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축객서와 일중독
아이 일곱을 둔 대가족이 이사했는데 살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을 허탕치고 나서 남편은 아내에게 어린 것 넷을 데리고 공동묘지에 가 있으라고 하고는 나머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집을 구하러 다녔다. 꼭 알맞은 데를 찾았더니 집주인이 어김없이 묻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몇이죠?”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일곱이지만… 넷은 엄마하고 묘지에 있습니다.”
집주인은 묘지에 있음을 죽었다고 생각하여 대가족을 받아주었다는 유머이다. 그런데 ‘이사’란 사람이 사마천 사기에도 등장한다. 이사(李斯, ? ~ 기원전 208년 )는 초나라 上蔡상채 사람이다. 나이가 어릴 때 군의 하급관리가 되어 관청창고 변소에서는 쥐가 불결한 대변을 먹고 있고 사람과 개가 접근하니 자주 놀라 두려워하였다. 이사가 창고에 들어가 창고안의 쥐를 보니 곡식이 많이 쌓여서 큰 집안에 살고 사람이나 개에게 피해당할 근심이 없었다. 이에 이사는 한탄하여 말했다. 사람의 현명함과 우매함이 비유하면 쥐와 같으니 마땅히 스스로 처신할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다「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
그뒤로 유가의 순자의 제자가 되었다. 동문으로서 한나라(韓)의 공자 한비(韓非)가 있었다. 모두 순자로부터 배웠고, 진나라에 들어가 여불위의 식객이 되어, 여불위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 받아 추천을 받고 관직에 진출했다. 공자의 문인인 자궁(子宮)의 문도였던 스승 순자로부터 사서육경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자를 사숙하였으며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강력한 법질서가 필요하다 확신하였다. 처음에는 한비와 절친하였으나 나중에 진나라에서 경쟁을 하게 되면서 정적으로 변신한다.
이사는 진왕 영정(秦王政, 후에 진 시황제가 된다.)을 모시고, 그 시종이 되었다. 본래 법가는 유가 중 현실주의, 법치주의를 강조하던 한 분파였고 그는 생전에 유학자를 자처하였다. 이사는 진왕 영정의 명령으로 타국에 잠입하여, 각국의 왕족과 장군의 사이의 이간책을 실시하여 공적을 세우고, 객경(客卿, 타국 출신의 대신)이 되었다.
기원전 237년 순조롭게 출세하고 있던 이사이지만, 노애(嫪毐)라고 하는 타국 출신자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국내에서 타국 출신자의 평판이 나빠져, 이윽고 외국인의 추방령이 나왔다. 이대로는 곤란했던 이사는 편지를 영정에게 내 추방령의 철회를 요구했다. 이 편지는 실로 이로 정연한 명문으로, 후에 문선에도 수록되고 있는 만큼이었다. 영정도 이 명문에 설득되어 추방령의 철회를 결정했다. 이사(李斯)가 쓴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는 시황제 시절 진(秦)나라 출신 관리들이 다른 나라에서 들어와 벼슬 사는 객경(客卿)들을 모두 내쫓아야 한다는 논의를 일으켰을 때 그에 반대해 이사가 올린 상주문이다. 이사는 먼저 진나라 목공(穆公)때부터 소왕(昭王)에 이르기까지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나 진나라 출신은 아닌 인재들을 열거한다. 시황제가 애호하는 진나라산(産)이 아닌 보배와 명마(名馬), 미인, 음악을 열거한 뒤에 충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인재를 취하는 것은 가부(可否)와 곡직(曲直)을 묻지 않고 진나라 사람이 아닌 이는 물리치며 손님이 된 이는 내쫓으니, 그렇다면 무겁게 여기는 것은 여색(色)과 음악과 주옥(珠玉)이고 가벼이 여기는 것은 사람이 됩니다. 이는 결코 천하를 차지하고 제후를 다스릴 방도가 아닙니다. 무릇 물건이 진나라에서 나지 않더라도 보물로 여길 만한 것이 많고 선비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충성하기를 원하는 이가 많습니다.
