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귀족’, 기계를 부수는 데 앞장서다
1811년 영국에선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불린 “폭력적인” 소요가 발생했다. 랭커셔에선 역직기(力織機)가 파괴됐다. 요크셔에선 전단기(剪斷機, shearing-frame)’가 부서졌다. 미들랜즈에선 편직기가 박살났다.
1811~1817년간 발생했던 일련의 기계파괴 운동은 영국 내 세 지역, 그리고 세 가지 직종에 한정된 운동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1811년 11월 노팅엄셔에서 시작돼 이듬해 요크셔의 웨스트라이딩 지역으로 번졌다. 1813년 3월엔 랭커셔에 까지 기계파괴 운동에 동참했다. 후대 보수주의 사가들의 시선에서 ‘목표도 없는 광란의 산업 자크리들(pointless, frenzied, industrial Jacquerie)’이라고 평을 들었던 러다이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웰링턴 장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했던 것 보다 더 많은 1만2000명의 군대병력을 투입했다. 또 강력한 법적 처벌로 재발의 싹을 잘랐다.
영국 각 지역별로 기계와 맞선 노동자들의 면모도 조금 달랐다. 웨스트라이딩 지역에선 전모공(cropper, 翦毛工)들이, 남부 랭커셔에선 면직공들이 관여했다. 노팅엄을 중심으로 한 레스터셔와 더비셔의 편물업 지역에선 편직기 편물공들이 이런 행동에 동참했다.
1810년대 러다이트 운동의 최초의 신호탄은 편직기편물공들이 쐈지만, 사실 기계를 때려 부수는 것은 오랜 역사가 있었다. 출처가 명확하진 않지만 ‘러다이트’라는 명칭도 1799년 두 대의 양말 짜는 기계(Stocking frame)를 부쉈던 네드 러드(Ned Ludd)라는 노동자의 이름을 후일 전모공들이 차용한 데서 비롯됐다.
기계 도입을 반대하고, ‘무식하게’ 기계를 부수는 문화를 먼저 조성한 것은 전모공 이었다. 전모공, 전단공(shearman)은 모직물 노동자 사이에선 귀족노동자로 불리던 특권적인 숙련노동자들 이었다. 반면 면직공과 편직기 편물공은 속절없이 신분상의 하락을 먼저 경험하고 있던 선대제 노동자들이었다. 산업혁명 초창기엔 노동력 부족으로 “1780~1790년대 모든 방직공은 금시계를 차고, 매일 고기를 먹었다”는 식으로 ‘영화’를 누렸지만, 기계가 도입되면서 이들의 짧은 전성기는 곧 끝이 났다.
때마침 잉글랜드 산업의 대형화·기계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면공업의 대표도시인 맨체스터의 경우 1773년엔 인구 2만7000명에 방적공장은 하나도 없었지만 1812년이 되면 9만5000명의 인구에 52개의 면방직공장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1850년에는 인구 45만 명의 대도시가 된다.
잉글랜드 전체에서 동력직기는 1813년 2400개에 불과했지만 1829년에는 5만5000개로 늘었다. 1813년에는 다시 8만5000개로 급증한다. 1850년대가 되면 22만4000개에 이른다. 반면 손으로 짜는 베틀 방직공은 1820년대에 50만 명에서 1840년대에는 10만 명으로, 1850년대에는 5만 명으로 계속 쪼그라든다.
무엇보다 기계는 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선대제에서 처럼 노동자가 집에서 일할 수 없었다. 노동이 자율적이고, 노동자 기분에 따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옥스퍼드 사전에 ‘노동(labour)’이라는 단어가 “사회의 물질적 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한 육체적 노력”이라는 뜻으로 처음 기재된 것은 1776년 이었는데 1800년대가 되면 이 단어는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 및 직공 일반집단”의 뜻으로 확장된다.
하지만 전모공은 상대적으로 이처럼 급변하는 환경변화에 ‘조금’ 여유가 있었다. 전모공은 직물 표면에 나와 있는 잔털을 깎아 올을 뚜렷하게 하는 모직물 공정을 담당했다. 그들은 천을 자르고, 천에 흠집이 있는지 검사하고, 솔질하고, 압착한 뒤 다시 털을 자르는 일을 수행했다.
전모공은 또 천의 ‘보풀’을 세우는 일을 했고, 초대형 가위를 이용해 전단작업을 했다. 그리고 이 두 공정은 경험과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전모공의 임금은 관례상 완제품 직물 가격의 5% 정도로 규정됐지만 전모공들이 얼마나 신경을 써서 일하느냐에 따라서 제품 가격이 20% 정도 왔다 갔다 했다.
