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과 걱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기독교 불교 유교

in kr •  7 years ago 

고민과 걱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기독교 불교 유교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운 시절에는 사람의 소원은 의식주가 풍족하여 경제적인 윤택을 누리고 걱정 근심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일반인의 염원일 것이다.
어니 젤리스키,『모르고 사는 즐거움』중에서 걱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2.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3. 걱정의 22%는 사소한 고민이다.
  4.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5. 걱정의 4%는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는 걱정근심은 기우처럼 불가항력적인 것이 크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란 해결책을 내놓았다.
    성경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25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여러분의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26 하늘의 까마귀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으며 창고에 모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그들을 먹이십니다. 여러분은 새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27 여러분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 자라도 늘릴 수 있습니까? 28 여러분은 왜 옷 걱정을 합니까? 들의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수고하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29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백합중 하나만큼 입지 못했습니다. 30 믿음이 약한 사람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늘 하물며 여러분이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습니까?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32 그런 것은 모두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다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33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이런 것도 곁들여 받을 것입니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은 내일에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합니다.”(마태오복음 6,25-34)
    불교의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一念身不求無病 身無病則貪欲易生
    첫째로 몸에 병 없기를 구할 생각하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是故聖人設化 以病苦爲良藥.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의 고통으로써 양약[좋은 약]을 삼으라’하셨다.
    二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驕奢必起
    둘째로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없으면 교만과 사치하려는 마음이 반드시 일어난다.
    以患難爲逍遙.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소풍하듯 살아가라’하셨다.
    三究心不求無障 心無障則所學躐等
    셋째로 마음을 연구하는데 장애 없기를 구하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등급을 뛰어넘게 된다.
    以遮障爲解脫.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막는 장애를 해탈이 되게 하라’하셨다.
    四立行不求無魔 行無魔則誓願不堅
    넷째로 수행하는데 마(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시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맹세의 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以群魔爲法侶.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마귀 무리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짝을 삼으라.’고 하셨다.
    五謀事不求易成 事易成則志存輕慢
    다섯째로 일을 꾀하되 쉽게 완성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성공하면 뜻을 경솔과 태만에 있게 된다.
    以留難爲成就.
    성인이 말씀하시되 ‘어려움을 남겨두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다.
    六交情不求益吾 交益吾則虧損道義
    여섯째로 친구를 사귀는 정에 내가 이롭기를 구하지 말라. 교제에 내가 이롭고자 하면 도의 의리를 덜고 손상하게 된다.
    以敝交爲資糧.
    성인이 말씀하시되 ‘교제를 다하여서 식량으로 삼으라’하셨다.
    七於人不求順適 人順適則心必自矜
    일곱번째로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맞춰주기를 바라지 말라. 타인이 내 뜻에 맞게 순종해주면 마음이 반드시 스스로 뻐기게 된다.
    以逆人爲園林.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거스르는 사람들로서 정원과 숲을 삼으라’하셨다. -후략-
    맹자의 이루 하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어서 나를 대우함에 폭력적이고 어거지를 쓰면 군자가 반드시 자신 스스로 반성하여서 내가 반드시 인자하지 않았는지 무례하였는지를 돌아본다. 이런 인물이 어찌 오게 되었는가 자문한다. 스스로 돌이켜 봐서 인자하며 스스로 반성해 예의가 있는데도 횡포함이 여전이 있다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반성해서 내가 반드시 충실하지 못했는지 돌아본다. 내가 스스로 반성해도 충직하나, 거역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거든 군자가 말하길 “‘이 사람은 또한 망령된 사람일 뿐이다’ 고 하며 이와 같다면 짐슴과 어찌 다르겠는가? 짐승에게 또 어찌 힐난하여 책망하리오?”한다.
    그래서 군자는 평생의 근심이 있어도 하루 아침 짧은 근심은 없으니[君子가 有終身之憂이오, 無一朝之患也;군자 유종신지우 무일조지환야] 만약 근심이 있다면 순임금도 사람이며 나도 또한 사람이지만 순임금은 천하에 법[본보기]이 되어 후세에 전하시거늘 나는 시골 사람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근심스러운 것이다. 근심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과 같은 聖人성인이 될 뿐이다. 만약 군자의 근심이 없어지려면 인자함이 아니면 하지 않고 예의가 아니면 시행하지 않는다. 만약 하루 아침 근심과 같은 사소한 걱정은 군자가 근심하지 않는다.
    결론을 내리면 기독교에서는 일상의 사소한 의식주등은 하나님에게 맡기기만 하면 편안하게 근심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며 불교에서는 병이나 근심들도 좋게 이용하여 마음수양에 이롭게 도구로 삼으라는 뜻이다. 유교에서는 먹고사는 자질구레한 하찮은 잔가지같은 근심걱정은 하지 말고 성인에 이르고 인자함과 예절을 실천하는 큰 거시적이고 거국적인 근심걱정을 하라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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