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krakra 입니다. 도저히 글을 쓸 짬이 안나서 , 이제서야 글 하나를 작성하게 되는군요.
점점 정보가 원활하게 돌고 있는 시대에 있다는 것은 불행하면서도, 행복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정보들과는 다르게 스포츠 경기를 중계해준다는 것은 매니아에게도, 일반인에게도 보통은 행복이 플러스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전엔 도저히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없었던 것들이 하나하나 , 그리고 더 세밀하게 결과를 보게 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아직 국내에서 테니스의 인기는 낮은 편이기에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메이저 대회 위주로 중계가 될 뿐입니다. 이것조차도 진짜 매니아분들은 부족해서 해외 TV나 유튜브 등으로 관람하고 계시겠죠?
어제는 오랜만에 자리잡고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거의 20년간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대표적인 (테니스 선수에게는) 악의 축이자 (일반인에게는)전무후무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영웅이라는 존재인 페더러와 처음부터 엄청난 선수라고 까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데뷔 후에 꾸준히 성장해서 세계 최정상권을 지키고 있는 칠리치의 대결이었습니다.
칠리치의 장점은 프로필에서 알 수 있듯이 거의 2m에 달하는 큰 키와 긴 팔에서 뽑아져나오는 강력한 서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잡힌 밸런스로 인한 코트 커버링, 그리고 네트 위에서 찍어내리는 듯한 스트로크를 들 수 있겠습니다.
최고속도가 215~220 사이로 나오고 , 평속이 200초반 대인 강력한 퍼스트 서브는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옥일 겁니다. 아마 일반인은 어? 하는 사이에 이미 공이 지나가겠죠.
반면 페더러는 상대적으로 작고, 파워가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서브와 스트로크 그리고 예측력을 최고 장점으로 두고 싶습니다. 서브 최고속도는 200초반이고 평속은 180후반 정도이지만, 어마어마한 컨트롤로 하드와 잔디 코트에서는 귀신 같은 서브에이스를 엄청나게 뽑아내는 괴물입니다. 거기에 페더러 특유의 화려함을 더해주는 것은 절묘한 전후좌우로 뿌려대는 스트로크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올해 호주오픈의 페더러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가장 껄끄럽게 여기는 선수들과의 대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를 마무리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와서는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상대전적에서 열세에 있는 나달을 칠리치가 꺾으면서(나달의 기권이기는 했지만) 작년에 이어서(작년 결승은 페더러-나달) 또 다시 최고의 위협이 될만한 적수가 첫 번째로 떨어져나갔고, 조코비치는 부상 이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몸 상태로 정현에게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페더러는 결승까지 무실세트로 도착할 수 있었고 심지어 타이브레크도 거의 없었습니다(아마 2번 혹은 3번), 이것은 한국 나이로 38세인 페더러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반면, 칠리치는 8번의 타이브레이크를 포함해서 나달과의 5세트 혈전을 포함해서 4세트 이상의 게임도 꽤 있었습니다. 7살이 젊은 칠리치지만 체력적인 부담이 없었다고 보긴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칠리치와 페더러 모두 준결승에서 손쉽게 상대를 제압하게 되면서 결승에서는 사실상 모두 만전의 상태로 경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서 페더러와 칠리치의 전략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페더러는 빠른 승부를, 칠리치는 자신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오랜 승부를 가져가는 것이지요. 실질적으로 이번 경기에서 페더러가 승리한 세트는 평균 게임당 시간이 3분에서 4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템포를 보였습니다. 반면 칠리치가 승리한 세트는 평균 약 5분 정도의 게임 당 경기시간을 보였습니다.
1세트의 칠리치는 마치 몸이 다 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서브에 대한 반응이 빠르지 못했고 , 포핸드의 범실도 많았습니다. 1세트 페더러의 서브 횟수 18번에 16점을 딴 것에 비해서, 칠리치가 21번의 서브에서 11점을 딴 것에서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결과가 두 번의 브레이크를 당한 끝에 25분만에 1세트를 내 준 것이지요. 상위 랭커끼리의 대결이라는 점이 무색할 정도로 빨리 끝난 탓에 3:0으로 무난하게 세트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세트에서는 칠리치도 점차 심기일전에서 각자의 서브를 지켜나갑니다. 여기에서 칠리치의 전략이 훌륭했습니다. 고전하기는 했지만, 칠리치는 집요할 정도로 자신의 포핸드로 페더러의 백핸드를 공략했습니다. 서브도 되도록이면 페더러를 바깥쪽으로 몰아내면서 말이죠. 2세트가 박빙이었다는 점은 수치로도 보여집니다. 모두 세 번의 브레이크 기회를 잡았으나, 결국은 서버가 가져갔습니다. 위너는 서로 16개씩이었습니다. 페더러는 41번의 서브에서 30점을 얻었고, 칠리치는 52번의 서브에서 36점을 얻었습니다. 이 약간의 차이만큼이 타이브레이크에서의 차이로 드러난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실 칠리치는 2세트에서도 고전했습니다. 페더러도 미스를 범하면서 계속해서 기회를 줬구요.