당연히 전모공들은 임금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18세기까지 뉴캐슬 광산 같은 곳에선 빈민 노숙인 범죄자가 끌려와 쇠로 된 항쇄(項鎖)를 목에 끼고 노동을 했다지만 이 같은 부자유 노동 대신 노동계약에 따라 고용이 이뤄졌고, 전모공은 그중에서 가장 우월한 위치에서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18세기말 직물의 마무리 작업은 고도로 전문화된 공정이 있었다. 일부 대형 제조업체들은 전 공정을 하나의 ‘공장(오늘날의 공장에 비해선 매우 소박했다)’에서 수행했다. 고트라는 이름의 기업인은 한 지붕 밑에서 일하는 80명의 전모공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상인들은 소규모 직물업자로부터 미완 상태의 옷감을 구입해서 작업장으로 보내 마무리작업을 하도록 했다. 리즈의 작업장은 40~50명, 혹은 60명의 기술자와 수련공을 고용하고 있었다. 웨스트라이딩의 촌락들에 있는 더 작은 마무리 작업장들에선 겨우 5~6명을 고용했다. 1806년 통계수치를 보면 웨스트라이딩의 직물마무리업 마스터(master-dresser)는 500명, 전모공은 수련공을 포함해서 3000~5000명 수준을 오갔다.
이런 전모공들은 마무리 공정을 통제했고 조직을 갖추고 비숙련공을 배제했다. 그들은 웨스트라이딩 직물노동자 중 귀족층을 이뤘고, 정식으로 고용되기만 하면 19세기 첫 수년간에는 주당 30실링이라는 고소득도 가능했다. 전모공은 ‘독립적’이면서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 높은 정치의식으로 유명했다. “맥주 집에서 직조공이나 마무리공, 염색공 보다 두 배 내지 세배의 돈을 썼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마구 떠들면서 노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대 ‘리즈 머큐리’지는 “전모공은 엄밀히 말해서 피고용인(servant)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노동 엘리트에서 ‘제조업에서 불필요한 신분층’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 기계의 위험성도 잘 알았다. 좌파적 시각에서 보자면 자본과 노동간 경쟁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비용절감 노력은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와 이윤율 저하의 경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계화는 이 같은 과정을 촉진했다. 전모공들도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대행할 기계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컴퓨터의 발달에 따라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가 크게 늘지 않는 것과 비슷한 현상을 미리 경험한 것이었다. 당시에도 기업은 새로 개발된 기계는 사들일지언정 채용에는 소극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에 전모공들은 자신의 역할을 대행하는 기모기라는 기계사용과 도입에 강하게 저항했다. 사실 기모기는 16세기 중반 에드워드6세 이전 부터 있었고, 에드워드6세가 초창기 기모기의 사용을 이런저런 이유에서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었다.
초기 기모기는 손으로 천의 보풀을 세우는 대신 티즐(teasel,보풀 세우는 장치)이 장착된 실린더 사이로 천을 통과시키는 간단한 기계였다. 전모공들은 기모기가 천을 찢거나 지나치게 팽팽하게 만든다는 근거가 박약한 주장을 들면서 손기술의 중요성을 강변했다. 초창기 기모기는 전모공의 일 중 일부만 뺏을 수 있었지만 나중에 나온 것들은 둘 이상의 가위를 장착해서 천의 표면을 통과토록 한 것으로 숙련된 수공기술자까지 필요 없게 만들어 버렸다.
이에 18세기부터 전모공들은 기모기와 투쟁했다. 서부 잉글랜드 몇몇 지역에선 직물노동자들이 이 기계의 사용을 용납지 않았다. 18세기말 웨스트라이딩 일부지역에서 몇 대의 기모기가 사용되고 있을 때 전모공들은 그 기계가 리즈로 도입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조직을 갖추기도 했다.
하지만 1791년 리즈의 직물상인들이 새로운 기계를 도입할 것이라는 공개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급격하게 과격화됐다. 이후 10여 년간 리즈의 공장 여러 곳이 전모공에 의해 파괴됐다.
여전히 공장 내에서 전모공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기에 그들의 행동은 거칠 것이 없었다. 리즈에서 기모기 한대가 수백 명의 목격자들이 보는 앞에서 박살났지만 상당한 규모의 현상금 제안에도 불구하고 기계를 부순 사람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보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들은 이어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판단하는 기계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18세기 마지막 몇 년간 웨스트컨트리에서 1000~2000명의 건장한 폭동자 무리가 ‘혐오스런’ 공장을 공격했다. 1797년 12월 서머센셔에선 얼굴을 검게 칠하고 몽둥이로 무장한 200~300명의 사람들이 프롬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전단기 창고에 들어가선 30파운드 가량 나가는 값비싼 전단기를 파괴했다.
