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이렇게 망했다, 양진인, 임홍빈, 고종, 천황, 김굉집, 흑선, 천황부, 프랑스, 미국, 외교분쟁, 동학농민전쟁, 김옥균, 이토 히로부미, 이명복, 청일전쟁, 북양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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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초대 군주.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휘는 재황(載晃), 형(㷩), 희(熙). 연호는 개국(開國), 건양(建陽), 광무(光武).

타민족과의 비교와 열등 의식에서부터 촉발된 다른 지역 및 국가에 대한 혐오, 정벌론 대두와 침략 전쟁, 식민지 개척, 제국주의의 광풍(狂風)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에 조선의 왕으로 즉위해서 안으로는 부국강병, 바깥으로는 국체 보존(國體保存)이라는 2가지 시대적 대과업를 맡았으나 어느 것 하나 달성하지 못해 결국 망국의 군주가 된 자. 두 목표를 전부 달성하면 명군의 대명사가 되었겠지만 고종이 보여준 행각은 이도 저도 아닌 우유부단한 모습이었으며[13]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당시 스스로의 힘이 아닌 청나라군에게 파병을 요청하는[14] 등 조선의 멸망을 스스로 가속화하였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병합 야욕 의도를 간파하여 대한제국을 세우고 광무개혁을 단행하여 근대화를 시도하였지만 종국(終局)에는 일본에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게 된 망국의 군주다.[15]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읽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바보는 아니었지만 밝다고 볼 수는 없었고 큰 힘에 맞설 시도조차 하지 않고 굴복할만큼 나약하지는 않았으나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결단력은 무척이나 부족했다.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까운 시대 과제를 해결할 비범한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가지지 못한 보통 사람. 왕권 유지 등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정치술은 대단했지만 정작 외세에는 한없이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여줘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악영향을 많이 끼쳤다.

재위 기간이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 영조(52년), 숙종(46년) 부자에 이어 역대 3번째로 긴 군주다. 게다가 태황제 3년을 더하면 숙종을 뛰어넘고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을 더하면 56년으로 영조를 거뜬히 뛰어넘어 발해 문왕의 기록에 근접한다. 망국이 없었다면 한국사의 기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그의 치세에 조선이 개항(開港)부터 시작해 실질적으로 망했으므로 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거침없이 고종을 망국의 원흉으로 까고, 고종을 그나마 후하게 평가하는 측도 '잘 해보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 '운도 안 따라줬고 결과도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졌지만 잘 싸웠다식의 동정론적 평가, 혹은 대한제국 멸망 후 불우한 황족들의 삶[16] 등으로 인한 동정표들이 주를 이룬다.

고종을 박하게 평하는 측은 혼란한 시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고종이 군주로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과 그나마 치적이라 할 수 있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조차 황후 민씨 일가의 부패[17]와 세도, 두루뭉술한 행정, 서양 문화와 기술에 대한 이해 부족 등의 여러 실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점을 들어 평온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별볼일 없는 군주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고종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고종을 범군(梵君)을 넘어 암군으로 보는데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때의 처신이다. 임오군란 때 앞에서 나서지도 뒤에서 수습하지도 못해서 일을 너무 크게 벌렸고 특히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려고 스스로가 아닌 외국 군대의 개입을 허용하는 오판을 했다는 점[18]에서 군주의 정치에 가장 필요한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그 결과 조선 멸망의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 방증된다는 시각이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고종 이후의 식민지 시기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한다. 망국의 마지막 군주들은 새로운 권력에 비해 폄하되기 쉽고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이씨 조선은 망할 수 밖에 없는 나라였다"는 인식을 심는데 노력했다. 그래서 고종에 대한 폄하를 식민사관의 일종으로 보고 이를 멈추고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존재하며, 민족주의가 최고조에 이른 1990년대에는 반짝 평가가 상승하기도 했다. 고종에 대한 단순한 폄하나 왜곡도 지양해야겠지만, 그가 실행한 정책이나 결정에 대한 결과를 보면 식민사관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운 비판점도 분명히 있었다.

