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의사가 여인의 살을 주무르니 망측과 ST침 튼살치료
“남의가 여인의 살을 주무르니(遂使男醫按摩肌膚) 망측합니다.”
(《태종실록》 1406년 3월 16일조 ·《세종실록》 1423년 11월 28일조)
1406년, 조선이 여의사 제도를 도입한 까닭이다. “남의의 진맥이 부끄러워 병을 숨겨 죽는 부인들이 많다”라는 것이었다. 조정은 각 도의 관비 가운데 10~15살 사이의 영리한 동녀(童女)를 뽑아 ‘서울 국비 유학’을 시켰다. 이들은 사서(四書)는 물론 어려운 의학서적까지 독파해야 했다. 3년 연속 ‘불통(不通)’을 받으면 다시 관비로 전락했다.
조선시대 여의 가운데 으뜸은 대장금(大長今), 혹은 장금(長今)일 것이다. 사실 대장금, 혹은 장금이 국왕(중종)의 명실상부한 주치의였음을 확인시켜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중종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장금이 임금 주치의였을 가능성이 짙다. 대장금(혹은 장금)이 실록에 등장한 것은 1515년(중종 10년)이다. 중종의 첫번째 왕비인 장경왕후가 원자(훗날 인종)을 낳고 일주일 만에 죽자 문제가 생겼다. 의원 하종해와 의녀 장금 등이 ‘약을 잘 못 쓴 죄’로 탄핵대상이 된 것이다. 특히 의녀 장금의 죄가 더 컸다. 장금이 장경왕후의 증상을 전하면 의원(하종해)이 그 증상에 따라 약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의녀 장금을 도리어 두둔한다.
*의녀 장금만 남기고 다 나가라.
“사람의 삶과 죽음이 어찌 약 처방과 관계가 있는가. 또 의녀 장금은 왕후의 출산에 공이 커서 당연히 큰 상을 받았어야 했지만, 대고(大故·왕후의 죽음) 때문에 상을 받지 못했다. 상을 베풀지 못할지언정 형장을 가할 수는 없다.”
원자인 인종을 출산하는데 공을 세운 장금을 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간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지만, 중종은 일축하고 만다.
장금의 기록은 7년 뒤인 1522년 다시 등장한다. 중풍과 감기를 앓던 자순대비의 병이 호전되자 임금이 의녀 장금과 신비(信非)에게 쌀과 콩 각 10석씩 하사했다는 기록이다. 1년 뒤인 1524년 중종은 의술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대장금에게 전체아(全遞兒)를 주라”는 명을 내렸다.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조금 괜찮아 대내(大內·왕과 왕비, 대비의 거처)를 출입하면서 간병하니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어라.”(<중종실록>)
의녀는 원래 전체 인원이 돌아가면서 근무하고 근무기간 동안 급료를 받는 체아직(遞兒職)이었다. 중종은 왕와 왕비, 대비전을 드나들며 간병하는 대장금에게 전체아, 즉 ‘상근하고, 급료의 전부를 지급받는 내의녀’의 직분을 하사한 것이다. 1544년 기록을 보면 어느 시기부터 장금이 대전에 머물면서 직접 임금(중종)을 돌봤다고 한다.
“의녀 장금이 나와 말했다. ‘어제 저녁에 상(중종)께서 삼경(밤 11~새벽 1시 사이)에 잠 드셨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드셨습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지만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 됐습니다.’고 했다.”
《중종실록》 1544년 10월 25일조
중종은 이 즈음, 재미있는 명령을 내린다.
“아침에 의녀 장금이 내전으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하기가 비로소 통하여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고 했다. 임금이 약방에 전교했다. ‘지금 제조와, 의원, 의녀들이 모두 왕래하고 있는데 이제 의원과 제조는 해산하여 돌아가라.”
《중종실록》 1544년 10월 26일조
중종이 의녀 장금만을 남기고 제조와 남자의원들을 모두 내보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 여자에게 몸을 맡기시옵니까.
중종은 의원들 대신 장금의 진맥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요즘 풍한증이 있구나. 맥을 짚은 의녀의 처방에 따라 약을 지어올리라.”
《중종실록》 1532년 10월 21일조
“소소한 약에 관한 의논은 의녀를 통해 전해줄 터이니….”
《중종실록》 1544년 10월 24일조
“대소변이 보통 때와 같지 않구나. 의녀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써야 할 약을 의논하여라.”(1544년)
《중종실록》 1544년 10월 24일조
《중종실록》에서 중종은 자신을 진맥한 의원을 대장금이라고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종실록》은 임금의 병을 치료한 의녀 대장금에게 상급을 내리는 기사가 심심찮게 보인다.
“여러 달 병을 앓다가 거의 회복됐구나. 의녀 대장금과 계금에게 쌀과 콩 각 15석씩 내리고….”
《중종실록》 1533년 9월 5일조
“의녀 대장금에게 쌀과 콩 도합 5석, 은비에게 쌀과 콩 3석씩 하사하라.”
《중종실록》 1544년 2월 9일조
대장금이 사실상 중종의 주치의였음을 알려주는 입증하는 자료들이다. 대신들은 이같은 대장금의 활약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내의원 총책임자인 제조 홍언필 등이 불만을 터뜨렸다.
“의녀의 진맥이 어찌 의원의 정밀한 진찰만 하겠습니까. 천박한 의녀의 식견보다는 의원들의 진맥을 받으소서.”
《중종실록》1544년 10월 24일조
이기환 기자의 이야기 조선사 흔적의 역사, 이기환 지음, BM 책문, 페이지 352-356
위 내용을 보면 최초의 미국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이 생각난다. 부인과 질병을 앓던 친구가 자신의 환부를 남자 의사에게 보이는 게 부끄러워 병원에 가지 못 했고, 결국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 일은 엘리자베스에게 큰 충격을 줬고, 그는 여성 환자들을 위해 여의사가 되었다.
가끔 자향미 한의원에 ST침 튼살침으로 튼살치료를 받는 여성이 있는데 부위가 사타구니나 허벅지, 가슴등 민감한 부위의 시술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때때로 여의사가 시술하는지 물어보고 안하면 전화를 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남녀칠세부동석 시대도 아니고 중종도 여의사에게 치료받았는데 이런 경우는 매우 이해하기 힘들다.
This is incredible! Love it. @home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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