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는 1985년 8월 12일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오사카 이타미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일본항공 국내선의 보잉 747SR-100(등록번호 JA8119기)가 일본 군마현의 다카마가하라 산에 추락한 사고를 말한다.
단일 항공사고로는 사상 최대의 사망자를 낸 사고이다. 일본 운수성 항공사고조사위원회의 사고조사보고서 에 의하면, 사망자 수는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 524명 중 520명(태아 제외)에 달하며, 그 중에는 한국인 6명을 포함, 가수 사카모토 큐, 한신 타이거스 구단 사장 등의 유명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생존자는 4명으로, 그 중 한 명은 일본항공 비번 객실승무원이었다. 또한 이 사고는 일본의 성묘명절인 오본을 앞두고 일어났기 때문에 슬픔이 컸으며, 항공업계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일본항공기 추락사고(日航機墜落事故)’나 ‘일본항공 점보기 추락사고(日航ジャンボ機墜落事故)’라고 말하는 경우는 이 사고를 가리키는 일이 많다.
당시 123편은 18시 정각에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이륙, 남서쪽을 향한 후 이즈오지마에서 서쪽으로 순항, 구시모토 상공에서 북서쪽으로 비행하여, 18시 56분에 오사카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사고 기체는 보잉 747인 JA8119이었다.
해당 기체는 이 날 503편과 504편으로 도쿄 ~ 삿포로, 363편과 366편으로 도쿄 ~ 후쿠오카를 왕복하는 정기편으로서 비행하고, 오사카 이타미 국제공항에 도착 후, 130편으로서 이타미발 도쿄행의 최종편을 운항할 예정이었다. 연료는 3시간 15분 정도의 비행이 가능한 정도의 양을 탑재하고 있었다.
승무원은 49세의 기장 타카하마 마사미, 39세의 부기장 사사키 유타카, 46세의 항공기관사 후쿠다 히로시 세 명의 조종사와, 객실 승무원(남성 1명, 여성 11명) 12명 등 총 15명이었고, 승객은 509명(한국인 6명 포함)이었다. 조종석에서는 기장 승격 훈련을 받는 부기장이 기장석에 앉아 조종하고 승무원에게 지시를 하였다. 기장은 부기장석에서 부기장을 지도, 무선 교신 등 부기장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항공 기관사는 2번째로 JA8119에 탑승하였으며, 부기장은 다른 항공기에 탑승한 후 이 기체로 탑승하였고, 기장은 그날 첫 비행이었다.
18시 4분, 524명을 태운 123편은 원래 출발 시간보다 약간 늦게 하네다 공항 18번 탑승구를 떠나 18시 12분에 16번 활주로에서 이륙했다.
사고기인 보잉 747SR-100 123편 JA8119
기장 : 다카하마 마사미(高濱雅己, 49세, 운항부문 지도교수 총 비행시간 12,423 시간). 부조종사 석에서 기장승격 훈련 감독 및 무선통신 등의 부조종사의 업무를 담당.
부조종사 : 사사키 유타카(佐々木祐, 39세, 기장승격 훈련생 총 비행시간 3,963 시간). 기장 석에서 기장 승격 훈련, 승무원의 지시를 담당.
항공 기관사 : 후쿠다 히로시 (福田博, 46세, 엔지니어 부문 강사 총 비행 시간 9,831 시간). 하네다 - 후쿠오카 선 363.366 편에서 계속 JA8119에 승무.
