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문, 세상 읽기 - 종말론과 미륵불 사이에서

in hankyorae •  7 years ago 

이번에도 원문의 반 이하로 줄일 수 밖에 없었기에 원문을 블로그에 올려봅니다.

생각을 정리할 좋은 기회를 주신, ANU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의 백연재 선생님과 Tessa Moris-suzuki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http://chl.anu.edu.au/news-events/events/904/living-politics-self-help-and-autonomous-action-east-asia-and-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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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캔버라의 국립호주대학교에서 ‘삶의 정치학: 동아시아와 그너머의 자조와 자치를 위한 시민행동’이라는 제목의 작은 회의가 열렸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몽고와 호주, 영국을 망라하는 동아시아와 그밖의 지역의 시민, 공동체 활동가와 현장중심의 연구자들이 모여 “트럼프, 아베, 시진핑의 시대에 우리 시민들 삶 속의 진짜 정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는 자리였다. 한국, 중국, 일본의 다양한 공동체 살이와 시민 활동을 경험해 보고, 중국에서는 상하이 교외의 농촌지역에서, 중국인,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농장, 대안학교 공동체를 만들어 보는 실험에 참여해 본 덕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됐다. 주최측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시민 공동체를 비교하는 큰그림을 그려줄 수 있냐는 요청을 받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거친 그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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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9개월간 난생 처음 시골살이와 자급자족 생활을 ‘찐하게’ 경험하게 해준, 일종의 기숙형 귀농학교인 일본 도치기현 비전화공방의 후지무라 선생은 일본에 대해서 불평할 때마다, “이 나라는 글러먹었어”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체력과 시간과 친구는 있지만, 돈이 없는 젊은이와 여성들이 지역에서 지속가능하면서도 자립할 수 있는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는 기술에 대해 연구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생태주택, 스스로 먹을 정도의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유기농 기술 등. 요는 이미 폐색상황에 처한 국가 제도로서의 일본은 희망이 없고, 불가불 환경과 경제 시스템 등이 파탄에 처할 것이니, 풀뿌리 대안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쿠마모토의 아소산에 30년전부터 유기농 차밭을 만들어서 가족과 함께 운영하는 마사키 선생은 아예 농장의 수원지가 있고 이미 아무도 살지 않는 윗마을을 사들여, 공동체와 피난처를 만들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나비문명’이라는 책이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한국의 생태운동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그는, 이 마을에서 2016년 가을 동아시아 평화 시민회의를 열어 200여명이 넘는 한중일의 활동가들을 초청하여 동아시아 각지에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 연대할 것을 제안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판 노아의 방주 네트워크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들의 종말론적이고 아나키적인 미래는 역시 이분들과 동세대인 70대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미래소년 코난’을 보고 자라온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을뿐더러, 후쿠시마 사태라는 돌이킬 수 없는 의사 종말 체험과 난민의 경험을 통해 당시 도쿄에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다가 활동가로 경력을 전환하게 된 내게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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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에서 돌아와 하자센터라는 ‘도시 마을’에 한동안 머물렀는데 ‘다시, 마을이다‘의 저자이며 이곳의 촌장을 자처하는 조한혜정 선생은 재작년부터 ‘촛불혁명’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시민들의 참여와 상상력이 근대국민 국가를 완성하고 다시 한단계 진화시킬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실은 제도와 국가를 무척이나 거북스러워하는 태생적 자유주의자인 그가 하자센터의 다른 이름인 서울시립청소년 직업체험센터를 운영하기 위해 영리하게 국가의 자원을 사용해왔던 것이나, 후기 근대의 일상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청년들을 위해 국가가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국인들은 밑으로부터 재창조되는 마을살이를 구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근대적 제도인 국가를 바꾸어 나갈 것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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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에 중국으로 건너와서 네트워킹을 하게 된, '100년의 급진'의 저자 원테쥔 선생은 2000년대 초반부터, 공동체와 삶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중국의 지식인, 대학생, 농민, 시민들과 함께 신향촌건설운동이라는 풀뿌리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그는 진한제국 이래 2천년 넘게 유지되어 온 중화문명이 정의하는 ‘국가' 시스템은, 다분히 현재의 공산당 정권을 떠올리게 하는 상부의 중앙집권체제와 하부의 향촌자치가 ‘천의무봉’으로 연결됨으로써 서구와는 다른 지속가능하고 안정된 체제를 유지해 왔다고 역설한다. 이런 그의 시각은, 과거 후진타오나 원자바오와 브레인스토밍을 벌이며 현대 중국의 ‘신농촌 건설’, ‘향촌진흥’정책을 설계 했다는 정책입안가로서의 그의 배경을 생각하면 무리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농장 공동체에 참여했던 중국의 귀농인 친구가 “우리는 국가라는 아버지 품에 안긴 간난아이 같은 존재야. 우리가 아무리 고개를 젖혀 등뒤의 세상을 보고 싶어도, 아버지가 몸을 돌리는 순간, 정반대 방향을 볼 수 밖에 없지”라며 한계를 인정하고, 국가와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며 지혜롭게 활동을 해나가야 한다는 충고를 던지던 것이나, 항저우 근교의 농촌 마을에서 또다른 공동체를 꿈꾸는 중국인 친구가 “중국을 안정되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전통 사상의 진흥을 꾀하는 시진핑은 미륵불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몰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자녀를 유학보내고, 따라서 이민을 갈수 있을까하는 궁리에만 열중이던 대부분의 중간소득 계층 중국인 친구들 외의 상당수는 일당 독재 국가와 그를 지탱하는 엘리트 시스템의 존재를 압도적인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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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촛불혁명의 위대함과 이어지는 metoo운동의 일상적 혁명성에 대해 가슴을 펴고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패배주의에 빠진 일본 친구들이나, 숙명론에 경도된 중국 친구들에게 한수 가르쳐 주고 싶어질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그랬다. “남한이 세계에 민주주의를 한수 가르쳐줬다’라는 박근혜 탄핵 직후 한 외신의 헤드라인은 20세기로 정치 참여와 언론의 자유를 후퇴시키는 ‘시황제'의 나라에 사는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런데, 이번 회의가 끝날 무렵에 내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지형적인 혜택으로 후쿠시마현에 있지만 실제로는 방사능 오염의 피해를 덜 입은 덕에, 다시 건강한 유기농 먹거리를 생산하고, 토쿄와 같은 대도시의 환경에 비하면, 여전히 아이들이 더 건강하게 뛰어 놀 수 있는 자연을 되살려낸 토와 마을의 사례를 들었을 때, 또, 중국과 같은 공산당 일당독재국가에 가부장적 유교질서가 가정내의 위계를 만들어 내는 베트남의 LGBT운동이 국가와 충돌을 피하면서 풀뿌리 조직을 유연하게 묶어준 NGO조직의 영리한 전략 덕에 한국, 일본 못지 않게 진전되고 있음을 들었을 때, 자기가 살아가는 체제와 장소를 선택할 자유가 없는 이들에게, 삶의 정치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남들이 가르쳐 주려 들거나, 스스로의 이익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천천히 찾아서 배우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것. 그렇게 우리는 이웃한 벗으로 서로 배우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아래 링크는 한겨레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8603.html?_fr=mt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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