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한국사 전공자만 아니라면 혹은 미국에서 2년 정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도전해 보고 싶은 과제가 남북전쟁사다. 미국사(史)에 흥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의 남북전쟁사가 국가경영 및 리더십과 관련해 아주 흥미로운 교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북전쟁은 특이한 두 가지 결론을 남겼다. 첫 번째는 사상자 수다. 전사한 군인이 60만∼70만, 상이군인이 300만 명이다. 이는 미군이 1차,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합한 것보다도 많다.(참고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의 수가 60만이었다). 당시의 낮은 의료수준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때의 미국 인구와 화약을 잰 후 총구에 총알을 한발씩 넣고 사격해야 하는 낮은 무기 수준을 고려하면 경이로운 수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 한번의 일제사격으로 1개 연대가 전멸하고, 10분 만에 1만 명을 죽인 기록도 있다. 역시 참고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대 비극이었다는 ‘오마하 해변 전투’에 투입된 미군은 약 3만4000명이었다. 독일군은 하루 종일 88mm 포와 분당 1200발을 쏘아대는 기관총으로 해변의 미군을 휩쓸었지만 미군의 손실은 전사자 1200명, 부상 4000명 정도였다.
두 번째 특이점은 승자는 북군이었지만, 전쟁 영웅은 모두 남군의 장군들이 차지했다는 것이다. 북군 장군들의 경우 패장은 오명을, 승장은 악명을 얻었다.
첫 번째 특이점부터 살펴보면 이 엄청난 살육은 무기와 전술의 불일치 때문이다. 북군과 남군 모두가 사용한 전술은 반세기 전에 명성을 날렸던 ‘나폴레옹식 전술’이다. 당시 무장들이 얼마나 나폴레옹을 존경했는지 사관학교 때 별명이 ‘리틀 나폴레옹’이었던 장군들도 여러 명이다.
그러나 이 ‘리틀 나폴레옹’들은 나폴레옹의 외형만 답습했을 뿐 본질을 보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총과 대포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기·보병 혼합전술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물론 나폴레옹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이미 나폴레옹의 사관학교 선배들은 이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귀족사회와 군이라는 조직에 수용되면서 그런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말을 타고 멋진 장식으로 치장한 귀족 출신의 기병장교에게 “이제 기병의 시대는 끝났으니 말에서 내려 흙탕으로 들어와 대포를 끌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용감한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전술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혁명과 나폴레옹이 필요했다.
웨스트 포인트의 장교들은 이 교훈을 보지 못하고 나폴레옹의 전술 교범만을 받아들였다. 그 사이에 무기는 다시 한번 진화했다. 비록 단발식 소총이지만 살상력은 나폴레옹 시대의 4배가 넘었다. 대포도 살상력과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전의 청동대포는 강선이 없었기 때문에 포탄이 회전하지 않아서 너클볼처럼 이리저리 제멋대로 날아갔다. 그러나 남북전쟁 당시는 대포에 강철과 강선이 도입됐다. 회전하는 포탄은 공기를 가르고 정확한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갔다. 이런 무시무시한 무기가 도입됐는데도 병사들은 과거 나폴레옹 방식대로 수백 명씩 밀집대형을 이뤄 꼿꼿하게 서서 걸어갔던 것이다.
이 사실은 두 가지 교훈을 남겨준다. 첫째 역사적 교훈은 절대로 결론과 외형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성공했다면 그 방법이 아니라 그 시기, 그 환경에서 그 방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찾아내야 한다.
많은 기업들이 선진 기업의 경영 기법을 벤치마킹 하고 있다. 또 유행처럼 번지는 수많은 경영 툴이나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성과를 내는 기업은 많지 않다. 선진 기업이 경쟁력을 강화시킨 메커니즘을 파악하기보다 결과물만 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처한 환경과 조직 여건이 다르면 당연히 해결책도 달라져야 한다.