객실 승무원
수석 사무장 : 하타노 쥰 (波多野純, 39세, 총 비행 시간 10,225 시간)
보조 사무장 :키하라 사치요 (木原 幸代, 30세) 아카다 마리코(赤田 真理子, 31세) 후지타 카오리(藤田 香, 28세) 미야미치 레이코(宮道 令子, 30세) 쓰시마 유미코(対馬 祐三子, 29세) 요시다 마사요(吉田 雅代, 27세) 에비나 미츠요(海老名 光代, 28세)
스튜어디스 :시라뵤시 유미코(白拍子 由美子, 25세) 오노 미키코(大野 美紀子, 26세) 오노 세이코(大野 聖子, 24세) 하타노 쿄코(波多野 京子 24세)
123편 경로
18시 24분(이륙으로부터 12분후), 사가미만 상공에서 순항 고도 24000피트(7200 m)를 향해 상승하던 중, 23900 ft를 통과하는 순간 갑작스런 폭발음[4]과 함께 123편의 꼬리날개는 수직 안정판의 하단부만을 남기고 파괴되어 유압계의 총 4 계통 모두가 완전히 손실되었다. 유압을 사용하는 엘리베이터(승강타)나 에일러론(보조 날개)의 조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휴고이드 운동과 더치 롤을 일으키며, 기체는 17분간 20000ft(6000m) 이상으로 비행을 계속한다.
18시 40분 무렵, 하강을 위해 항력장치인 랜딩기어를 내린 후, 후지산 동쪽 기슭으로 북상하나,야마나시현 오츠키시 상공에서 급작스레 오른쪽으로 선회하며 고도 22000피트에서 6000피트로 단번에 15400ft(4600m)를 하강한다. 그 후, 기체는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향하는 항로가 지나가는 사이타마현 상공에서 왼쪽으로 선회, 군마현 남서부의 산악 지대로 향하기 시작한다.
기내에서는 폭발소리가 들린 직후에, 각 좌석마다 산소 마스크가 내려오고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또 일부 좌석에서는 바닷가에 빠질 때를 대비해 구명조끼를 착용하기도 했다. 남성 승무원은 전 객실 승무원에게 기내 안내방송으로 산소통의 준비를 지시했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기내는 이상 발생 직후부터 추락까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전원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승객들은 충격에 대비하는 이른바 「충격 방지 자세 (앞자리에 두 손을 깍지쥐고 머리 부분을 안는 자세)」를 취하고 추락에 대비했다. 승객 중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불안정한 기체 안에서 가족에게 유서를 남긴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이러한 유서는 후에 사고 현장에서 발견되어 희생자의 비통함을 전해주고 있다. 일반적인 추락 사고에서는 문제 발생 후 몇 분의 여유도 없이 추락에 이르지만, 이 사고에서는 18시 24분의 이상 발생부터 30분 이상 비행을 계속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유서를 쓸 시간이 있었던 보기 드문 사례이다.
지상과의 교신
123편은 18시 24분 47초에 긴급 구난 신호 「스쿽 77(7700)」을 발신하고 신호는 도쿄컨트롤(ACC)에 전해진다. 그 직후, 기장이 무선으로 ACC에게 긴급사태가 발생했으므로 도쿄 국제공항으로 회항한다고 말하자 ACC는 회항을 승인했다. 123편은 이즈오시마로의 레이더 유도를 요구했다. ACC는 좌우 어느 쪽으로의 선회 신호를 보낼까 묻자, 기장은 우회가 되는 오른쪽 선회를 택했다.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은 긴급착륙의 준비에 들어갔다.
27분 ACC가 123편에 긴급사태가 있는지 묻자, 123편으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계속해서 123편에게 어떤 긴급사태인지를 물었지만, 응답은 없었다. 또, ACC는 일본항공 본사에 123편이 긴급 신호를 발신하는 것을 알린다.
28분 ACC는 123편이 동쪽으로 향하도록 지시하지만 123편은 이미 완전한 조종 불능 상태였다. ACC는 이때서야 123편이 완전한 조종 불능에 빠진 것을 알게 된다.
31분 ACC는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보다 가까운 나고야 코마키 공항에 긴급 착륙할 것을 제안하지만 123편은 활주로 길이가 더 긴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 착륙을 희망했다. 통상 항공기와 지상과의 교신은 영어로 하는 것이 원칙이나, 123편 기장의 부담을 생각해 일본어의 사용을 허가했다. 이후 ACC와 123편의 통신 일부는 일본어로 이루어졌다.
