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EYE is single eye
신약성경 마태복음6:22-23에 나오는 성경 말씀이 바로 Whole body(온 몸)과 하나의 눈에 대해서 나오지만, 개신교를 포함해서 기독교에서의 해석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고 내가 이 내용을 바로 알기까지는 -성경을 읽으면서 살아온-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이 시점에서 알게 되었다. 이유는 번역된 한글 성경 버전만 대하다보니 이런 무지의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내가 어제(11월07일 오전)도 현직 후배 목사님들을 만난 것은 나의 졸저 한권과 시집을 전해주려고 해서 만난 것이지만, 만난 김에 서로 대화를 하면서 일방적 내 발언은 우리가 간과하고 모르고 지나온 성경 속에서 몰랐던 문제라고 하면서 꺼낸 부분이 원죄부분에 해당하는 “Sin 죄” 라는 단어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했다.
첫 째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이 부분에서 “죄”라는 단어는 원죄 “Sin”이 아니라 “debt”로 나온다.
그때서야 두 분 목사님들은 검색해보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 소위 말하는 탕감법칙 마태복음18:23부터 나오는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질문 중,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라고 물었던 것은 아마도 이미 베드로와 제자들이 용서에 대해서 가르침을 어느 정도 받은 후에 궁금해서 하게 된 질문 일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의 질문 중에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고 묻는 때 “죄Sin”으로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바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debt부채”이야기를 꺼내서 소위 일만 달란트 대 일백 데나리온의 가치 비교 이야기를 하시면서.. 부채 탕감이야기로 베드로의 질문-죄 문제-에 대답을 대신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나쁜 짓은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비유컨대 죄가 아니라 잘못error 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실수 같은 잘못이 살면서 쌓이고 쌓이게 되면 그리고 한 몫에 저지르는 잘못은 커다란 원인이 되어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주의 창조 법칙상 기록을 남기게 되고 거울 법칙에 따라서 다만 시간차가 있을 뿐 나를 향해 되돌아온다는 것이 진리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우주법칙 아니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을 이해하고 공부한 사람은 결단코 자신의 원인으로 이웃이 해코지를 당하게 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신의 인격관리를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단히 잘못된 사회과학의 오류 속에 자신의 정신 mental속에 저장한 지적인 오류를 잘못으로 여기지 않고 그 알량한 사상적 오류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나라의 경제마저 망가지게 하고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대는 무리들이 권력집단이 되어서 하는 짓을 보면 집단적인 “카르마”는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인 카르마를 어떻게든 두고두고 아마도 여러 생을 반복 하면서까지 해결을 해야 하는 고통을 되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면 눈뜬 사람으로서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앞에 “카르마”라는 단어는 별거 아니다.
내가 자행한 원인에 해당하는 결과가 찾아오는 법칙에 관한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심었든지 집단적으로 함께 저질렀든지 모든 것이 원인을 만들고 결과가 찾아오는 법칙에 대해서 도대체 생각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카르마 청산은 부채 청산과 같은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행보는 청산해야 할 산더미 같은 부채를 만들지 않고 과거의 것일망정 안고 살아온 부채마저 깨끗이 청산하는 여정으로 자기 인생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르치심이 탕감의 법칙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지혜의 법문이시다.
여기서 나의 시 한편을 삽입해 봅니다.
제목 : 아침을 보려
뜬 눈 없이 두 눈으로
어둠을 걸었소이다.
짊어진 무게 탓이라
하지 마라
두 눈 보다 한 눈
뜨고 보는 세상이었다면
달빛을 기댄 선 밤이
밤은 아니었을 것이야
나는 그 날들을
헤아리며
아침을 보려했지
요셉의 꿈처럼
기다린 그 아침을
함께 하려고..
우리가 어두운 밤길처럼 인생길이 어둡기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의 눈으로 통일된 시각을 갖지 못하고 언제나 치우친 시각으로 세상사를 삐틀어지게 보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글머리에서 꺼낸 말을 이제 본격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육체의 두 눈만이 사람의 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앞에 말한 “whole body” 번역하면 온몸, 혹은 전체의 몸,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요! 우리 사람의 몸이 여러 개가 동시에 한 몸체 안에 존재한다는 정도로 이해를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보다 한 수준 위에 감정체(astral body)가 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몸체 정신체 라고 할 수 있는 mental body가 있고, 맨 위에 정체성체(identity body)가 있습니다.
이러한 몸체들은 각각이 다 자신의 역할을 하는데 그 중에 눈과 관련하여서만 이야기를 합니다. 육체의 눈 위의 감정의 눈, 그 위에 정신적인 눈, 정체성의 눈 등 각각의 눈들은 결코 통일 되지 못하고 각각의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과 각각의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조금 범위를 넓혀보면,
눈들이 각각이지만, 이 눈들이 서로 따로 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에서 보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정신체가 구성되고 정신체는 또한 그 정신체가 가진 구성 요소를 따라서 감정체의 눈을 만들어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니까, 앞의 표현에서 예컨대 각각의 눈들이 통일되지 못하고 보고 있다는 이라는 말은 약간 수정되어야 할 표현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원인체”에 해당하는 “진아 혹은 참나”의 눈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도 진아 로서의 원인체가 가지고 있는 그 눈이 멀어 있어서 왜곡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결론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들의 눈이 각각 존재하지만, 그 눈들이 “원인체” 라고 말하는 그 영적인 존재의 눈으로 단일한 눈이 되어서 육체에서까지 오감이 열려야 한다는 말이지만, 이 말조차 매우 이해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 육체의 눈은 언제나 감정에 지배 받으면서 볼 뿐이지 육체의 오감의 눈 단독으로 세상사를 읽어내지 못합니다. 마찬 가지로 나의 감정의 눈은 또 한 정신적인 사상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읽고 보고 할뿐입니다.
성경이나 모든 종교적 전통이 있는 경서들이 말해주는 신령스런 지혜의 단일한 눈, 그것이 하나의 눈 single eye이라고 하지만, 지혜의 단일한 눈을 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는 누구나 어둠속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눈을 나의 눈으로 만들 것인가?
이문제의 답을 얻기까지 몇 생을 반복하더라도 열어야만 하는 눈이라는 것을 우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나 고타마 붓다님은 이미 인간 세상에 다 말씀을 해 주셨지만, 내려오는 가르침들이 전부 종교에 매몰시키고 그 종교의 시스템이 커지고 그리고 그것을 운영하는데 전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 합니다.
그러니까
살고 싶고 눈을 뜨고 싶거든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성에서 탈출하듯이 산위에 있는 동네 곧 높은 나의 산성으로 도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곳은 하나의 상징으로써 나의 피안의 피난처일 수도 있고 외로운 길 고독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절대 고독이라는 가슴의 화두 하나를 붙잡고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개인이 되어야 할 각오가 있다면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 합니다. 종교적인 집단속의 내맡김에서 도망치듯이 나오면 분명 혼자 올라야 할 산이 내 앞에 펼쳐집니다.
그곳에는
올라오라고 손짓 하시는 예수님 붓다 등 당신의 스승들이 다 준비해 놓으시고 종교가 아닌 아주 자유로운 여행길의 동행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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