하지만 기계도입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던 데다가,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의 여파도 닥쳤다. 전모공들 사이에서도 실업이 늘고, 생활고를 겪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굶주림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더더욱 기계도입에 저항했다.
그들은 글로스터의 한 직물업자에게 “우리는 당신이 전단기를 사들였단 얘기를 들었다. 2주일 안에 그것을 치우지 않으면 당신을 대신 걷어찰 것이다. 당신을 개새끼라고 욕하고 전단기를 가지고 있는 모든 공장을 때려 부술 것”이라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백 년 된 낡아빠진 법인 에드워드6세가 기모기 사용을 금지했다는 조항을 찾아내선 기계사용을 방지하는 것이 ‘헌법상의 권리’라고까지 주장했다.
기계의 등장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세력은, 따지고 보면 기계로부터 가장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로 부터 충원됐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보단,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들이 손실에 더 민감한 법이다.
세계사속 경제사, 돈 성 권력 전쟁 문화로 읽는 3000년 경제 이야기, 글항아리, 김동욱, 페이지 330-337
필자는 우선 일자리가 없어지니 무슨 수라도 써야하니 기계에게 엉뚱한 화풀이를 한 노동자에게 공감을 한다. 그런데 사실 기술발전은 일개 개인이나 국가가 멈출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AI의 개발로 일자리가 줄거나 자율주행차 개발로 운전기사분들의 직장을 잃을수가 있다. 그렇다고 운전하는 분들이 자율주행차를 부수는 폭력행위는 또 정당화될수 없다.
결국은 시대 흐름을 역행하지 말고 순행하면서 따라야 하는데 민간이나 정부나 마찬가지이다. 첨단 4차 산업의 총아를 정부는 파괴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소설도 있지만 비트코인 투기는 잡아야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은 절대 러다이트처럼 퇴행적으로 파괴하면 안된다. 만약 파괴한다면 모택동이 문화유적과 중국의 유산을 파괴한 역겨운 문화대혁명과 같다. 완전히 한국을 비행기로 폭탄을 삼아 폭발 당한 쌍둥이빌딩 그라운드 제로로 만드는 것이다.
이 글은 기자가 2108년 1월달에 쓴 글이다.
러다이트 운동으로 일자리가 줄기보다는 대체가 되었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으로 AI나 로봇이 사용되면 실직이 불보듯 뻔하다. 제레미 러프킨도 노동의 종말이란 책에서 이미 예언을 했다. 그렇다면 정부의 대책은 실업급여를 주고 기본소득을 모두 주는 보편적 복지를 개발해야 하는가? 정부에서도 위기감을 느끼고 국민연급 수급시기를 늦추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정부가 하는 일 모두 헛짓이다. 왜냐하면 그 수당도 국민 세금으로 나오니 언발의 오줌누기인 것이다.
기자가 방법을 제시하자면 국민의 각종 생활 데이터를 민간에 팔고 코인을 받는 것이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사람은 물론 선택하지 않고 제공 안해도 된다. 하지만 페이스북이나 구글등에서 이미 보상 안주고 팔고 있는데 자신이 안판다고 동의한다고 해서 정보가 빠져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오산이다. 한국 주민등록번호가 중국 뱃사공도 가지고 있듯이 그냥 자신의 발걸음이나 차량 이동경로 GPS데이터, 생활습관, 헬스 데이터, 소셜 미디어 이용, 스마트폰 사용 데이터등을 넘겨 줘서 광고에 최적화하게 해서 최소한 의식주를 생활하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2018년 8월 10일 더 충격적인 정부의 헛발질이 시작되었다.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 입법예고 http://www.mss.go.kr/site/smba/ex/bbs/View.do?cbIdx=126&bcIdx=1007650&searchRltnYn=A 라는 글이 올라왔다.
암호화폐 거래소는 퇴폐업소 유흥주점과 같으니 벤처기업육성 법안에서 빠져야 한다는 글이 요지이다. 별 해괴한 논리까지 개발했다. 물론 위 내용은 중소벤처부 장관보다 그 윗선에서 압력이 들어와 마사지가 들어왔다는 소설적 뇌피셜을 펼쳐본다. 도저히 중소벤처부란 정부에서 차마 인간의 탈을 쓰고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마지막 한명이 남을때까지 피가 마를때까지 끝까지 반정부투쟁과 시행령 저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왜 암호화폐를 처음 만든 사람이 거의 모두가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아나키스트 철학에서 태동되었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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