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모 유력 정치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밝혀도 되긴 할텐데, 선거기간이라 괜히 쫄아서 '모' 정치인이라고만 쓴다) 꽤 좋아하는 분이긴 하지만 일부 부분에서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 와서 어떤 이야기를 할 지 궁금해서 한시간 조금 넘게 진행된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강연을 통해 꽤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논리적 설명을 통한 '설득'의 경험 말이다.
(논리적) 설득은 꽤 일상적인 행위이고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뭐 사실 우리가 말과 글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목적 중의 상당수가 이 '설득'을 위한 거니까, 설득은 결코 신선한 경험일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일단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에선) 늘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또 설득당하면서 살아가는 거니까. 하지만 그 논리적 설득의 경험이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건, 내가 요즘 얼마나 논리적 설득에서 멀어져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는 설득이 일상적이어야 할 세상에 살면서도, 너무 설득과 무관계하게 살아간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권위에 의존해 윽박지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무슨 지시를 받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받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얻고 마음으로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윗사람이 시켜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을 하는데 왜 하는지 이유를 잘 모른다. 그러니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다.일 자체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니, 외부적인 데서 동기(motivation)를 찾아야 한다. 그게 대부분은 '돈'이다. 사람들이 윗사람 욕, 갑질하는 광고주 욕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일을 하는 이유는 그 일이 납득할만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알맹이 없는 번드르르한 결과물이 나오기가 십상이다.
우리는 설득 대신 갈굼과 '쇼부(しょうぶ, 勝負)'에 익숙하다. 뭐 그것들 역시 나름대로 설득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정도(正道)의 설득과 조금 다른 건, 그것들은 본질에서 벗어난 내용을 통해 듣는 이를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다. 너무 순진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건 결코 '스탠다드'라고 할 수 없다. 정공법이 통하지 않을 때에 한번씩 써먹을 수 있는 변칙 플레이 같은 것이지.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켜 설득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 사바사바 해서 일을 시키거나, 아니면 까라면 까 정신에 입각해 시키면 할일이지 무슨 설명이 필요해 같은 마인드로 일을 '하달'한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 이럴진대,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수긍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사실 이게 다 권위적 사회의 결과물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왜 수고스럽게 설명을 해주냐? 이게 일반적인 태도다. 그러니 설득을 당해본 적도 없고 당해 본 적이 없으니 할 수도 없다. 세상이 이러니 정치도 수준높은 설득보다는 선동이나 프로파간다 위주가 된다. 유독 정치에 네거티브가 판치는 이유는, 설득을 해본적도 당해본적도 없는 이들에게 굳이 귀아프게 설명해서 설득하는 것보다 자극적인 거 빵 터트려서 주목받는 게 효과적이기 때문일 게다. 아니면 정말 설득할만한 '컨텐츠'가 없거나.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간만에 장시간 정치인의 강연을 듣게 되었고, 최선을 다해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쩌면 '참 말 잘하네' 정도의 감상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스피치를 통해 나는 내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 정치인의 일부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귀가 얇은 건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이 사회에 살면서 이정도로 논리적인 이야기를 듣고 설득을 당하는 기회가 흔치는 않았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놀아났다'고 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내가 놀아났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그 정치인은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고, 왜 그런 의견을 내놓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혔다. 적어도 나는 그 정치인이 왜 그런 의견을 내놓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이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를 탈락시킨 이들, 나를 욕하는 이들, 나에게 업무나 과제를 던진 이들 그 누구도 왜 자기가 이 일을 내가 하기를 원하는지 충분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구구절절한 설명은 참으로 오랜만에 들었다. 그런 점에서, 그 의견의 옳고그름을 떠나 나는 인간적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정치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설득의 가치는, 설득당하는 이가 전인적(全人的)으로 설득하는 이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갈굼과 쇼부가 조직과 비즈니스의 방식이라면, 논리적 설득은 인간의 방식이다. 인간이 인간의 방식으로 소통함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을 조직의 일원이나 비즈니스 파트너(혹은 갑과 을)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자각한다. 배울 만큼 배운 인간들이 왜 배운 걸 써먹지 않고 왜 말초적인 권력관계나 이익관계로만 소통하는 것인가. 설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시키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설득하고, 설득당해야 한다. 그게 말과 글을 쓰는 인간의 방식이다. 생존과 먹이로 소통하는 동물의 방식이 아니라.
그러게요.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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