臣은 聞太山이 不讓土壤故로 能成其大하고 河海不擇細流故로 能就其深하고 王者不却衆庶故로 能明其德이라하니 此는 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라
신은 문태산이 불양토양고로 능성기대하고 하해불택세류고로 능취기심하고 왕자불각중서고로 능명기덕이라 하니 차는 오제삼왕지소이무적야라.
신이 듣기로 태산은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는 까닭에 능히 그 큼을 이루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 까닭에 능히 그 깊음에 나아가며, 왕 노릇 하는 사람은 무리를 물리치지 않는 까닭에 능히 그 덕을 밝힌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5제3왕이 대적할 사람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이에 백성을 버려서 적국을 돕고, 빈객을 물리쳐서 제후를 섬기게 하시니, 이른바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보내 준다는 것입니다. 왕께서 이사를 불러서 관직을 복원하고 빈객을 쫒아내는 명령을 제거해서 마침내 이사의 꾀를 사용하여 천하를 얻다.
泰山은 不讓土讓하고 河海는 不擇細流니라 태산은 불양토양하고 하해는 불택세류니"태산은 작은 흙덩어리도 사양하지 아니하고, 강과 바다는 가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도 등장하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실려 있는 이사(李斯)의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에도 유래한다.
기원전 210년 가을 7월에, 시황제가 순행 도중에 사망하여, 이사는 조고(趙高)와 함께 위조를 만들고, 호해를 즉위 시켜 진 이세황제(二世皇帝)로서 태자 부소를 자결시켰다. 기원전 208년 이사는 우승상 곽거질(霍去疾)과 장군 풍겁(馮劫)과 함께 아방궁의 축조를 멈추도록 2세 황제에 고했지만 거절 당하고 곽거질과 풍겁은 자해 했다. 그리고도 재삼 이세황제에 간하였지만, 오히려 2세 황제의 분노를 사 조고에게 중상 모략되고, 조고에게 집요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조고가 날조 하여 올린 죄(초나라 항량의 군사에게 이사의 장남으로 삼천군 태수의 이유가 초나라 군과 내통 하고 있었다고 하는 죄)를 인정하였다.
이사의 잘못은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동문수학하였고 자신이 추천했던 한비자의 능력을 시기해서 옥속에서 진시황 몰래 한비자를 살해한 것이다. 친구를 배신하고 팔아먹었던 것이다. 둘째 조고가 진시황이 죽을 때 원래 태자 부소를 황제로 세우려는 유언을 남겼는데 몰래 둘째 아들인 호해를 세우려고 한 것을 알면서 막지 못한 것이다. 특히 이사는 나중에 권력이 커지니 조고가 다시 이사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셋째로 이사는 분서갱유란 실용서를 제외한 책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파묻어 죽이게 한 죄가 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자업자득인 측면이 있다. 그런데 사마천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 제27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二世二年七月,具斯五刑,論腰斬咸陽市。
진나라 2세 황제 2년 7월 이사는 5가지 형벌을 모두 받으니 함양시에서 허리가 잘려지는 질병을 받게 되었다.
斯出獄,與其中子俱執,顧謂其中子曰:「吾欲與若復牽黃犬俱出上蔡東門逐狡兔,豈可得乎!」
이사는 옥문을 나와 둘째 아들과 함께 잡혀서 둘째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너와 함께 다시 황색 사냥개를 끌고 상채 동문에 나가서 토끼를 몰아 사냥하려고 했는데 죽게 되니 어찌 사냥을 다시 하겠는가?”
곧 부자끼리 서로 통곡하고 3족이 멸망하여지게 되었다.
이 말을 들으니 인생무상과 모든 것은 변화하며 그 쓸쓸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진나라란 제국의 최고의 자리인 승상까지 올랐지만 결국 아들과 한가로운 시간조차 가지지 못하고 일에 파뭍혀 살아가는 우리 슬픈 가장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일중독증(-中毒症)은 ‘과잉적응증후군’이며 생활의 양식이어야 할 직업에 사생활을 많이 희생해 일만 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로 워커홀릭(Workaholic)이라고도 불리고 과로사나 자살이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데 정부나 개인이나 몸과 마음에 여유와 레저 시간을 갖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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