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난한 영화다. 기승전결은 확실하고 캐릭터들의 매력도 잘 살아있다. <배댓슈>나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특정 지점서 나사가 크게 빠진 영화들인데 비해, <원더우먼>은 착실히 스토리를 쌓아서 적절하게 터뜨리고 어찌어찌 결말을 맺는다. 히어로를 우겨넣으며 얼기설기 저스티스리그를 엮어가던 DCFU(DC 필름즈... 왜 이름을 이따구로) 입장에서, 원더우먼의 성공은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시리즈 전체로도 대성공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단도직입으로 말해서, 이 영화가 로튼 토마토 92점을 마크하며 <다크나이트>와 <로건>을 능가하는 평가를 받을 수준인가? <원더우먼>은 괜찮은 영화지만, <다크 나이트>나 <원터 솔져>처럼 히어로물의 격을 한 단계 올린 수준의 작품은 아니다. 이전 영화들과의 대비, 페미니즘 섞인 시선, 마블의 전형성에 익숙해진 팬덤 등 많은 영화 외적 요소들이 이 영화를 더 좋게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 영화는 확실히 과대평가가 되었다.
긍정적인 부분이 확실히, 많이 존재한다. <원더우먼>은 요즘 히어로 영화와 확실히 다르다. 전개는 느리고 캐릭터에 대한 입체적 해석도 없다. 그런 시도를 포기한 대신 영화는 러닝타임의 8할 이상을 원더우먼에 오롯이 할애하며 그녀의 성장기를 탄탄하게 그려낸다. 관객은 그 친절한 설명을 통해 원더우먼에게 확실히 몰입할 수 있다. 감독의 전폭적 지원 아래, 주인공인 원더우먼은 영화 내내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스토리는 느리지만 디테일은 확실하다. 겉핥기식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스티브 트레버와의 로맨스도, PTSD로 고통받는 동료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씬도 확실히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사랑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사랑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고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다. 사랑을 통해 빌런만 안잡았어도 좋았을텐데. 액션의 양은 이전 DCFU 작품들에 비해 줄었지만, 스토리의 전개와 디테일은 월등하다. DCFU에게 필요한 게 이런거 아니었나?
숙명을 품고 태어난 소녀는 세상과 부딪히며 좌절을 겪지만, 이를 극복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히어로가 된다. 이 전형적인 스토리가 원더우먼과 결합하면서 그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 대폭발했다. 그녀가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은 때로는 귀엽게, 때로는 냉정하게 묘사된다. 처음 발을 내딛은 런던은 무채색으로 가득하다. 이는 그녀가 성장한 데미스키라의 환경과 대비되며, 현실세계가 그녀의 상상과 크게 다름을 보여준다.
그녀의 행동을 막는 것은 악이 아닌 남녀차별과 군국주의가 팽배한 세계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녀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세상을 구원한다. 전투가 한창인 무인지대, 트레버의 반대에도 그녀는 두려움없이 전장에 들어선다. ‘어떠한 인간(man)도 갈 수 없다‘는 무인지대였지만, 그녀(woman)는 여성이었기에 그 한계를 깨부술 수 있다. 단어의 해석을 비틀어 남성우월주의를 대놓고 깨버렸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페미니즘적 시각을 부여하면서도 남성을 깎아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더우먼의 파트너인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은 그녀를 현실로 인도한 안내자이자, 그녀에게 사명감을 일깨워준 매개체다. 영화의 비중이 원더우먼에게 크게 기울어져있지만, 트레버는 한정된 분량 안에서도 뚜렷하게 빛난다. 남성과 여성이 대등하게 그려지니 <원더우먼> 속 페미니즘도 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자연스레 편향된 남성 우월적 시각에 분노하고, 그에 맞서 활약하는 원더우먼의 모습에서 쾌감을 느낀다.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깔끔한 전개, 1차 세계대전의 전투와 어우러진 액션 등 모든 측면에서 <원더우먼>은 잘 만들어진 영화다. 중반까지는 말이지. 탄탄히 쌓아올린 토대를 바탕으로 절정부에서 펑 터뜨려야했을 영화는 쓰레기같은 빌런과 쌈마이스러운 액션, 오글거리는 대사와 연출로 이전의 장점을 스스로 폐기해버린다. 페이크 보스였던 루덴도르프와의 전투야 그럴 수 있다쳐도, 최종 보스인 아레스를 그따구로 활용하는 것은 너무한 거 아냐?
DCFU 빌런은 조드 빼고 죄다 별로였지만, 그 중 아레스는 가히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정체를 암시하는 복선은 부족하며, 그가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액션이라도 화려했으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그것도 아니다. 둔탁하고 단조로운 액션은 어떠한 쾌감도 선사하지 못한다. 잭 스나이더 마냥 도시 한복판에서 전투를 벌이게 했으면 파괴적인 장면이라도 나왔을텐데, 하필 비행장이라 그런 것도 부족하다. 특히 액션씬을 마무리 지은 원더우먼의 결정타 연출은....ㅎㅏㅜㅜ
<원더우먼>의 고전적 연출은 캐릭터를 만드는데 효과적이었으나, 액션씬에서는 조금 속도감 있는 연출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중반 액션 시퀀스는 원더우먼의 특색도 살려내면서 파괴적인 맛도 있었는데, 왜 하필 클라이막스 액션씬을 이따구로 뽑은거여..ㅜㅜ 전쟁의 신으로 알았던 아레스가 알고보니 진실의 신이었다는 설정은 참신하다.(이를 통해 아레스가 죽었음에도 인류는 끝없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그 외의 연출, 설정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신들의 대결인데 전투 방식은 왜그러고 연출은 왜그리 싸구려냐고... 처참한 퀄리티의 최종 결투를 보며 ‘이번엔 다르다’며 두근댔던 마음도 차갑게 식는다. 영화의 일부가 별로라기엔, 히어로 영화인데 액션이 별로면 좀 타격이 크지 않나... 데이비드 슐리스라는 명배우가 아까울 뿐이다.
용두사미식 전개 덕에 남은거라곤 원더우먼 캐릭터 밖에 없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DCFU에게는 최고의 수확이겠지만, 드디어 DCFU에서 <맨 오브 스틸> 이후 영화다운 영화가 나오나 기대했던 내 입장서는 아쉬움이 크다. 오랜만에 본 고전적 스타일의 히어로 영화는 반가웠지만, 그 반가움도 변화가 없다면 금새 식상해질거다. 기본은 확실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좋은 영화지만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지는 못했다. 이 정도 영화에 함박웃음을 지을 DCFU의 상황이 웃플 뿐.
생각해보면 과대평가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DCFU의 연타석 폭망을 제대로 끊어줬고, 여성 히어로 영화로도 처음 대성공을 거둔 작품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 유니버스인 MCU에서 <원더우먼>급 작품을 꼽을라면 10개는 넘게 꼽을 수 있다. 공들여 만들어진 원더우먼의 캐릭터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DC는 그런 캐릭터를 들고도 대차게 말아먹을 수 있다는 것을 <배댓슈>에서 증명한 바 있다. 격차가 줄긴 했지만 아직도 갈길은 멀다. 언제쯤 DC는 DCFU판 <윈터 솔저>를 찍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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