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초의 여성의사 블랙웰과 플렉스너 보고서 자향미한의원 튼살치료

in kr •  7 years ago 

미국 최초의 여성의사 블랙웰과 자향미한의원 튼살치료

2017년 8월 20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운명을 바꾼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됐다. 지난 1847년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제네바 의과 대학교에서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투표가 진행됐다. 이는 한 학생의 입학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뜻밖에도 투표를 하는 이유는 입학을 원하는 학생이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26살의 여성 엘리자베스 블랙웰이었다. 당시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철저히 제한된 시대로,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 분야는 오직 남성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전 세계를 통틀어 여의사는 한 명도 없었다. 의대에 여학생이 입학한 경우 역시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의대 지원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는 왜 의대에 지원하게 된 걸까?
1821년 4남5녀 중 셋째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느날 그는 뜻밖의 일을 겪게 됐다. 부인과 질병을 앓던 친구가 자신의 환부를 남자 의사에게 보이는 게 부끄러워 병원에 가지 못 했고, 결국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 일은 엘리자베스에게 큰 충격을 줬고, 그는 여성 환자들을 위해 여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29곳의 의대에 입학 원서를 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 마지막 남은 한 곳이 제네바 의과 대학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입학을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학장을 찾아가 매달렸고, 결국 학장은 투표에서 학생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할 경우 입학을 허락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어차피 학생들이 그의 입학을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47년 10월 엘리자베스의 입학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 결과, 재학생 모두가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다.
엘리자베스는 매일 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재학생 150명 모두를 찾아가 자신의 입학을 찬성해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던 것이다. 이에 학생들은 모두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가 반대할 것이라고 여겨 별 생각 없이 찬성 표를 던졌고, 그 바람에 만장일치의 결과가 나오게 됐다.
결국 그렇게 엘리자베스는 가까스로 제네바 의과 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하지만 그 후 그는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여자와는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없다며 왕따가 되어 집단 수업 거부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2년 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자베스는 미국 최초의 여의사가 됐다.
그러나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여자라는 이유로 그 어떤 병원에서도 일할 수 없었고, 뉴욕에 개인 병원을 개업했지만 화농성 안내염으로 한쪽 안구를 적출하는 큰 수술까지 받고 말았다. 어떤 고난도 버텨왔던 그는 계속되는 시련에 모든 걸 포기하려 했다. 그때 부인과 질병을 앓고 있던 여성이 그를 찾아왔고, 다시 용기를 얻은 그는 계속 의사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1853년 진료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 하는 환자들을 위해 뉴욕 빈민가에 무료 진료소를 연 엘리자베스는 그곳에서 만난 고아 소녀 캐더린을 입양해 함께 살면서 환자 치료에 헌신했고, 평생을 여의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0년 5월 불꽃같은 삶을 살던 엘리자베스는 영국에서 89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뒀다. 장례식장에는 엘리자베스 덕에 의사가 될 수 있었던 후배 여의사는 물론, 많은 남의사들도 찾아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사회적 편견을 이겨내고 미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엘리자베스 블랙웰을 위해 1974년 미국 정부는 일생을 환자를 위해 헌신한 공적을 기려 기념우표를 제작하기도 했다.

