국전쟁을 먼저 수행하겠다는 결정을 통보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스탈린이 한반도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겠다고 판단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대만을 점령하려면 소련의 대규모 공군과 해군지원이 필수적이었고, 이는 미국과 소련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소련이 직접 개입하지 않을 수 있는 한국전쟁을 우선시한 것은 스탈린에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다.
5월 15일 마오쩌뚱과 김일성의 대화에서, 마오쩌뚱이 미국이 참전하면 중국도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당시 마오쩌뚱과 스탈린은 이미 미국개입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하게 협의를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전쟁개입 결정이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 내려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1950년 10월 중반이후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문제로 스탈린과 미묘한 갈등을 빗은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김일성이 마오쩌뚱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뚱간에 대만문제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해결문제로 서로 의견교환을 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만문제를 먼저 해결하겠다는 중국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던 김일성이 중국에게 호의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조선이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한 상황에서, 혁명성공 후 즉각적인 조선의 통일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마오쩌뚱의 태도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370)
결국 1950년 1월부터 1950년 5월 15일까지 스탈린과 마오쩌뚱 그리고 김일성이 서로 논의한 것은 아시아 혁명의 우선순서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