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판소리다. 내용이 무난하고, 미장센이 아름다워도 <도리화가>의 결정적인 한 방은 여주인공의 '판소리'에서 나온다. 진채선의 소리가 얼마나 좋았으면 당시 금녀의 영역에서 소리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 궁금증을 해소해주기 위해서는 여주인공의 판소리가 영화를 사로잡을 수 있어야 했다. 배수지의 판소리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뱃심을 보여준다며 소리를 질러도 실제 여류판소리꾼보다는 약해보이고, 감정을 담아 소리를 낸다고는 하는데 그 감정선을 느낄 수 없다. 촘촘함은 없어도, 도리화가는 무리수를 타지 않고 나름의 스토리를 잘 쌓아나갔다. 그런데 그 스토리의 절정부에 터져야할 '판소리'가 너무 약하다. 그녀의 소리는 영화 스토리를 이끄는 설득력이 없다.
여류 소리꾼이라는 점에서 <도리화가>랑 가장 많이 비교되는 것은 <서편제>다. <서편제>는 기본에 충실했다. 여주인공이던 오정해는 <서편제> 출연 전까지 꾸준히 판소리를 배워온 사람이며, 그의 스승은 유명한 명창이던 김소희다. 1년을 노력했다는 수지와 배움의 깊이가 다르다. 그런 그녀조차도 만족하지 못했는 지, 임권택 감독은 립싱크를 통해 오정해의 판소리 중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도리화가>의 판소리는 라이브로 진행되었다. 부족한 수지의 역량은 어떠한 보정도 받지 못한다.
낙성연의 공연은 <도리화가>의 절정부에 해당된다. 비주얼은 아름답다. 경희루와 그 앞 연못에 띄운 배, 그 위의 존예 수지까지 모든 것이 잘 어우러졌다. 소리가 나오는 순간 아쉬움이 가득해진다. 자신의 운명과 사랑하는 스승 신재효의 운명이 판소리 한 번에 달렸다. 그 운명의 순간에 나오는 소리마저도 너무 연약하다. 감독은 수지의 판소리에 힘을 실으려는 듯, BGM을 통해 감동을 증폭시키려고 노력한다. BGM은 점점 커져 수지의 판소리는 묵음이 되고, 카메라는 그 순간 그녀의 소리에 감응한 백성들의 모습을 부각한다. 틀렸다. 판소리 영화에서 배우의 목소리를 없애면 무엇을 보고 들으란 걸까? BGM이 수지의 소리를 잡아먹은 순간, 영화의 정체성도 잡아 먹힌 것과 다름없다.
<도리화가>의 스토리는 1)진채선이 여류소리꾼으로 인정을 받는 과정, 2)신재효와 진채선이 애정을 갖게되는 과정 등 두
개의 큰 축으로 진행된다. 전자를 억지로 만들어 낸 것에 비해, 두 번째 이야기는 영 개연성이 없다. 진채선이 '동경'하던 신재효에게 왜 빠져든건 지, 신재효가 어떻게 진채선을 사랑하게 되는 지에 대해 정밀한 묘사가 부족하다. 끝없이 노력하는 그녀가 예뻐서 당연하지 수지니깐 신재효는 목숨까지 걸며 그녀를 소리꾼으로 만들려고 한 것일까. 그녀는 왜 그렇게 신재효를 흠모하고 따르는 것인가?
주고받기다. 진채선이 말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면, 신재효는 그에 맞춰 행동으로 애정을 드러낸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준 게 없으니, 우리도 그들의 사랑에 공감할 수 없다. 원인을 예측할 수는 있으나 납득할 수 없기에 관객은 주인공들에게 몰입하지 못한다. 한 쪽 측면에서라도 감정의 흐름을 확실히 보여줬어야할 영화는 두 주인공을 어중간하게 잡다가 이도저도 보여주지 못한다.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는데, 절정부가 시작되고 배우들은 자기들끼리 교감을 한다. 관객은 그 둘에 끼지도 못하고 어색한 처지에 놓인다.
영상은 끝내주게 아름답다. 신재효가 제제들과 함께 산에 올라 수련을 하는 씬, 대원군의 연회를 즐기는 씬, 수지 그 자체는 눈을 즐겁게 한다. 신재효가 걷는 시골 풍경, 그들이 수련하는 강가마저도 아름답다. 그 아름답게 잘 깔린 비주얼에서 펼쳐지는 스토리가 너무나 부족했을 뿐이다.
낙성연 공연 당시, 카메라는 배수지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꾀죄죄한 모습을 벗고 잘 꾸민 그녀의 얼굴은 예쁘다. 아악 자신과 스승에게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상황. 흔들리는 그녀를 정인인 신재효가 잘 다독여냈고, 그녀는 힘을 얻어 소리를 시작한다. 서로 눈을 바라보면서 교감을 나누고, 그에 힘을 얻어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그녀.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진채선과 신재효의 얼굴을 교대로 클로즈업한다.
만약 그녀의 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울릴 정도의 실력이어었다면, 잘쌓은 스토리가 신재효와 진채선의 관계를 탄탄히 묘사해놨더라면, 그녀의 비주얼과 판소리는 멋지게 어우러져 명장면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영화에서는 둘 다 없이 배수지의 얼굴만 있었다. 그러니 '수지 얼굴로 영화 팔아먹으려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다.
연출이 너무나 아쉬운 영화다. 배수지의 연기는 사극톤에서 종종 튀는 감이 있지만, 크게 무리한 것은 아니다. 류승룡, 송새벽 등 참가 배우들의 연기력이야 두말 할 필요가 없고, 특별출연한 김남길 역시 음산한 권력자인 대원군을 잘 표현해주었다. 여류 소리꾼이라는 소재와 그와 관련된 사랑 이야기는 한국적이면서도 '사랑'이라는 전형성마저 갖추고 있다.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 그에 훨씬 못미치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 소재만 보고 한 기대는 와장창 깨진다. <도리화가>가 '도리어 화가'나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꽃봉오리에 지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이제 만개했구나. 가거라, 이제는 널 잡을 힘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