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와 금광 열풍
일제에 의한 무단 통치로 인해 대다수의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피폐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식민지 시대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먹고 살아가야 할 방도를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농촌에서 일본인 지주의 횡포에 시달렸던 농민들은 도시로 흘러들어와 하나 둘 늘어나고 있던 공장의 노동자로 흡수되는가 하면, 이조차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도시의 빈민으로 정착하여 각종 잡일을 도맡아 하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세계 경제의 요동과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1929년, 세계는 대공황에 휩싸인다. 그 여파는 1930년 1월 일본과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황금광시대가 막 시작될 무렵인 1930년, 조선의 각 지역에서는 풍년이 들었지만 풍작의 상황은 오히려 공황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풍작 공황은 새롭게 이식된 자본주의적 생산구조가 낳은 비극이었다. 조선인구의 80%는 여전히 농민들이었지만, 사회구조는 이미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자본주의적 체제로 재편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상은 어느덧 밥만 먹고는 살 수 없고 돈이 생겨야 살 수 있는 시대로 바뀌고 있었다. 사실상 농산물 가격의 폭락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당시 식민지 조선은 최악의 경제 위기상태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30년 1월 11일 일본은 그동안 금지했던 금수출을 재개한다고 선포하기에 이른다. 금본위시대로 다시 접어든 것이다. 금본위제도란 화폐의 가치와 금의 가치를 연계시키는 제도로 금본위시대에 금은 현금과 동일했고, 국제 간 무역 거래에서의 원칙적인 결제수단이 되었다. 은행에 금을 가져가면 돈으로 무한정 바꿔주었다. 때문에 모든 상품의 가격이 폭락했지만 유독 금값만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대공황의 시대에, 가격이 떨어지지 않고 생산되는 족족 팔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황금은 충분히 매력적인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본위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금의 해외 유출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1931년 12월 금 수출은 다시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의 변화와 상관없이 국제통화로서의 금의 위상은 손상되지 않았다. 금본위제의 포기는 금 수출의 금지인 동시에 금 수입의 금지를 의미했으므로 각국은 금을 보유하기 위해 전보다 더 열을 올렸다. 왜냐하면 해외에서도 금을 사 올 수 없으니 땅을 파고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군부는 대대적인 산금(産金)정책을 펼쳤고 1930년대 한반도의 골드러시, 금광열풍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금광으로 몰려들었다. 하루일과가 끝난 금광 입구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살풍경이 매일 같이 펼쳐졌다. 광부들이 벌거벗고 줄지어 늘어서서 신체의 특정부위까지 보여주어야 했고, 감독들은 혹시나 금이 박혀 있을까봐 광부의 항문까지 찬찬히 검사했던 것이다. 어떤 광부들은 자신의 팔다리를 다치게 해서라도 몰래 금을 빼돌리고자 하였다.
금광에서 몰래 빼돌린 금들은 대부분 밀수출을 통해 중국 등지로 유출되었다. 폭이 100미터도 되지 않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가서 금을 팔면 조선의 시세보다 10~50%까지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백8십 돈의 금을 숨겨 압록강을 넘으면 한 번의 기차여행으로 최소한 1백8십 원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신문기자 월급은 40원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이익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금을 둘러싼 각종 투기, 사기, 강도 사건들도 넘쳐났다. 백주에 강도가 금반지를 낀 젊은 부부의 손을 단칼에 잘라 도망간 사건도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금광 열풍에 속물이나 가난한 농민들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식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카프(KAPF)의 일원이었던 팔봉 김기진이나 〈봄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김유정, 풍자의 대가 채만식, 그리고 유석 조병옥까지, 얼핏 하나로 연결되지 않을 듯한 이 네 사람들에게는 뜻밖에도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이들은 모두 ‘일확천금의 꿈’을 찾아 금광으로 떠났던 경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누런 노다지는 그들을 외면했고, 이들의 꿈은 한낱 백일몽으로 끝나버렸다. 이는 훗날 김유정이 남긴 소설 〈금 따는 콩밭〉과 〈노다지〉, 채만식의 〈금의 정열〉에서 그 열병의 자취를 그대로 확인할 수가 있다.
채만식은 한때 금광 기술자와 투자자를 연결하는 금광 브로커로 일한 바 있다. 때문에 그의 작품 〈금의 정열〉은 픽션이라기보다는 논픽션에 가깝다. 브로커로 나서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고 한다. 매너와 언술, 교양과 인맥 그리고 매물에 대한 전문 지식이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 모멸감 따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 브로커들은 대체로 인생의 끝을 본 지식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금 따는 콩밭
1935년 〈개벽〉 3월호에 발표된 김유정의 단편 소설로, 가난하고 무지한 농민인 ‘영식’이 금점판에서 이력이 닳은 친구 ‘수재’의 꼬드김에 빠져 자신의 콩밭에서 금줄을 찾으려다 오히려 한 해 농사를 다 망치고 망신을 당한다는 줄거리이다. 이 작품에서도 김유정 특유의 해학성, 비참한 농촌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난다. 비록 가난하긴 하지만 한 해 한 해 농사를 지어 근근이 살아가던 한 농민이 금(金)이라는 물질의 유혹에 빠져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모습을 통해, 당대 식민지에서의 금광열풍, 일확천금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얼마나 사회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확산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식민지 시대의 금광 열풍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청서출판)
황금광시대(The Gold Rush,1925)란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가 있다. 그런데 같은 소설 제목의 유명한 소설이 있고 또 1930년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은 금에 미쳐 있던 황금광시대였다. 채만식이 지은 황금광 시대 [黃金狂時代] 《조광》에 1938년 1월부터 9월까지 9회 연재하였던 「천하태평춘(天下泰平春)」은 1940년 ‘태평천하(太平天下)’로 개제하여 『삼인장편집(三人長篇集)』(명성사)에 수록되었고, 1948년 동지사(同志社)에서 다시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이후 1949년 중앙출판사에서 ‘황금광 시대’로, 1958년 대동사에서 ‘애정의 봄’으로 개제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개제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으며, 이들 작품을 「태평천하」의 해적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천하태평춘」의 ‘윤 직원’이 ‘윤 장의’로 변경된 것 이외에 목차나 내용상의 변화가 거의 없다.(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 1917-1950, 고려대학교출판부)
그런데 제목을 잘 보니 금광산인 金鑛이 아니라 금광金狂 즉 금에 미쳐 있다는 미칠 광을 쓴 것이 매우 이채롭다.