일반적으로 페더러의 백핸드를 공략하라는 것은 잘 알려진 방법입니다. 페더러는 원핸드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절묘하지만, 상대적으로 힘에 밀려서 컨트롤이 떨어진다거나 기회를 주는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통 선수들은 그럴 기회들도 잡지 못하고 끌려가고 맙니다.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는 하나 20년간 세계 최정상에 군림해온 선수의 백핸드가 약하다고 볼 수는 없겠죠. 그리고 백핸드로 몰아가는 게임 플랜도 정교하게 짜지 못하면 한 순간의 카운터에 당해버리고 맙니다.
사실 2세트에서 칠리치가 타이브레이크에서 당했다면, 그대로 게임은 3:0으로 끝났으리라고 봅니다. 박빙이었지만, 세트 스코어는 어느 새 2:0이 된 시점이고 아직 페더러의 체력이 남아있는데다가, 페더러 먼저 서브게임을 시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페더러는 3세트에서 더욱 공격적인 서브와 플랜으로 게임을 지배합니다. 자신의 서브 우선권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한 번의 브레이크로 세트를 가져옵니다. 칠리치는 2세트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페더러의 서브게임에서 철저하게 휘말린 끝에 집니다. 3세트 경기 결과를 보면, 페더러의 서브 에이스가 7개로 1개인 칠리치를 압도합니다. 페더러도 좋았지만, 칠리치가 워낙 좋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서브가 코트에 들어갈 확률이 페더러가 81%인 반면, 칠리치는 50%에 불과했고 그 결과 자신의 서브게임에서도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페더러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브레이크의 위기조차 한 번도 없이 세트를 가져옵니다. 역시 약 30분만에요.
저는 이 시점에서의 칠리치가 멘탈이 흔들리는 상태였다고 봤습니다. 2세트에서는 되던 작업들이 실패했었거든요.
이어진 4세트에서 칠리치의 서브게임으로 시작했지만 페더러에게 바로 브레이크를 당하고 맙니다. 무난하게 이어지다보면 게임이 질 수 밖에 없는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죠. 그것도 본인의 미스로 만들어진 브레이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괜히 최정상권의 선수가 아니라는 듯 칠리치는 심기일전합니다. 아마 그 첫 브레이크가 질 수 없다는 감정과 집중력을 되돌려준 것처럼 보였습니다. 반대로 페더러는 체력적인 한계를 보이는 듯한 모습을 갑자기 보여줬습니다. 4세트 중반에 들어서자 서브 컨트롤이 흔들리고, 스트로크 대결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마치 3세트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듯이 갑자기 살아난 칠리치가 페더러를 압도합니다.
칠리치의 첫 번째 서브의 성공률은 77%로 페더러의 36%.. 페더러가 얼마나 흔들리는 경기를 펼쳤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페더러가 흔들린 덕분에 맞이한 페더러의 세컨 서브들을 칠리치는 잘 공략해서 두 번의 브레이크를 만들어냅니다. 칠리치는 7번밖에 하지않은 세컨 서브를 페더러는 16번이나 쳤으며(심지어 퍼스트 서브는 9번에 불과) 그 중에 9점을 칠리치가 가져갑니다. 심지어 스트로크 대결에서도 13개의 위너로 6개를 기록한 페더러를 압도합니다.
하지만 페더러는 5세트에 다시 들어오자마자 다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절묘한 공격력과 서브로 다시 한 번 내가 황제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압살해버립니다. 그것의 정점은 "세컨 서브"에 있었습니다. 퍼스트 서브의 점수율과 세컨 서브의 점수율이 모두 70%를 넘긴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여전히 서브 자체는 흔들리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페더러 최고의 장점인 센터 공략 플랫,스핀 서브가 자꾸 벗어나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칠리치로서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페더러도 브레이크 기회를 어처구니 없이 주는 모습을 세트 시작과 함께 보여줬습니다만은 그것을 극복해내면서 탄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첫 게임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어진 칠리치의 서브게임에서 칠리치가 매우 쉬운 공을 미스하면서 페더러에게 리드를 한 순간 페더러의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조금 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세컨 서브에서 절묘한 코스웍과 스핀으로 칠리치의 리턴 미스를 유도하는 모습은 정말 위대한 선수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한 번의 브레이크 끝에 3:0 여기에서 칠리치는 패배를 , 페더러는 승리를 직감한 모습이었습니다. 한 게임을 따라잡았으나 곧 다시 한 번 브레이크 당하고 5:1 페더러의 서브게임에서 페더러가 챔피언십 포인트를 남겨둔 시점에서 페더러가 와이드에서 몸으로 찔러들어가는 스핀 서브를 세컨 서브로 구사한 것은 이 날, 황제의 경험의 백미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체력적인 전성기의 페더러는 이미 사라졌지만, 경험을 몸에 붙여넣은 페더러는 끊임없는 전진속공형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다만 이미 너무 늦은 나이인만큼 언제까지 이 전성기가 유지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올해 아니면 내년에도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노쇠화가 올 수는 있겠죠. 이런 재능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스포츠를 기록하고 역사로 남기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현 선수 덕분에 테니스에 많은 관심이 생긴 사람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이런 역사의 경기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