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남자/
나는 대구 토박이다.
그리고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구수한 나의 사투리를 숨기고 싶어졌다.
소위 '있어보이는' 서울말을 구사하고 싶었다.
마치 미드와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아메리칸 드림 그리고 화려한 뉴요커의 생활을 꿈꾸는 것처럼
서울이 주는 상징성과 동경심이 유발한 "어떻게든 지방을 탈출하여 서울에 정착해야해!" 라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반쪽짜리 스울말/
그렇게 욕망하다 우연히 1년동안 해외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고시원같은 조그마한 건물에 7명의 한국 남정네들과 함께 지냈었고
그곳에서 양옆 방에 살던 형님 그리고 동갑내기 친구와 친해졌다.
둘은 공교롭게도 서울말을 구사하는 서울 출신이었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내심 긴장했다.
나의 '사투리'가 무심코 튀어나올까봐.
그렇게 나는 서울말도 아닌, 그렇다고 사투리도 아닌 '어중간한 억양'의 말을 구사했었다.
1년간의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서울 모 대학교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관심있던 몇몇 회사의 관계자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 회사 이사님에게 매우 직설적인 조언을 듣게 되었다.
"일부러 서울말을 쓰려고 노력 하시는 것 같은데, 다 티나고 오히려 어색해요. 그러니까 본인이 편한대로 말씀 하세요."
이사님에게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난 "오 나 좀 서울사람인듯?" 이렇게 스스로의 서울말 구사력에 감탄하고 있었고 본인은 이미 서울라이즈드(Seoulized)된, 서울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고 이사님과의 대화가 끝나고 대구로 내려오는 KTX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나는 내가 아니려고 할까?"
/그냥 나답게 자신있게 말하고 살자/
나는 대구에서 태어나 쭉 자란 '대구의 아들'이다.
대구에서 쓰는 말을 사용하고 대구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의 정체성은 대구에 있고 어떤 식으로 나 자신을 표현하던 대구에 살았던 나의 추억, 모습들이 투영되어 보여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나의 뿌리를 부정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열등감 때문인 것 같다.
1900년 10월 9일 발행된 황성신문(국사시간 이후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에는 팔도의 말씨를 논한 논설이 실렸다.
"경기도 말씨는 새초롬하고, 강원도 말씨는 순박하며, 경상도 말씨는 씩씩하다. 그리고 충청도 말씨는 정중하며, 전라도 말씨는 맛깔스럽다. 황해도 말씨는 재치 있고, 평안도 말씨는 강인하며, 함경도 말씨는 묵직하다는 인상을 준다."
특정 지역의 말씨가 우위에 있거나 촌스럽다고 높이고 깎아내리지 않는다. 각 지역만의 고유한 특징을 보여줄 뿐.
그런데 지금은 말씨에 따라 '위계'가 생겼다.
표준어의 지위를 가진 '서울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교양있고 세련된 사람들이고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표준어를 배워 '언어 순화'를 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사투리가 많이 노출 된 지금은 어느정도 사투리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표준어'를 구사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신기한 점은, 내가 모국어인 한국어가 아닌 영어를 구사할 때조차 서울말을 쓰려고 할때와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원어민과 비슷하게 발음하려 발버둥치고, 혹시나 나의 발음이 구리다고 생각할까봐 한마디 한마디 노심초사하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내가 아니려고 할까?"
언어란 '소통'을 위해 존재하고 각자의 배경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구사하는 것이다.
어느것이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단정지을 이유는 없다. 그러니 자신있고 재미있게 즐거운 언어생활을 이어나가자.
결론은 뭐, 쫄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