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태어나고 자라서 사회에 나가기까지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럼 몇살까지 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일까?
아영(김향기)은 아동학과 졸업반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청바지에 티셔츠를 주로 입는 아영은 다 큰 어른보다는 아직 보호가 더 필요한 아이처럼 보인다.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탓으로 생활력이 강해도 아직은 어른들의 관심과 도움이 있어야 한다. 영채(류현경)는 술집에서 일하고 욕을 달고 사는 어른이지만 책임감과 생활력은 옆에서 챙겨줘야 하는 아이와 다를게 없다. 이 두 사람이 진짜 아기 혁이를 키우게 된다. 아직 덜 자란 어른들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물론 쉽지 않다. 영화 <아이>는 이 두 사람이 헤쳐나아가야 하는 가시밭길을 영화의 초반부터 기꺼이 보여준다.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스토리를 채워 나간다. 달리 말하자면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미혼모 문제, 아동 매매 현상, 취약 청소년 사회지원의 허점 등을 꼬집지만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이런 불편한 사실들은 사회 고발용으로도 부족하다.
처음 부터 아이에 대한 책임감은 아영에게만 있었으며 끝날때까지 그 책임감은 영채에게 전이되지 않는다. 영채가 팔아넘겼던 혁이를 되찾았을 때 눈물흘린 것은 친모로서의 모성애 때문이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양육 의무와 책임감으로서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눈물로서 아이를 버린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 처럼 보인다. 아영이 아동매매 브로커의 집에 숨어들어 갔을 떄 또한 그러하다. 브로커는 흔히조폭사무소의 깡패를 상상하기 쉽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중년 여성이고, 집에는 병든 노모를 돌보고 있다. 브로커 역시 취약계층으로 아이를 사고 파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가 아영에게 손쉽게 아이를 넘겨주는 행위 또한 아영과 영채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비춰져 이 영화에서 아이를 버린 행위의 화살은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는다.
이처럼 영화는 이 잘못된 사회가 개인들이 아이를 버릴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아이같이 행동하는 친모의 도의적인 책임감은 슬며시 뒤로 빠진다. 결국 아영이 영채를 설득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그 또한 편의적이고 작위적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영화에서 노래방 장면은 더는 안봤으면 좋겠다. 어떠한 위기와 갈등이 있어도 노래방가서 함께 노래를 부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트콤이나 삼류 드라마의 스토리 전개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영의 시선이 아닌 영채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었으면 이 영화가 말하는 메세지가 조금은 다르게 보여졌을까? 아쉬움은 있곘지만 그래도 그 편이 좋을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