33분 일본항공은 컴퍼니 라디오 (사내무선)로 123편과 교신했으며, 35분 경에 123편으로부터 짐칸 문이 파손됐다는 대화가 오갔다. 또, 긴급 강하하고 있었으므로 잠시 후에 호출할 때까지 무선을 주시하도록 요청하자, 일본항공은 승낙했다.
40분 ACC는 123편과 타 항공기와의 교신을 위해 123편 전용의 주파수를 준비해 123편에게 그 주파수로 바꾸도록 요구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42분 주파수 변경 지시에 응답이 없자, ACC는 반대로 123편을 제외한 전 항공기에 대해서 그 주파수로 변경하도록 요구해 교신은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자제하도록 요구했지만, 일부 항공기는 이전 주파수로 교신을 계속했기 때문에 ACC는 교신을 하는 항공기에 대해 개별적으로 계속 교신해야 했다.
45분 교신을 대기하고 있던 주일 미군의 요코타 기지(RAPCON)가 123편의 지원에 나서, 123편에게 미군이 준비한 주파수로 변경하도록 요구했지만 123편에서는 조종 불능이라고만 응답했다. ACC가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 접근 관제소(APP)와 교신할 것을 123편에게 제안하지만, 역시 123편은 거절했다.
47분 123편이 치바의 키사라즈로 레이더 유도를 요구하자 ACC는 동쪽으로 나아가도록 지시한 뒤, 조종 가능한 지 물었지만 123편으로부터 「Uncontrolable」(조종 불능)이라는 대답이 왔다. 그 후, APP의 주파수로 교신 대상을 변경하도록 하자 123편은 승낙했다.
48분 무언으로 기장의 거친 호흡음이 녹음됐다.
49분 일본항공이 컴퍼니 라디오 (사내 전용 무선)로 3분간 호출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53분 ACC가 123편을 호출했다. 123편은 「조종불능」이라고 응답했다. ACC와 RAPCON이 대답, RAPCON은 요코타 기지가 긴급 착륙의 준비에 들어가 있다고 대답했다.
54분 일본항공도 호출을 실시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123편이 현재위치를 묻자 APP가 하네다로부터 55마일(100km) 북서에, 쿠마가야에서 25마일(45km) 서쪽지점에 있다고 한다.
55분 (이 때만 「일본어로 말씀드립니다.」라고 교신을 한다)APP로부터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과 요코타가 긴급 착륙 준비를 실시하고 있어 언제라도 최우선으로 착륙할 수 있다고 말하자, 기장이 「준비됐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말이 123편의 최후 교신이 되었다. 그 직후에 APP가 123편에 향후의 의향을 물었지만 응답은 없었다. 그 후에도 56분전까지 APP와 RAPCON이 123편에 대해서 호출을 실시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57분 RAPCON가 123편에 대해, 「귀기는 요코타의 북서 35마일(65km) 지점에 있고 요코타 기지에 최우선으로 착륙할 수 있다」라고 거듭 교신을 시도하고, ACC도 123편에 대해서 요코타 기지로 주파수를 변경하도록 요구했지만, 이때 이미 123편은 추락한 뒤였다.
조종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23편은 계속 하강하여 18시 56분 14초에 대지 접근 경보 장치(GPWS)가 작동했다.
17초 무렵, 기체는 조금 상승했다. 18시 56분 23초, 기체 후부와 오른쪽 주 날개가 수목과 접촉했다. 이때 기수를 올리기 위해 엔진 출력을 올린 것과 함께 기체가 급강하하면서 속도는 346kt(640km/h)에 도달했다. 이후 기체는 일단 상승했지만,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26초, 오른쪽 주 날개가 지면과 충돌하고 동시에 기체의 파괴가 시작되었다(수직·수평꼬리, 오른쪽 주 날개의 이탈). 28초에는 기체 후부가 분리. 기체는 기수를 내리면서 우측으로 회전했다. 18시 56분 30초, 123편은 타카마가하라산의 경사면에 반전하는 형태로 추락, 충돌했다.
