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수치심과 사회적 수치심
수영복 차림으로 해변을 걷는 것과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벌거벗은 채 혹은 옷을 거의 입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설 때 (혹은 벌거벗은 자신을 볼 때)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수치감에 시대와 장소에 근거하여 노출의 허용 정도를 규정하는 사회적 수치심이 덧붙여진다.
도덕이란 말도 개인의 행동 규범을 뜻하는 에토스와 사회생활의 규범을 뜻하는 아비투스로 나눌수 있다. 우리의 연구 영역에서도 개인적 수치심 (pudeur)과 사회적 예절(decence)을 구별하게 될 것이다. 경계는 때에 따라 아주 미묘하다. 브래지어가 달리지 않은 모노키니 수영복을 최초로 입은 여자들이 그것을 경험했다. 1965년에 여성들 중 한명이 모니키니를 입고 니스의 영국인 산책로를 걷다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 산책로에서 몇 미터 떨어진 해변을 걸었더라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차림 때문에..
수치심은 나체나 육체의 어느 부분에 대한 반응의 문제이기에 앞서 무엇보다 의식의 문제라는 점이다. 수치심은 역동적인 과정이므로 현상학의 용어로 정의되어야 한다. 수치심은 스스로가 나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는 이점에서 현대성을 갖는다. 수치심의 통계적 개념에 따르면 태초의 무구 상태와 지혜의 나무 열매로 인해 생겨난 의식 사이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태적인 규범들 속에 수치심을 묶어두려 한 까닭에 공중도덕은 점점 조리에 맞지 않는 임의적인 것이 되어 갔다.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려는 막연한 질문들은 간단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나체는 빈축을 사게 되는가? 에로티시즘은 어느 지점에서 포르 노가 되며 무사태평함은 어느 순간 도발이 되고, 나체의 예술적 형상은 어느 수준에서 외설이 되는가?
옷만 벗어던지면 실낙원의 순수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나체주의자들의 생각 역시 오산이었다. 벌거벗고 목욕하는 중세 사람과 현대인은 수치심에 대해 동일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현대인은 수영복을 벗으면 도덕적 규범과 형법을 어기게 된다는 것을 안다.
수치심의 역사, 장 클로드 볼로뉴 지음, 전혜정 옮김, 에디터, 페이지 18-19
수치심은 사회나 국가 시대에 따라 달랐다. 남녀 혼욕이나 개울에서 발가벗고 목욕하는 행위, 기타 여러 문제등이 도덕이나 규범 여러 상황에 따라 다 달랐다.
조선시대를 보면 튼살이 치료로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튼살이 생긴 부위인 배, 가슴, 어깨, 종아리, 허벅지등을 당시 여성들은 노출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의보감에도 튼살은 질병명 조차 나타나지 않는데 현대는 치료 대상이 된다.
자향미한의원 www.imagediet.co.kr 에서도 수치감을 증폭시킬수 있는 튼살을 튼살침인 ST침으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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