1934.09.17. 동아일보 3면 사회 五百五十鑛區中(오백오십광구중) 우리것은二百五區(이백오구)라는 기사가 있다.
또 1934.01.02. 동아일보 18면 사회 기사를 보면 金鑛(금광)은 어디로 라는 기사가 있다.
달리는"골드·러쉬"로 황금광 시대를 연출 하엿으며 또 이것이 단지 一(일)조의 꿈만이 아니다. 대재벌에 팔린 조선인소유의 금산은 수다하다. 다음에 보이는 중요한금산의 연산액과 광업권자, 매가(賣價(매가)...라고 하여 금광 개발을 소개하고 있다.
「식민지기 문학과 근대성」정혜영 저 소명출판을 봐도 1930년대 초반 금값 폭등에 따라 일본은 물론, 조선 전체에 ‘골드 러쉬’가 발생, 일반 서민들은 물론 작가 대학교수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등 ‘유식계급인물’ 들에 이르기까지 금광은 식민지 조선인의 최상의 치부법으로 소개된다.
http://blog.naver.com/imaginehan/10140428948
2011년 1월 20일 오후 10시 방송되는 KBS 1TV '역사스페셜‘에서 식민지 조선의 골드러시와 그 어두운 단면이 방영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캘리포니아 서부개척과 같은 골드러쉬가 있었는데 1930년대 금광개발 열풍에 힘입어 금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32년까지 10톤을 넘지 않던 금 생산량은 1939년에는 31톤, 조선은 세계 여섯 번째 금생산국이 됐다. 채굴기술이나 장비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 황금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금광으로 모여들었다. 1929년 대공황 뒤 국제시장에는 환율제와 금본위제가 공존한다. 불안한 환율을 버리고 금본위제를 선택한 일본은 황금확보에 혈안이 되고, 전쟁준비를 위해 황금수요는 더더욱 높아진다. 금광 탐사, 개발에 지원금을 쏟아 붓고 시중의 금을 비싸게 매입하기 시작한 일본에게 조선은 언제나 준비돼있는 황금인출기였다. 30세가 넘도록 변변한 직업도 없이 떠돌던 최창학은 백 여 명의 금전꾼들과 함께 고향 근처 조악동 폐금광에서 금을 찾기 시작했다. 4년 동안의 기나긴 기다림, 최창학은 결국 금맥을 찾았고 그 이윤으로 금광을 사재기 했다. 1930년대 말 최창학이 매각한 금광으로 일군 재산은 1천만원으로서 최창학은 단번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동네 훈장 출신의 방응모가 황금으로 인생역전, 오늘날의 조선일보를 일으킨다. 황금광시대의 하이라이트는 광업권 투기였다. 일본의 세계적인 재벌그룹이자 자본이 넉넉한 미쓰비시, 닛산, 미쓰이 그룹은 가격이 폭등한 광산들을 사들였다. 1930년대 조선반도를 들썩이게 했던 황금열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한국광물자원공사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한 해 국내 금 생산량은 2774㎏으로 결국 선조들이 곶감빼먹듯 자원을 다 일제에 수탈당하고 적은 양만 남게 되었다.
한국이 미국의 서부개척 골드러쉬처럼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황금광시대를 가졌다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 2017년 11월 27일을 봐도 금광을 캐는 것과 유사한 사업이 있다. 즉 비트코인 채굴 사업인데 금광을 캐는 것과 마찬가지로 mining이란 말을 사용한다. 또 1930년대처럼 많은 한국인들이 다투어 시도를 하는 것도 유사하다.
그런데 이미 비트코인은 채굴 난이도가 높고 거의 많이 채굴이 된 상태라 지금 뛰어들면 이미 늦다. 물론 유사한 이더리움이나 대쉬, 라이트코인등은 시도가 가능할수도 있다. 문제는 채굴하는데 전기료가 든다는 점인데 한국의 전기료로는 감당이 안될수 있고, 여름에는 온도가 높아서 힘들수도 있다.
역사가 평행이론처럼 반복된다는 점, 금광으로 일확천금 부자와 빈털터리가 순식간에 생기는 것등이 비슷하다. 금과 비트코인의 차이는 금은 자연히 만들어질수도 있지만 비트코인은 2100만개 채굴 한정으로 기회가 점차 줄어든다는 것이다.
Warning! This user is on my black list, likely as a known plagiarist, spammer or ID thief. Please be cautious with this post!
To get off this list, please chat with us in the #steemitabuse-appeals channel in steemit.chat.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ering has voted on behalf of @minnowpond.
If you would like to recieve upvotes from minnowponds team on all your posts, simply FOLLOW @minnowpond.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