18시 56분 28초까지 녹음됐던 음성 기록장치에는 23초와 26초 무렵에 충격음이 남아 있다. 23초의 충격음 직전에는, 기장의 「이제 안된다(もうだめだ!)」라는 절박한 고함소리도 녹음되어 있다.
충격에 의해 기체 앞부분부터 주 날개 부근의 객실은 원형을 알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후의 조사에 의하면 기체의 대부분은 수백 G의 충격이 더해졌다고 한다). 두 날개도 파괴됐다. 한편, 28초 때 분리된 객실 후부와 뒷날개는 산의 능선을 넘어 경사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객실 후부는 능선과의 충돌을 면하고, 경사면에 평행에 가까운 각도로 착지해 수목을 쓰러뜨리면서 능선의 경사면과 접촉하여 천천히 감속했다. 이 때문에 다른 부위에 비해 충격을 덜 받았다. 또, 화재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객실 후부의 좌석에 앉아 있던 여성 4명은 기적적으로 생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은 즉사 혹은 거기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생존자 중 상당수가 이튿날 아침에 수색대가 도착하기 전 사망했다.
추락한 항공기는 사고 7년 전 1978년 6월 2일 오사카 이타미 국제공항에 착륙 중 테일스트라이크로 후미의 손상을 입어 제작사인 보잉에 정비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벌크 헤드는 비행기의 기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데(알루미늄캔의 바닥을 생각하면 된다.) 당시 격벽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일본항공에서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었다.
당시 보잉의 기술자는 이를 수리할 때 2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를 1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만으로 고정했다. 그 결과 계속된 비행으로 압력이 변할 때 금속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가 수직 꼬리 날개를 날리면서[6] 방향 타면을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유압의 분배기인 토크 박스를 터트려 서서히 유압이 새어 나가면서 조종 능력을 상실한 비행기는 추락하고 만다.
또한 테일스트라이크로 인한 동체의 변형이 수리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사고 직전까지 캐빈 뒤쪽의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던지, 바람이 새어 들어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난다던지 등의 결함이 있었다.
이후 테일스트라이크 부분의 정비 부실로 2002년 중화항공에서 여객기가 공중분해된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일본의 항공 업계는 큰 손실을 입게 되었고 일본 측에서 사고 원인 조사 이후 보잉사에 형사 고발을 했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또한 일본 국내선 수요는 25%나 감소 했으며 대부분의 승객이 전일본공수로 갈아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항공은 기업경영에 타격을 입게된다. 일본항공은 피해자 측에게 배상하는 동시에,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사임 또는 해고되었고, 7년 전 사고기의 기장과 정비 총담당자는 자살하였다. 또한 보잉사의 정비불량은 사실이었지만, 일본항공은 보잉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소문에 한동안 시달렸다.
TBS에서 2015년 8월 12일 오후 7시 해당 사고의 30주기를 맞아 "8.12 일본항공 점보기 추락사고 30주기의 진상"을 방송하였다.
2018년 3월 11일 오전 11시에 방송된 MBC '서프라이즈'에서는 최다 사망자를 낸 일본 최악의 항공 사고, JAL 123편의 최후에 대해 다뤘다.
JAL 123편은 1985년 8월 12일 509명의 승객과 15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이륙했다. 그런데 12분 후, 비행기 동체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음이 들려왔다. 비행기 수직 꼬리 날개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에 기장은 긴급 구난신호를 보내고 도쿄 국제공항으로 급히 회향하는데, 조종능력을 상실한 비행기는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고, 기장의 절박한 외침을 마지막으로 군마 현 다카마가하라 산에 추락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탑승객 524명 중 520명이 사망했다. 4명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일본 항공사고조사위원회는 정비 부실로 인한 사고라고 발표했다. 7년 전 JAL123편은 후미 손상을 입었는데, 수리 기술자가 안일하게 손 봤고 그 결과 이날 금속판 일부가 파손되며 이 같은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사고에 대해 몇 가지 의혹이 제기되며 예상치 못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났다.