두 번째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준비의 중요함이다. 남북전쟁은 무려 4년간 지속됐다. 처음에는 미처 몰라서 그랬다 치더라도 어떻게 4년 동안이나 이런 살상극이 되풀이됐을까. 무려 4년 동안 60만 명이 죽어갔는데도 장군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전술이 낡고 무모한 전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사실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장교와 병사들은 이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을 대체할 전술이 없었다. 전술이란 소설에서처럼 한순간의 깨달음과 아이디어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전술은 수많은 연구와 훈련, 새로운 무기 체제를 통해 만들어진다.
장교와 병사들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깨달음만으로는 경이적인 살상극을 해결할 수 없었다. 국가나 기업이나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다. 평범한 교훈 같지만 의외로 실천하기는 대단히 힘든 교훈이다. 전쟁사만 보더라도 똑같은 오류가 1차 세계 대전 때 다시 반복된다.
기업들이 혁신을 중시하는 문화를 조성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과가 하락하는 조직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뚜렷한 문제 해결책은 쉽게 제시되지 않으며 리더십도 잘 발휘되지 않는다. 반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직은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조금씩 문제를 개선하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을 도출한다. 지속적으로 외부 환경 변화를 탐색하고 여기에 맞춰 변화를 꾀하는 조직만이 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북군과 남군 장수들의 엇갈린 평가에 대해 살펴보자.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단순화시켜 얘기하자면 이는 전근대적인 인사체제와 관료주의가 만들어 낸 폐단이었다. 19세기의 미국사회도 당시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행정부는 부패했고 지연, 학연, 인맥으로 얽혀 있었으며 군대는 유달리 남부출신들로 채워졌다. 그 와중에도 나름대로 유능한 장교들을 선발해서 비축하기는 했지만 야전형 장교들은 대부분 남부출신들, 특히 버지니아 출신들로 채워졌다. 그런데 평화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이들 야전형 장교들은 대부분 진급도 못하고, 벽지를 떠돌았다. 북부 출신들은 유능한 장교도 적었고, 관료주의의 특성상 정가와 가까운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론가, 행정가 스타일이었다.
전쟁이 발생했을 때 병력은 북부가 두 배 더 많았다. 북부 한 주의 공장수가 남부 전체의 공장수보다 많았을 정도로 장비와 물자, 산업 생산력도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군은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전쟁 초반기에 북군이 몰살당하고 남부가 승리할 기회가 최소한 3번은 있었다. 그때마다 신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북군은 기사회생했다. 갑자기 폭우가 내려 추격이 중단된 경우는 이해할 수 있는 우연에 속한다. 반도 전역에서 남군은 절묘한 전술로 북군을 함정에 몰아넣었다. 이곳에서 북군의 명줄을 끊기로 예정된 부대는 전설적인 명장 잭슨 장군의 부대였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잭슨은 엉뚱한 곳에 가서 한가하게 교량 공사를 하고 있었다. 명령이 잘못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잘못 전달됐다 해도 어떻게 공격명령이 교량 보수공사로 바뀔 수 있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더욱 기막힌 사건은 당시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의 명령서 분실 사건이다. 우연한 사고로 같은 명령서가 두 장 작성됐다. 남군의 어느 참모가 필요 없게 된 작전명령서 한 장을 그냥 버렸다. 이 종이를 다시 누군가가 담배쌈지로 쓰다가 버렸다. 이 꽁초를 하필 북군 병사가 줍는 바람에 작전 계획이 누설돼 북군 주력은 사지에서 탈출했다.
행정가와 이론가로 채워진 북군 최고 지휘부는 야전에서 철저하게 무능했다. 긴 전쟁동안 북군에서도 야전 지휘관들이 발굴되고 성장하면서 비로소 전쟁의 양상은 바뀌었으며, 결국 북군이 승리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360만 명이라는 사상자였다. 북군의 지휘부가 좀 더 유능했더라면, 미국 행정부와 군부가 보다 공정하고, 관료주의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비록 웨스트 포인트 장교들이 낡은 전술 교본을 들고 싸웠다 할지라도 전쟁은 훨씬 짧고 간단하게 끝났을 것이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