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개구리의 사회

in kr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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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들은 주입식 교육과 주입되는 지식의 가치에 대해 분노한다. 도대체 이 많은 지식들을 주입받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수학과 역사가 인생에 무슨 필요란 말이야? 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졸업한 젊은이들은 이를 비웃는다. 그건 피상적인 생각이야. 배워 놓으면 다 쓸모가 있는 법이지. 논리적인 사고, 역사적인 의식이야말로 삶을 정말로 가치 있게 만드는 법이야. 그런데 학교가 감옥이라고? 손발이 오글거리는군. 분명 나중에 자다가 부끄러워서 이불을 차게 될 거야. 이런 쿨함을 성숙이라고 부른다. 뜨거운 미성숙과 차가운 성숙, 너무나 익숙한 구도. 그러나 성숙이 아니라 타락이지 않을까? 정말로 피상적인 것은 차가운 조소를 띠우고 있는 이 개구리들이 아닐까?

분명 수학과 역사는 삶에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정말로 교육·학문적 목적과 방법론에 의거해 제대로 행해진다면, 자유롭고 풍부한 인격을 길러내기 위한 고귀한 목적 아래 세심하게 행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한국 교육이 정말로 그러하다고는 가장 쿨한 개구리도 믿지 않는다. 한국 교육의 목적은 언제나 자유롭고 풍부한 인격에 있지 않았다. 대신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보내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 문제풀이 기계로 만드는 것이었다. 수학과 역사는 수천 수만 개의 문제로 분해된다. 수업 시간은 오직 이런 목적을 위해 파행적으로 운영된다. 여기서 학문의 의미를 논한다고? 진정 수학과 역사 교육의 정당성을 논하고 싶다면, 그것은 교육 자체를 정상적으로 돌린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학생들이 정말로 혐오하는 수학과 역사란 무엇이던가. 수천 수만 개의 문제로 분해된 수학과 역사, 사유 없는 암기를 강요하는 데이터들, 자연스런 성장 및 전체 인격과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는 가학적인 난이도, 학문의 진짜 의미와 가치와는 무관하게 오직 '변별력'만을 가리기 위한 '문제를 위한 문제'들일 뿐이다. 학생들의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현실에서는 도저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이상적인 학문의 의미와 가치를 운운하며 학생들을 훈계한다. 여기서 정말로 피상적인 것은 어느 쪽인가?

주입식 교육, 문제풀이 교육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구의 관점에서? 만약 인간이 영원히 살고 에너지가 무한하다면, 모든 지식과 경험이 나름의 의미(영원 속에서 이 개념이 남아 있다면)를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지극히 짧고 에너지는 더더욱 적다. 뇌가 말랑말랑하고 감수성이 흘러넘치는 청소년기의 귀중함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삶은 자기 삶을 사는 것이고, 시간과 에너지는 되도록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죽는데 왜 살아야 하는 거지?」 「나는 왜 사는 거지?」 등의 답 없는 질문으로 청소년기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좋은 일이다. 결국 삶은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이니까. 이 고민에 휘둘려 무작정 펼쳐든 문학과 철학의 이미지들이 삶 전체를 규정하는 방향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그 대신에, 사유와 영혼이라고는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은 기계적인 지식들을 주입하는 데 청소년기를 다 바친다면, 그것은 대체 무슨 삶을 살기 위함인가? 자의식은 없고 지식만이 가득한 문제풀이 기계들은 누구에게 유용한가? 물론 거기에도 문학과 철학은 있다. 논술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할지도 모른다. 초등학생들조차도 장래희망으로 공무원을 쓰는 세상이다. 삶이란 좋은 대학과 직장, 안정적인 벌이와 행복한 가정과 동의어고 결코 그 이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가 요구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안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문제풀이 스킬들을 익히는 데 청소년기를 몽땅 바치는 것은 유일하게 현실적인 선택지다. 철학보다는 철이 들게 하기. 너는 유일무이한 하나가 아니라 그저 사회 속의 1/n일 뿐이라고 각인시키기. 그렇다면 처음의 조소는 자기의 의미를 정직하게 밝혀야 한다. 그는 학문의 의미와 가치를 운운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수학이든 역사든 먹고 사는 데 다 쓸모가 있어!」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하기야 이 개구리들이 먹고 사는 것과 삶을 구분할 수나 있겠는가.

자신은 단순히 먹고 사는 것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다 높은 의미를 안다고 항변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수학과 역사 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읊고 싶다면, 먼저 수학과 역사가 모욕당하는 현실부터 바꿔야 한다. 수학과 역사는 청소년들이 아니라 수많은 시험지와 문제집과 인강들과 연표들에 의해서 모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사유가 아닌 지식과 기술로 변함으로써 모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데이터를 주입해야 할 기계로 보는 시선부터 바꿔야 한다. 유식할 뿐 자기 주장과 세계관은 없는 학생들이 진정 교육의 결과물이란 말인가? 철은 들었지만 철학은 없는 학생들이 진정 학문의 결과물이란 말인가? 개구리들이 진정으로 정직하고 성숙한 성인이라면, 청소년들을 비웃을 게 아니라, 삶과 먹고 사는 것을 동의어로 만들어버리고 자기를 위한 사유를 사치와 낭비로 규정하는 사회를 비판해야 마땅할 것이다.

개구리들의 추악함은 단순히 그들이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회 구조의 근본적 부조리를 직시하는 대신, 사회가 내세우는 표면적 구실과 이데올로기(개구리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를 들이대면서 학생들을 훈계한다는 것에 있다. 굳이 학생들에게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런 위선적 동정도 마찬가지로 구역질 난다. 그저 정직하게 바라보면 된다. 자기도 믿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시선에서가 아니라. 이 사회의 문제는 무지에 있지 않다. 너무나 많이 배우고 외우고 익혀서, 자기 눈과 머리를 사용할 힘은 도저히 남아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유일무이한 자기를 용감하게 관철하고 죽기보다는, 사회와 다수 여론의 시선을 체화하고 반복하다 죽는 것을 유일하게 가능한 삶으로, 좋은 삶으로 여기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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