첫 번째 의혹은 구조 시간. JAL 123편이 추락한 것은 8월 12일 오후 6시 56분인데, 구조대가 파견된 것은 다음날 오전 8시 30분으로 사고 발생으로부터 무려 14시간이 지난 후였다. 찾기가 어려운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구조대 파견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실제로 생존자들에 따르면 당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추락 직후 비행기에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 또 약 40~50명의 사람들이 살아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생존자들이 사망했다고 했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구조대가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두 번째는 미 공군이 구조 의사를 전했지만 일본 정부가 이를 거절했다는 의혹이다. 사고 직후 현장 인근 미 공군 관계자들이 즉각 헬리콥터를 파견하고 구조 허가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오히려 철수해달라고 요청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로 생존자들 역시 비행기 추락 직후 현장에 헬기 한 대가 접근했고 이를 본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으나 헬기가 그냥 돌아가 버렸다고 증언했다.
세 번째는 인근 자위대의 구조 불허다. 당시 인근의 일본 자위대 부대에서도 구조를 위한 준비를 마치고 구조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구조 승인을 거부했고, 한 지휘관은 자발적으로 부대를 파견했다. 이후 일본 정부가 상부의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해당 지휘관을 좌천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JAL 123편 추락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들이 제기되자 진실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다음날 구조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우선 승객들 정원이 사망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야간 구조 장비 부재와 폭우로 인한 추가 피해 발생을 우려해서였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미 공군의 구조 도움을 불허한 부분에 대해서는 누가 그런 지시를 했는지 조사 중이라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발표 이후 의혹과 논란은 커져만 갔다.그러던 중 사람들 사이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전직 자위대원이라고 밝힌 익명의 제보자가 사고 원인이 군부대에서 진행한 비밀 훈련 작전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그가 소속돼 있었던 자위대가 비밀 훈련 작전을 수행하던 중 표적기를 날렸는데 갑작스러운 결함으로 표적기가 조종불능 상태가 되면서 마침 인근 상공을 날던 JAL 123편 수직 꼬리 날개와 충돌했다고 한다. 즉 표적기와의 충돌로 인해 수직 꼬리 날개가 비행기와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일부 사람들은 추락 현장에서 관련 증거물들을 몰래 수거 해야 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미 공군의 구조 도움을 거절하고 이를 수거 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구조대를 파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 내용을 보니 2014년 세월호 사고와 오버랩되었다.
세월호는 사고 발생일(4월 16일) 당일 구조를 거의 하지 않고 시신만 거두고 인원파악에만 골몰했따.
해양경찰특공대, 해군 SSU, 해군 UDT, 육군 특전사의 잠수요원들이 수색, 구조 작업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조류가 거세어 작업이 어려웠으므로, 정조 시간대에 맞춰 오후 6시 30분부터 잠수부 4명을 투입하여 1차 수색 작업을 시작했다. 20시가 되면서 실종자 수색 작업이 중지되었다.
사고 발생 2일(4월 17일)
해경은 정조 시간대인 17일 1시 즈음부터 조명탄을 쏘아 수색을 재개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 지상 최대의 구출작전이란 말은 거짓말이었다.
오전까지 집계된 사망자는 총 9명이었다. 오후에는 민간 잠수부가 실종자들을 수색하다가 파도와 바람에 휩쓸려 실종되었다가 20분 만에 낚싯배에 발견되어 구조되는 등 조류의 영향이 매우 심했다. 10분 뒤,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은 굵어진 빗방울과 조류 때문에 중단했던 수중 수색을 재개한다고 밝혔다. 이때 선내진입을 위해 무인 로봇을 동원하였다. 오후 11시 29분까지, 시신 8구를 추가 수습하였다(사망 18명).