  1. 배경[편집]
    고종은 선왕 철종과 법적으로 9촌[19], 실제 혈통상으로는 무려 17촌이었다. 고종은 원래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8대손으로 효종(인평대군의 형) 후손들로 이어진 왕실 직계와는 너무나도 멀고 먼 방계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여 가까운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그래도 17촌이나 9촌이나 둘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먼 친척이었다. 그래서 "흥선군의 로비로 철종과 가까운 다른 왕손을 제치고 고종이 왕이 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어차피 철종 다음 왕은 어떻게 따져봐도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후손 중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한 번 보자.

그 전에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은 철종이 사망함으로써 효종의 실제 혈통이 사실상 끊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당시 철종의 후계자가 될 종친들 중 핏줄상 가장 가까운게 17촌이란 얘기다.[20] 철종 사망 당시 왕족들은 전부 사도세자의 후손들, 정확하게는 3명의 서자인 은언군, 은신군[21],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다. 왕위 계승 법칙에 따르면 후임 왕은 반드시 선왕의 아랫대에서 나와야했다. 철종 승하 당시 철종의 조카뻘 왕족들은 은언군 계열인 이재덕, 이재성, 은신군 계열인 이재원, 이재긍, 이재면, 이명복, 이재선, 은전군 계열인 이재근이 있었다.[22][23]

먼저 은언군가를 보자. 이재덕과 이재성은 은언군의 장손 익평군의 아들이다. 이 중 이재덕은 은언군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종손이었고 이재성은 3살밖에 안 된 너무 어린 아이인데다 서출이었다. 더군다나 이재덕은 양자였다. 이재성이 익평군의 친아들이긴 하지만 서출이라 은언군 가문을 잇지 못했기 때문에 이재덕이 입양온 것이고 그 시기도 철종이 죽기 바로 직전이었다. 게다가 실제로는 중종 때 갈라진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기에 혈통적으로 너무 멀었다. 그래서 은언군가에서는 왕이 될 사람이 없었다.

그 다음 은신군가를 보자. 은언군파가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상황에 그 다음 서열인 은신군가에서 왕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바로 이 은신군의 양자인데 남연군과 그의 자손들은 실제로는 인조 아들(효종 바로 아랫 동생 인평대군)의 후손이기 때문에 혈통상으로도 그나마 왕통과 가장 가까웠다. 또한, 후손들도 나름 많이 있어 현실적으로도 가장 안정적으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은전군가의 경우는 서열상 은신군가보다 낮으며 실제 혈통으로도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라서 실제 왕통과의 거리가 위의 은신군가보다도 더 멀었다.[24] 즉, 법적 촌수로든 실제 혈통상 촌수로든 은신군가에 계승권이 밀리면 밀렸지 결코 앞서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은신군 - 남연군 집안에서 왕이 나온게 흥선군의 로비 때문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그러나 남연군 후손들은 많았고 그 중에서 굳이 이명복이 왕으로 선택받은 것은 로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흥선군의 형인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에겐 모두 아들이 1명씩 있었기 때문이다. 흥녕군과 흥완군의 자식은 양자였지만 이들도 다 친동생들의 자식이었기에 혈통의 문제는 없었다. 흥녕군의 아들(양자)은 이재원[25]이었고 흥완군의 아들(양자)은 이재면[26], 흥인군의 아들은 이재긍이었다. 종법으로 따지면 저들이 이명복보다 서열이 높았지만 저들을 제치고 이하응은 자신의 친자를 왕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재긍의 경우 생모가 안동 김씨였기 때문에 안동 김씨 세도를 경계하던 차기 왕위 지명권자 신정왕후(효유대왕대비)는 이재긍을 후계자로 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이었다.

아무리 형 흥완군에게 양자로 들었다지만 자신의 적장자인 이재면을 놔두고[27] 차남인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한 것에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철종이 승하할 당시 이재면은 19살로 당시 기준으로는 성인이었다. 따라서 이재면이 왕위에 오르면 흥선군이나 조 대비가 섭정하며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흥선군은 나이가 찬 이재면 대신 아직 어려 당분간은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혈통 문제 및 이하응의 사전 작업으로 이명복이 조선의 제26대 임금인 고종(高宗)으로 정식 즉위하였다.[28]

  1. 생애[편집]
    나무위키상세내용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 평가[편집]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그렇게 무능하거나 나라를 망친 암군까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한국사의 성군들에 비하진 못할지언정 능력은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고 자기자신도 노력은 한 왕이었으나, 시대는 한발 늦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본인도 우유부단하고 자신의 권력을 채우려 하다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 결단력이 없어 언제나 한발 부족한 대응으로 종국엔 망국의 군주로 남게 되었다.

