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과 결혼 생활 3년째가 되던 해 세자빈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돌리려다 폐위되어 쫓겨났다. 김씨가 축출된 지 3년만에 봉씨가 새 세자빈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동성연애에 연루되어 역시 쫓겨났다. 부왕인 세종은 후사를 얻기 위해 권씨, 정씨, 홍씨등 세 명의 양가집 딸들을 이어서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세종 23년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출산했지만 그녀는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
현덕왕후 권씨가 죽자 노비 출신인 지관 목효지가 간언을 했다.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왕후의 능지는 아이를 낳으면 곧 죽어버릴 땅이며 부녀자가 미천하게 되는 곳이니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목효지의 의견을 무시하고 능으로 사용했다. 훗날 단종은 죽고, 권씨의 능은 파헤쳐져 하루아침에 왕비에서 서인으로 강등되고 만다.
조선왕들의 생로병사, BF북스, 강영민 지음, 페이지109-110
휘빈 김씨(徽嬪 金氏, 생몰년 미상)는 조선 문종의 세자 시절 세자빈(世子嬪)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427년 왕세자 향의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었으나, 세자는 세자빈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세자빈은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시녀 호초(胡椒)에게 민간에서 쓰는 갖가지 비법을 묻자 호초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을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사랑을 받는다.” 라고 대답했다.
세자빈은 평소 시기하던 궁녀 효동(孝童)·덕금(德金)의 신으로 시험해 보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다른 방법을 물었다.
호초는 대신들의 첩인 중가이와 하봉래에게서 들은 방법을 전했고, 그러던 중 세자궁의 시녀 순덕(順德)이 세자빈의 약낭에서 가죽신 껍질을 발견하고 세자빈의 어머니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뒤늦게 세자빈이 각종 비방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종과 소헌왕후의 추궁에 세자빈이 모든 것을 자백하였다.
순덕이 가죽신 껍질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자백이 명확하자 세종은 1429년 7월 18일 세자빈을 폐위하여 폐빈(廢嬪)으로 강등시켰다. 또한 폐빈 김씨의 아버지 김오문과 호초의 아버지의 직첩을 거두고 김씨의 오빠 김중엄도 파면시켰다. 세자빈에게 압승술을 가르쳤다는 죄로 호초는 참형에 처해졌다.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년 4월 17일 (음력 3월 12일) ~ 1441년 8월 10일 (음력 7월 24일))는 조선 문종의 왕비이다. 시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이다.
화산부원군 권전(花山府院君 權專)과 해령부부인 최씨(海寧府夫人 崔氏)의 딸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문종의 세자 시절 휘빈 김씨(1429년 7월 18일 폐출)와 순빈 봉씨(1436년 10월 26일 폐출) 이후 세 번째로 맞은 세자빈으로, 1441년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한다. 남편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에 추존되었다.
원래 왕세자 향(문종)의 후궁인 승휘로 궁에 들어갔으며, 세자의 두 부인인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가 갖가지 비행으로 왕실을 문란케 한 뒤 폐위되자, 이미 두명의 딸을 낳아 품계가 양원으로 올라가있던 권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첫째는 어릴 때 죽고, 둘째딸이 경혜공주임.) 세종 실록을 보면 당시 세자였던 문종은 홍 승휘를 세자빈으로 올리고 싶어했으나, 이미 딸이 있으며 다른 후궁들보다 품계가 더 높은 권씨를 의리상 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는 세종의 뜻이 적혀있다. 1441년에 원손(단종)을 낳았으나, 원손을 낳자마자 하루 뒤에 산후병으로 사망하니 향년 24세였다. 그 후 시호를 현덕빈(顯德嬪)으로 칭하였으나 남편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 현덕왕후로 추존되었다. 야사에서는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 현덕왕후의 혼령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했는데, 이로 인해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가 죽었고, 이에 분노한 세조는 안산에 있던 현덕왕후의 소릉(문종과 합장되기 전의 능)을 파헤치고 관은 강에다 버렸으며 현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서 내쳤고, 중종 때에 다시 왕후로 추존된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덕종(의경세자)이 사망한 것은 1457년 9월 20일(음력 9월 2일), 단종이 사망한 것은 1457년 11월 7일(음력 10월 21일)로 오히려 덕종이 단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따라서 현덕왕후의 저주가 덕종을 죽게 했다는 식의 야사의 해석은 옳지 않다.
현덕왕후 권씨가 살아 있었다면 조선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단종을 수렴청정을 할수 있고 훗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어느 정도 막아줄수 있었다. 그런데 병풍이 없어 촛불이 바람에 꺼지듯 결국 단종은 애통하게 죽고 조선은 그 이후로 도덕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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