둘째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당일 저녁, 이 본험 리처드함의 조 타인츠 사령관은 공지를 남겼다.
"우리는 구조 요청을 받고 즉시 침몰하는 배를 향해 전속력으로 방향을 바뀌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무슨 일을 하던 즉각 중지하고 구조활동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이 비극의 급박함을 알고 최고의 프로페셔널 정신으로 대응했습니다. 우리 수색팀은 즉각 한국 당국과 통신을 했고, 항해팀은 현장 접근의 안정한 코스를 파악했습니다. 엔지니어들은 최고의 속력(RPM)을 올렸고 선상 승무원을 비행기(헬기) 출발을 준비했으며, 우리 대원들은 신속하게 20인용 구명보트를 장착해 출발을 준비했습니다. 메디컬팀도 즉각적인 준비 상태를 갖추었으며 우리 대원들은 만일의 필요에 의해 조그마한 보트도 대기시켰습니다. 정말 진정한 팀의 정신(effort)이었고 필요한 순간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함께 바라보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본험 리처드'함의 블루팀과 그린팀은 비극에 빠진 친구를 돕기 위해 어깨를 맞대며 일했습니다. 타인츠 사령관이 이처럼 즉각 비상(alert)을 발령하고 긴급 구조에 나섰지만, 결론적으로 세월호 구조를 위해 가장 먼저 사고 해역으로 급파한 MH-60 헬기 두 대는 한국 정부의 사고 해역 진입 불허 방침으로 세월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회항하고 말았다. 이에 관해 미 해군도 16일(한국 시각 17일), 발표한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미 수륙양용 11함대 헤이디 에글 제독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사고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 즉각적인 도움을 위해 항로를 변경했다"며 "그러나 한국의 대응(미숙)은 우리 (구조) 자산의 즉각적인 이용을 덮혀버리고(eclipsed) 말았다"며 이례적으로 당시 한국 정부의 초기 대응 문제점을 지적했다.
세 번째는 자위대의 구조 불허처럼 해군의 구조를 허락하지 않고 황기철 참모총장을 병역비리에 얽어매서 무고를 만든 혐의도 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 일어남
-황기철 해군 참모총장, 바로 통영함을 투입해 사람들 구조하라고 지시
-하지만 상부의 지시로 통영함 출동 무산.
-황총장, 다시 통영함 출동 명령 내렸으나 또 상부에 의해 제지.
-사고 후 황총장, 왜 통영함 투입 안했냐며 혼자 욕 다 먹고 12월에 사퇴
-2015년 3월, 청렴하다고 소문난 황총장, 난데없이 통영함 납품비리 의혹으로 구속
-황총장, 독방이 아니라 잡범들과 같이 수용되어 무차별 폭행까지 당하는 수모 겪음.
-그 사이 황총장 집안은 쑥대밭이 됨.
-2016년 1심,2심에서 황총장 무죄 판결 후 대법원에서도 무죄 판결
-정부, 무죄 판결 나자 보국훈장 하나 주겠다고 함
자 평행이론도 이런 것이 없다. 하늘과 바다이지만 일본항공 123편과 세월호 모두 일부러 구조가 늦어짐, 둘째 미군 도움 거부, 셋째 군대 파견 불허의 3가지 공통점이 있다.
세월호 이후에 정부를 불신하고 각자도생이란 말이 있다. 각자도생이란 각자 삶을 도모하자는 말이지만 실제는 도망가 살라는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이런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함이지만 사실 일반 국민이 공부를 해야 권력이 민간에 없으니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런 사태를 겪고도 정부가 필요하고 애국심을 운운하는 자들의 뇌속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필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빨대를 꽂기 위한 수탈을 위한 존재이다. 따라서 정부를 없애는 무정부주의 뿐만 아니라 주권을 국민 개인에게 찾아오는 아나키즘 사상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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