에이브러햄 플렉스너(Abraham Flexner, 1866~1959)는 근대 의학과 과학교육을 미국의 대학에 소개한 교육자이다. 플렉스너는 켄터키 루이빌에 있는 진보주의적 대학준비학교의 창립자이자 이사(1890~1904)였다. 그는 미국 교육기관에 대한 평가서인 『미국의 대학: 비평』(The American College: A Criticism, 1908)을 출판한 뒤 카네기재단의 위임을 받고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의과대학을 평가했다. 이 보고서가 작성되기 이전에 미국의 의학교육은 1880년대부터 1910년에 이르기까지 의과대학이 종합대학의 일부가 되면서 많은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학문적인 발전을 위해 의과대학이 종합대학의 일부가 되었으나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어서 충분히 연구하지 못한다는 점, 병원과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해 임상교육과 연구가 매우 부진하다는 점 등이 큰 문제였다. 이러한 심각성을 깨달은 미국의사협회 의학교육위원회가 카네기 교육진흥재단에 미국 의과대학의 실태조사를 의뢰한 것이다. 당시 존스 홉킨스 대학 출신의 플렉스너는 교육 전문가이면서 외부평가자라는 적절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보고서를 쓰는 데 적임자로 선임되었다.
이 평가보고서는 미국 의학교육계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플렉스너가 실태조사를 할 당시 미국과 캐나다에는 155개 의과대학이 있었으나, 『플렉스너 보고서』 이후 미국에는 1922년 81개 의과대학에서 1929년에는 76개로 감소했다. 즉 플렉스너는 자신의 보고서를 통해 적절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교육기관의 자격을 박탈함으로써 의과대학 인정평가의 목적을 명확히 달성했다. 이러한 실제적인 인정평가의 결과를 통해, 이미 20세기 초에 플렉스너는 미국 의학교육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보고서에 제시한 것이다.
그는 1913년부터 1928년까지 15년 동안 록펠러재단에 소속된 일반교육위원회의 사무총장으로서 기부자들에게서 받은 5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의학교육을 개선하는 자금으로 사용했다. 1930년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 고등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고등교육기관의 모범 중심지로 키워보려는 야망을 실현시켰다. 1930년부터 1939년까지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세계적인 과학자를 여러 명 초빙했는데, 특히 1933년에 아인슈타인이 왔을 때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플렉스너 보고서』에서 그는 1893년에 설립된 미국 최초의 의학전문대학원인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을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삼으며 기초과학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학생들을 입학시키는, 질적으로 낮은 의과대학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따라서 의과대학의 입학기준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사학위 취득자로서 과학적인 기초가 마련된 학생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고등학교 교육수준 또는 이 이하에 머물렀던 의과대학 입학조건을 점차 높이면서 결국 학사학위를 요구하게 되었고 의학전문대학원으로의 변모를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
플렉스너가 주장하는 또 다른 점은 과학적인 기초 아래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그 목적과 방법에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학의 발전사를 보면 해부학이나 병리학 같은 의학에 기초가 되는 학문보다 외과와 산부인과 같은 실용학문에 좀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플렉스너는 ‘임상의학의 기초는 기초의학’이기 때문에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는 마치 방패에 양면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두 명의 기사가 만나 방패의 색깔에 대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것과 같다.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의 우위를 따지는 논쟁은 방패의 어느 쪽이 옳은지 토론하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진술한다.
플렉스너 보고서,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한길사

황상익 교수님의 글에 따르면 <플렉스너 보고서>에 의해 이 시기의 의학교육 개혁이 비롯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변화에 대해 촉매제로서 작용을 한 점은 틀림없을 것이다. 플렉스너의 전략이며 표어라 할 수 있는 실험과 과학에 기반한 의학 연구와 교육은 과학주의(scientism)가 만연하던 당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과학이라는 이름 앞에서 동종요법사 의과대학과 약초요법사 의과대학 등은 맥없이 스러져 갔다. 역시 과학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함량 미달인 대부분의 흑인의과대학과 여자의과대학 들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또한 과학이라는 상표로 비정규 의료인 (sectarian practitioner)에 대해 우위를 주장하던, 미국의사협회 쪽 의사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리고 앞으로의 의학 교육은 더욱더 과학에 기반한 것이 되어야 했으며 의학 연구와 긴밀한 관련을 갖도록 추동되었다.
플렉스너의 의학교육관은 실제 진료를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연구와 그것에 기반한 교육이었
다. 그에게는 의과대학이 적절한 수의 의사를 사회에 배출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었다. 또한 그는 저소득층 의과대학생이 직면하는 경제적 어려움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플렉스너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1910년 현재 전국적으로 각각 300명 가 량의 재학생을 갖는 30개나 31개의 4년제 의과대학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당시 의과대학의 3/4은 도태되어야 하고 학생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야만 한다.
현대 서남대 의대 사태나 한국에서 대체의학이나 한의학이 입지가 좁아진것도 석유재벌 록펠러가 후원한 플렉스너 보고서의 사태 때문이다. 의학이 인과관계가 분명한 과학인가? 그럼 결과가 100%가 나와야 하는데 의학은 경험이 누적된 통계학일 뿐이다. 블랙웰이 이룩한 여권신장을 플렉스너가 한큐에 다 까먹었다.
필자도 자향미한의원 www.imagediet.co.kr 에서 튼살 치료를 하는데 가끔 여성의사가 진료하는지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튼살 부위 자체가 허벅지나 엉덩이, 가슴등 은밀한 부위도 시술하여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산부인과 질병도 아닌데 성별에 따라서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에 실소를 금할수 없다. 가슴에 총상을 맞았는데 가슴을 보여주기 싫다고 치료 거부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도 엘리자베스 블랙웰등 선구자적인 여성이 있기 때문에 여성 치료의 영역이 넓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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