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지역에 이슬람근본주의가 창궐하게 된 것은 1979년이후 발생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합법적 요청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군했다. 미국은 소련군의 합법적인 아프가니스탄 진입을 침공이라고 규정하고 이슬람세계를 동원하여 소련과 전쟁을 벌렸다. 약 10년 간의 전쟁은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중의 하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미국은 이슬람주의를 이용하여 소련을 패배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거꾸로 중동의 역사적 방향을 전혀 다른 쪽으로 밀어낸 것이 아닌가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이슬람 근본주의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중동정치에 영향을 미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를 보면 마치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많은 부분 테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일단 그런 불편함을 배제하고 왜 이슬람권이 이슬람근본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가를 좀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당장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하마스도 이슬람 근본주의의 일파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근본주의가 중동과 아랍의 현실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 중동과 아랍은 아랍민족주의가 대세였다. 오스만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마자 아랍과 중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랍과 중동이 선택한 길은 아랍민족주의였다. 당연히 사회주의의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아랍민족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런 면에서 아랍민족주의는 일종의 부흥민족주의의 사상적 기조속에 있다고 하겠다. 아랍민족주의를 통해서 아랍인들의 정체성을 찾겠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나세르와 가다피 같은 사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케말파샤도 사회주의적 영향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부흥민족주의적 범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아랍민족주의는 대부분 세속주의적이었고 사상적 기조는 서구에 기인하고 있었다. 아랍민족주의는 일종의 서구주의적 시도였던 것이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아랍민족주의 운동은 실패했다. 나세르는 죽었고 그 뒤를 이은 사다트는 변절이후에 암살당했고, 카다피도 죽음을 맞이했다. 그 이후 아랍의 봄은 크게 보면 아랍민족주의가 붕괴되는 과정이었다. 아랍민족주의 운동은 실패했고 그 실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 것은 미국과 서방이었다. 문제는 아랍민족주의가 붕괴된 이후 아랍과 중동지역에서 새로운 사상적 기조로 등장한 것이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것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출발점은 1920년대 이집트에서 출발한 이슬람 형제단이라고 한다. 소련과 싸운 무자헤딘은 이슬람 근본주의로 무장한 전사였다. 그들은 아랍민족주의가 세력을 상실하면서 점차 실질적인 이슬람 세계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아랍민족주의가 서구에서 벗어나기 위한 서구적 시도였다면, 이슬람근본주의는 서구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성가진 좌파적 아랍민족주의를 붕괴시키면서 오히려 상대하기 어려운 이슬람 근본주의를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같은 사람은 원래는 서구주의적 성향이 짙었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이 커지면서 스스로 이슬람주의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슬람세계는 서구적 역사경로에서 방향을 찾기 보다는 자신들의 과거역사에서 갈길을 찾으려는 것 아닌가 한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이후 중동과 아랍의 역사진행은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은 전아랍과 이슬람세계가 그들이 앞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야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져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미국과 서구는 이스라엘의 반인륜적 가자지역 폭격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힘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세력확대는 이란의 발언권 강화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가자사태를 논의하기위해 아랍과 이슬람 국가 정상들이 모여 논의를 하고 있지만 그중에 리더역할을 하는 나라는 이란이다. 이번 사태로 아라비아 지역의 왕정국가들은 매우 곤혹스런 상황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아라비아를 위시한 왕정국가들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그동안 그들은 자신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해왔다. 현재 그들은 미국에 자신들의 안전을 의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에 맞서서 전쟁을 할수도 없다. 자국내 이슬람 근본주의의 세력이 점차 더 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기울면 자국내 이슬람근본주의에 의해 왕정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면 당장 취약한 왕정을 유지하기도 어렵고 결과적으로 이슬람근본주의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하마스의 공격으로 인해 아라비아의 왕정국가들이 가장 심각한 곤경에 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아랍지역의 왕정도 유지되기는 쉽지 않을 가능성도 많다.
그렇게 보면 아랍과 중동상황을 지금처럼 만들어 버린 것은 미국의 대 아랍 및 중동정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당장 눈에 거슬린다고 아랍민족주의를 무력화시켰지만 그 자리를 이슬람근본주의가 파고 들게 만든 것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반서구주의자다. 형식적으로는 종교적인 이념이 앞에 나와 있지만 그 뒤의 배경에는 서구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깔려 있는 것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근본주의와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는 묘하게도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아랍과 중동지역은 서구적 역사경로를 걷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미국도 자신들이 한 정책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지는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