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화나 무협 영화에서 무사가 칼을 쥔 채로 생을 마감하는 장면들을 종종 보게 된다. 죽어서도 놓지 못한 한 자루 칼은 그 전장에서의 승리가 그에게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대변해 준다. 그래서 관객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칼을 놓지 않은 그 무사에게 슬픔과 아쉬움을 압도하는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아마 그게 전율일 것이다.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런 죽음은 드물다. “아, 죽으면 죽는 거지. 그까짓 것!” 하며 코웃음 치는 이들이 있다. 죽음의 공포 따윈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자못 자신감을 내비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드문 게 아니라 흔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죽음이 닥쳤을 때에도 그렇게 담담하고 유쾌하고 자신만만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가 경험한 사람들, 위중한 병에 걸렸거나 큰 사고를 당했거나 임종을 지켜보았던 이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허둥대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지, 담담히 하던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한 사람은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사실 대학의 교수 초빙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안경세공을 생업으로 삼았던 스피노자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할 수 있지, 죽을 날짜를 내일로 받아놓고 오늘도 여전히 회사로 출근할 직장인, 여전히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갈 농부, 여전히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갈 학생, 여전히 설거지하고 청소를 할 주부가 과연 몇이나 될까? 퇴계退溪 선생이시니까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지경에 “저 매화나무에 물 좀 줘라”고 말할 수 있지, 감히 누가 흉내나 낼 수 있을까?
그러니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하던 일 계속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문 사람이란 걸 알 수 있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놓지 못한 일이라면 그런 일은 자타에게 숭고한 일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럼, 부처님은 죽음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셨을까?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실 무렵 있었던 사건과 정황들은 『장아함 유행경』, 『근본유부율』, 『대반열반경』 등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대장장이 쭌다의 공양을 받고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며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부처님께서 두 그루 살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펴고 누우셨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성자께 마지막 예배를 드리러 찾아왔다. 어둠이 찾아들고 등불이 켜지도록 행렬을 그치지 않았다. 부처님은 통증 속에서도 일일이 그들을 맞아 위로하고, 장수와 행복을 축원하고, 가르침을 베풀어 그들을 이롭고 기쁘게 하셨다.
밤이 깊어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고 숲에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을 무렵, 한 나이 많은 수행자가 부처님을 찾아왔다.
“오늘 밤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수밧다라고 합니다. 제가 그분께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뵙게 해 주십시오.”
아난이 만류하였다.
“안 됩니다. 부처님께 지금 병으로 몹시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늙은 수행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예전부터 꼭 뵙고 싶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 한 번만 뵙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세 번을 청하고, 아난 역시 세 번째 거절했을 때였다.
등 뒤로 아난을 부르는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난아, 그분을 막지 말라. 그분을 가까이 오게 하라. 의심을 풀고 싶어 저러는 거지 날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내 얘기를 들으면 분명 의심이 풀릴 것이다.”
늙은 수행자가 다가와 안부를 묻고, 한쪽에 앉아 여쭈었다.
“저는 수밧다라고 합니다. 제가 꼭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궁금하면 무엇이든 물으십시오.”
“세상에는 성자와 스승을 자칭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완전한 성자라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텐데, 그들의 가르침은 제각각이고 또 서로 다른 이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고타마께서는 어떠십니까? 그들의 가르침을 다 아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 의심은 그만두십시오. 당신이 저를 평가하고, 다른 수행자들과 비교해 누가 더 나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나의 가르침을 말해 주겠으니, 잘 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수밧다여, 고뇌를 소멸하고 열반을 성취하는 여덟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 바른 정진, 바른 집중, 바른 선정입니다. 만약 누군가의 가르침에 이 여덟 가지가 들어있다면 그들은 성자나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가르침에 이 여덟 가지가 없다면 그들은 성자나 스승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수밧다를 위해 게송을 설해 주셨다.
내 나이 스물아홉에
진리를 찾아 출가하였네.
내가 깨달음을 얻은 지도
이미 45년이나 되었다네.
수밧다여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실천하며
조용한 곳에서 홀로 사유하라.
이것이 내 가르침의 핵심이니
이 길을 걸어야 참된 수행자라네.
수밧다는 감사의 예배를 올리고 물러났다. 다시 정적이 찾아들고 부처님의 숨결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난이 뒤돌아 흐느꼈다. 이를 아신 부처님이 다시 힘겹게 눈을 뜨고 아난을 불렀다.
“그만, 그만. 눈물을 거둬라. 너는 오랫동안 나에게 정성을 다하였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너처럼 나를 섬기지는 못할 것이다. 더욱 열심히 노력하라. 머지않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그렇게 슬픔에 젖은 제자를 죽어가는 스승이 다독이고, 위로하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숨결을 모아 목소리를 높이고 대중들에게 물으셨다.
“너희 중에 나와 나의 가르침과 승가에 대해 의문이 남아있는 사람은 없느냐? 있거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빨리 물어라. 내 숨이 붙어있는 한 설명해 주리라.”
비구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나와 나의 가르침과 승가에 대해 의문이 남아있는 사람은 없느냐? 있거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빨리 물어라. 내 숨이 붙어있는 한 설명해 주리라.”
비구들은 침묵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부끄러워 직접 묻지 못하겠거든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지금 빨리 물어라.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래도 비구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부처님의 힘겨운 목소리가 안타까울 뿐인 아난이 한발 다가가 말씀드렸다.
“부처님, 이 자리에 모인 비구들은 모두 청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에 대해 의심하는 비구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게으름 떨지 말고 수행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부처님은 이렇게 돌아가셨다. 칼을 잡은 채로 최후를 맞이한 영화 속 무사처럼, 평생 안경알을 깎다가 죽은 철학자 스피노자처럼, 평생 일상 속에서 성리性理를 구현했던 퇴계처럼, 부처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늘 하시던 대로 하셨다. 게다가 그 일은 자신을 위한 일도 아니었다. 오로지 타인을 일깨우고, 타인을 염려하고, 타인을 돕는 일이었다.
“궁금하면 물어라!”
평생을 반복하신 이 말씀 속에는 세상을 향한 그분의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다.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과연 어떨까? 부처님처럼 마지막까지 자비심을 쏟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은 고사하고, 담담하게 하던 일 하고 해야 할 일 하다가 숨을 거두는 것도 고사하고, 기름 떨어진 등잔불처럼 소란 떨지 않고 조용히 사그라질 수나 있을까?
두렵다.
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군종법사를 역임하였으며, 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근무하였다.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