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으로 읽는 조선
우리 주변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속담들은 그 유래가 정확하게 밝혀져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다만 쓰이고 있는 단어들로 그 속담이 언제쯤 만들어졌는지 가늠해볼 수는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따놓은 당상"과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유래한 속담이 지금까지도 꽤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져서, 조금 더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속담들이 조선시대의 단어들, 표현들로부터 유래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찾아놓은 것이 대여섯 개 정도 되자 시간이 날 때마다 정리해서 짤막한 글로 엮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어지는 글들의 대상이 되는 속담들은 이번처럼 하나의 속담도 있겠지만 하나의 주제에 따라 여러 속담이 묶어지기도 할 것 같다(예를 들어, 가난, 영감, 임금, 양반, 가족 명칭, 천재지변 등).
따놓은 당상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따놓은 당상은 "떼어 놓은 당상"으로도 쓰며 "떼어 놓은 당상이 변하거나 다른 데로 갈 리 없다는 데서,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비슷한 속담으로는 "떼어 놓은 당상 좀먹으랴", "받아 놓은 당상"이 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의미는 같다. 아무래도 다른 표현들보다는 따놓은 당상이 널리 쓰이는 듯 하므로 이 글에서는 따놓은 당상으로 통일해서 쓰도록 하겠다.
당상( 堂上)이란 무엇인가?
이 속담의 유래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변하거나 다른 데로 가지 않는 것", 당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속담에서는 당상이라고 쓰고 있지만 사실상 "당상관"으로 보아야 한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당(堂)의 위에 있는 관료들이다. 왕이 참여하는 공식 행사에서 관료들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차례대로 도열하게 되는데, 지위가 낮을수록 왕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높이의 차이도 커졌다. 당상관은 왕과 가장 가까운 관료군(官僚群)으로, 조선의 관료제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다. 이들은 품계로 보면 정3품 상계(上階) 이상이었다. 이와 같이 당상을 제일 위에 두고 당하(堂下), 참상(參上), 참하(參下)가 이어졌다.
무슨 판서니, 참판이니, 대사헌이니 하는, 사극에 매번 등장하는 관직들을 역임하고 있는 관료들이 바로 당상관들이었다. 어디선가 이름 좀 들어보거나 본 적이 있는 관직에 있는 관료는 모두 당상관이라고 보면 된다. 당상관이 아니면서 왕과 직접 말을 섞을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당상관이 역임하지 않는 관직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상관들이 모두 중요한 관직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상관은 일종의 지위로, 지금으로 비유해보면 "사원", "대리", "부장" 등과 비슷한 개념이다. 한 회사에 수많은 "대리"가 있지만 직책과 업무는 각자 다르다. 물론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속담을 이해하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처럼 당상관은 일종의 지위였기 때문에 숫자에 제한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지방 관직을 제외하면 당상관만 임명될 수 있는 주요 관직은 30~40개 남짓이었지만, 당상관의 숫자는 시기에 따라 40명, 70명, 300명 등으로 천차만별이었다.
당상관이 되는 방법
당상관은 나라에서 정치적 지위와 사회경제적 지위를 최고 수준으로 보장해주었다. 앞서 말했듯이 당상관들은 주요 관직들을 역임할 수 있는 자격이 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혜택이 많았다. 본인을 넘어서 본인의 자식, 손자 세대에도 그 혜택이 이어질 정도였다. 따라서 한 집안에서 당상관인 관료가 나온다는 것은 엄청난 경사였다. 이처럼 당상관이 되면 큰 혜택이 있는 만큼 당상관이 되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에서도 일반 관료가 관료제의 최상층 지위까지 승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조선의 관료제는 당상관으로의 승진뿐만 아니라 모든 승진 자체를 어렵게 설계해 두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승진의 속도를 매우 느리게 설정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핵심 중 하나는 인사권이었다. 이미 고려 말부터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들이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을 개입시켜서 왕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객관적 지표를 인사의 필요조건으로 설정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객관적 지표는 바로 근무일수였다. 능력이 뛰어나든, 뒷 배경이 좋든, 모든 관료는 6품 이상이면 900일, 7품 이하면 450일의 근무일수를 채워야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450일은 15개월로 약 1년, 900일은 30개월로 약 2년 반의 시간이었고, 높은 품계일수록 오히려 채워야할 근무일수가 많았다. 또 '기회'를 얻는다고 모두 승진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이루어지는 업무 성과, 도덕성 등에 대한 평가에서도 모두 문제가 없어야 했다.
이렇게 겨우 모든 절차를 통과하더라도 이제 단 한 단계를 승진했을 뿐이다. 조선에는 종9품 하계(下階)부터 정7품 상계까지 12단계, 종6품 하계부터 정1품 상계까지 18단계, 총 30단계의 지위가 있었다. 종9품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 정3품 상계 당상관에 이르기까지 약 40여 년이 걸리는 셈이다. 실제로 이러한 승진 방식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던 세종대에는 30년, 40년씩 근무하고나서야 당상관에 오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40년. 지금보다 기대수명이 훨씬 짧았던 조선시대에서 40년은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과거급제자가 보통 20대 후반의 나이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능력이 좋았던 인재도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오면 이미 기력이 쇠한 노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세종대 이후 이 부분을 보완하는 조치들로 당상관에 이르는 기간은 약 10~20년으로 줄어들기는 하지만, 근무일수를 중시한다는 원칙은 그대로 이어졌다.
당상을 대체 어떻게 '따놓는'다는 말인가?
이렇게 당상관이 되기 힘든 상황에서 '따놓은 당상'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따놓은 당상'은 이 세 관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승문원의 정3품 판교, 봉상시의 정3품 정, 통례원의 정3품 좌통례.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이 세 관직은 당상관의 관직은 아니었지만 근무일수를 채우면 그대로 당상관에 오르게 해주는 자리였다. 일반적으로 승진을 위해서는 근무일수를 채워야할 뿐만 아니라 업무 성과, 도덕성 등을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 세 관직은 후자의 절차를 아예 건너뛰고 당상관으로의 승진을 보장했다. 이 규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모든 관료가 당상관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관직을 거쳐야 한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 관직은 업무의 중요성때문에 승진에서 혜택을 주는 관직이라는 견해이다. 아직 명쾌하게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어느 견해를 따르든 이 세 관직이 일반 관직들과는 다른 특별한 규정의 적용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 세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당상관의 지위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따놓은 당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은 당상관이 아니지만 역모나 당시의 사회윤리를 해치는 등의 큰 범죄에 연루되지만 않는다면 당상관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은 다음 일에 대한 확신이자, 지금과 다음 사이에 큰 사고가 없기를 기도하는 바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이것저것 살펴보았지만, '따놓은 당상'은 조선이 망해가면서 당상관의 상징성이 점차 희석되고 '당상'이라는 것이 단순히 '좋은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면서 등장한 속담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이 글에서 시도한 해석이 조금은 더 흥미로운 해석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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