왕권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본인은 무능하진 않았고 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고 최대한 대응하려했다. 정치적 감각이 있긴 했지만 다각도로 급변하는 19세기 조선이 필요로 하는 수준은 되지 못했다. 본인의 능력 여하에서는 최대한 노력했지만 당시 급변하는 세계정세에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일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핵심이 어디인지 혼동하였고, 둔하지도 않았지만 민첩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시대가 근대라는 것을 알았지만 전근대적으로 행동했다. 한마디로 격동기 속 바뀌어가는 세상을 파악하긴 했지만 변화하는 세태에 빠르게 탑승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잔재에 더 비중을 둔 왕이었다. 다만 결국 전제군주제 국가의 군주였던 만큼 고종의 권력과 안위는 곧 대한제국의 주권이었다. 개혁과 개화 작업들이 끝나고 난 후에는 대한제국을 입헌군주제 민주주의 국가로써 개편하려고 했었던 만큼, 결국 중립적인 평가로써 본다면 조선 수명 500년의 막바지 부분에 집권한 왕이라 볼 수 있다. 외부에서 가해진 폭력과 폭압, 내부의 기회주의자와 사대주의자, 쌓일 대로 쌓여서 한계에 달한 부정 부패와 모순들로 인해서 고종이 행한 개혁들 중 상당 수는 결국 실패하였으며, 이는 조선의 수명을 단축시켰고, 행운, 시간, 돈, 사람 모두 따라주지 않은 개혁 군주로써의 고종 집권은 결국 죽음에 가까운 국가의 종말을 맞이했다고 봐야한다.

결과적으로 수십년강의 고종 재위기에 조선 왕조가 사실상 망했으므로 평균 이상의 명군(明君)이라 보는 시각은 없으며, 이태진 교수 류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는 것과 '대한제국을 선포했다'는 점 정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평가가 있고, 반대로 일제강점기를 개막한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구제불능의 암군, 처음에는 신하들에게 벼슬을 팔다가 나중에는 일본에 나라까지 팔았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여기에는 삼정의 문란의 재점화, 위정 척사 운동과 민중의 개혁에 대한 거센 반발 및 명성황후 일파 민씨 척족들의 세도, 부정부패가 이미 만연하여 세기의 책략가가 태어나지 않는 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으므로 고종에게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국의 군주로서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것에 대하여 최선임자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29].

조선은 이렇게 망했다, 양진인, 임홍빈, 고종, 천황, 김굉집, 흑선, 천황부, 프랑스, 미국, 외교분쟁, 동학농민전쟁, 김옥균, 이토 히로부미, 이명복, 청일전쟁, 북양대신

그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문제점은 여러가지 사건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재위기에 외척인 민씨 척족 일파의 부패를 사실상 방조,방관하거나 조장한 점,[30]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내부의 반란인 임오군란과 민란인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나라 군대를 부른 것도 모자라[31][32] 아관파천을 저질러 나라의 주권을 외국에 넘겨줄 계기[33]를 제공한 점과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협회를 무너뜨리고 만민 공동회를 탄압해버린 일 등이 꼽힌다[34]. 근대적인 재정학 지식이 결여된 상태로 국정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재원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로 황실의 각종 집기에서부터 양무호 등 외국산 무기, 전함 등을 산다거나[35] 무분별하게 돈을 썼고, 경제 정책은 엉망으로 수립하여 일본이 대한 제국에 억지로 차관을 도입, 거액의 빚을 지게했을 때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빚을 갚지도 못했으며, 민간 주도의 국채보상운동까지 일어났다[36]. 게다가 근대적 개혁이라고 실시한 광무개혁조차 결과적으로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본인과 순종은 강제 퇴위, 나라는 멸망, 자녀 둘은 일본과 정략 결혼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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