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의 [발도르프 육아예술]을 읽고

in kr •  7 years ago 

나는 미혼이고 결혼이 임박한 나이는 아니지만 요즘 육아교육에 관심이 부쩍 많아지고 있다. 한국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한번쯤 육아교육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키우기 좋은 나라,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된다면 지금보다 더 살기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이정희의 <발도르프 육아예술>을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고 하루종일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굉장히 유익한 책이다.

저자인 이정희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하면 1983년 독어독문학자의 꿈을 안고 한국을 떠났다.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독어학, 현대독문학, 서양예술사를 학사 과정부터 시작하여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후 1994년 귀국했다. 저자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학자이기 때문에 한국의 교육현실을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사회 변화는 교육문화의 개선에서 시작된다는 확신으로 슈타이너의 발도르프 교육서를 번역하고 통역하다가 1999년 재차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 사범대학에서 슈타이너 인지학과 발도르프 교육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발도르프 육아예술>은 머리말에 의하면 2012년부터 한겨레 임신출산육아 특화 웹진 베이비트리에 <아이교육, 그 새로운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칼럼의 일부를 묶은 것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육아서로 구상한 게 아니고 최근 육아정보나 흥미로운 육아체험담을 나누는 것도 아니며 육아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인 매뉴얼이나 지침을 제시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게 흥미롭다. 이 책에 나온 사례는 주변을 관찰하거나 교육 상담을 통해 모인 자료라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추상적인 육아이론서가 아니라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편안한 글들을 묶은 것이기 때문에 육아교육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책 내용을 거의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이 책의 매우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몇 편의 칼럼을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영어 조기교육의 부메랑’이다. 영어 능력은 한국사회에서 최고의 스펙으로 꼽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어떤 직종에 지원하든 높은 토익점수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소위 돈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조기 어학연수, 영어 유치원 등을 이용하여 어릴 때부터 영어 능력을 키워놓는다. 그렇지만 영어 조기교육이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일까. 저자는 여기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 책의 209쪽에 의하면 외국어 교육은 어릴수록 효과적이라는 조건 없는 ‘믿음’ 때문에 많은 부모가 자녀교육을 위해 이른 ‘교육 투자’를 감행하거나 유아교육 현장에서조차 바람직하지 않은 시도를 한다. 어떤 학부모는 원어민 영어 유치원을 선택하기도 하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등 일반 유아교육 현장에서는 학부모의 요구에 맞추어 특별활동 시간에 영어 프로그램을 배치한다. 유능한 엄마는 집에서 소위 ‘엄마표 영어’ 학습시간을 갖기도 한다.


취학 전에 이런 시도가 아이의 영어 능력을 키우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저자는 의문을 갖는다. 저자는 언어학적 관점에서 모국어의 발달은 옹알이할 때부터 만 6~7세 사이에 그 토대를 마련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람에게 언어는 의사소통의 기본 수단으로서 감정의 움직임을 표현하며 자기 생각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 뿐 아니라 언어를 통해 사고 구조가 만들어지며 자의식이 생겨난다. 자의식을 지닌 다음에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게 아니라 의사소통하면서 자의식이 싹튼다.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사람이 언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언어가 사람을 만든다고 말한다. 결국 언어는 그 사람의 근본 존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오히려 저자는 아이의 외국어 교육에서 가장 ‘현명한’ 처사는 취학 전까지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모국어의 토대가 단단해지기도 전에 외국어 학습 환경에 노출하면 아이의 내면 발달, 즉 정체감과 자의식의 형성 과정에 유익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물론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아예 한국을 떠나서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영어권 국가에 정착할 생각이 없다면 굳이 한국어를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어디에 있든 한국과의 끈을 놓지 않을 생각이라면 한국어가 완전히 자리잡힌 후에 영어를 배우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다음으로 237쪽의 ‘만들어진 영재, 엄마의 기대와 착각’이라는 칼럼도 굉장히 재미있다. 이 책의 238쪽에 의하면 교육열 세계 1위인 나라에서 학부모는 자연스럽게 자녀의 영재성과 특별한 재능에 일찍부터 주목하며 일단 기대를 한다. 이때 부모의 순수한 기대가 착각으로 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영재성이란 타고나기보다 만들어진다는 믿음이 지배적이다. 교육열 높은 학부모는 ‘영재 만들기’를 위해 조기교육과 선행학습을 체계적으로 시작하며 자녀가 시험문제를 빨리 잘 풀어서 영재반에 들어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영재교육 석학이자 미국 국립영재연구소장 조지프 렌줄리는 영재의 세 가지 기본 자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우선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주어진 문제에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집중하는 특출한 과제 집착력을 보이며, 문제 접근에서 아주 높은 창의적 사고를 발휘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자질은 우리 교육풍토에서 흔히 목격되는 영재성 계발을 위한 체계적, 종합적 관리나 영재원 대비 문제집으로 훈련할 때 쌓아지는 능력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저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중인 우수인재 육성 정책이 사회에 얼마나 융화되는 창의적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쓴다.

한국에도 영재학교, 과학고, 외국어고와 같이 소위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진학하는 학교들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한국에선 단 한번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목고에 다니는 아이들이 명문 대학에 진학할 확률은 굉장히 높지만 이들이 어떤 영재성을 발휘하여 인류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나는 ‘천재, 영재’보다는 언제나 노력하고 성실한 사람을 키워내는 게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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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갑니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지 참 고민이 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안하자니 뭐하고 너무 하자니 아이가 안쓰럽고... 저도 아직 미혼이지만 고민되네요 ㅠ

발달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써, 진지하게 읽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영어 조기교육 문제가 참 심각하죠... 부모 중 한 쪽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거나 아이와 상호작용할 때 항상 영어를 쓰는 사람이 아닌 이상, bilingual의 이점은 절대 볼 수 없는데말이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팔로우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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