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B형 남자인가? 혹은 당신의 남자친구가 B형 남자인가? 하다못해 그런 친구가 있는가? B형 남자에 대해 알고 싶다면 꼭 이 글을 읽어보시라. 이 글은 당신에게 B형 남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알려줄 것이다. 그것은 ‘B형 남자는 어떻다’는 담론이 아니다. 오히려 B형 남자는 어떻지 아니한가에 대한 지식이다.
2004년 연말경부터 인터넷은 혈액형 신드롬으로 뜨겁게 달궈졌었다. 온갖 종류의 혈액형별 특징과 성격 등을 담은 콘텐츠가 생산되어 떠돌며 화제가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이 B형 남자였다. B형 남자는 어떤 사람인가? B형 남자는 개성과 주관이 뚜렷하다. 자기가 꽂힌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불타오르면서도 다른 것에 눈길이 가기 시작하면 금새 또 흥미가 바뀐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B형 남자들의 모습이 ‘이기적인 바람둥이’인 것이다. 이런 속설은 흥미롭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네트워크 상에 전파되어갔다. 인터넷에 ‘B형 남자’를 치면 ‘B형 남자의 성격’, ‘B형 남자가 여자를 좋아할 때 행동’, 심지어 ‘B형 남자 공략법/꼬시는 법’ 등의 웹문서들이 범람하고 있으며 ‘B형 남자 A형 여자 궁합’ 등이 연관 검색어이다.
이런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대중매체도 한몫을 했다. <B형 남자친구>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2005년에 개봉했었던 영화로 벌써 12년이나 지난 옛날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가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것이다. 영화는 ‘이기적이고 못 말리는 바람둥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인 B형 남자’와 그를 좋아하는 여자친구의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이…, 요즘 시대에 누가 혈액형별 성격을 믿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혈액형별 성격 속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대놓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B형 남자’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인상이 구성되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어쩌다가 친구의 혈액형을 알게 되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 친구가 보여줬던 모습들을 되새김질하며 ‘쟤가 B형이라 그랬구나…’, ‘쟤는 B형답지 않네…’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B형 남자’라는 관념에 대해 잘 생각해보자. ‘B형 남자’가 지니고 있는 ‘이기적’ 등의 속성들은 어디서부터 유래했을까?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 ‘남자 B형(성 염색체가 XY이며 혈액형이 B형인 현실 속 인물)’으로부터 왔을까?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현실에는 ‘B형 남자’는 극히 드물다. 약간 이기적인 성격의 ‘남자 B형’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은 바람둥이가 아닐 것이다. 바람둥이인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은 개성과 주관이 뚜렷하지 않을 수 있다. 개성과 주관이 뚜렷한 사람일지라도 ‘B형 남자 공략법’에 적혀있는 대로 쉬운 남자는 아니다. B형 남자 신드롬의 주인공인, B형 남자의 속성을 모두 갖춘 모범적인 남자 B형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원본이 중요하지도 않다. 사람들은 B형 남자의 이미지에 맞춰 현실 속 실재하는 남자 B형과 상호작용하고 그들을 해석한다. B형 남자의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대중문화와 소비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했다. 말하자면 ‘B형 남자의 이미지가 남자 B형의 실재를 대체하는 과정’이 시뮬라시옹이고, ‘B형 남자의 이미지’가 시뮬라크르다. 현대인은 실재인 본질을 보기보다도 “쟤가 B형이라서…”, “쟤는 B형답지 않게…”하는 식으로 가상실재인 시뮬라크르의 미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혈액형의 예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예가 우리 일상 속에 있다. 몇 년 전 SNL Korea의 ‘유병재의 극한직업 – 조성모편’에 있었던 에피소드이다. 히든싱어에서 모창자에게 밀려 탈락했던 조성모는 이후 모창자에게서 ‘조성모처럼 노래하는 법’을 배운다. 모창자는 조성모 본인에게 “조성모는 그렇게 안 불러요, 좀 더 조성모처럼 부르라니까요.”라며 역정을 내며 가르치고 조성모는 모창을 보고 따라한다. 진짜가 가짜에게 배운다. ‘조성모스러움’이라는 시뮬라크르가 ‘조성모’의 실재를 이겨낸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조성모의 노래를 들을 때 “이 노래가 얼마나 조성모스러운가?”를 바탕으로 해석한다. 조성모가 새로운 창법으로 노래를 부른다면 ‘조성모스럽지 않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이와 같은 사례는 흔하게 관찰된다. “남자답지 않게…”, “여자는 이래야지…” 본질은 같다. 문화에 의해 규정된 ‘~스러움’이 어느새 현실의 존재를 찍어 누르고 만다. B형 남자스러움이, 조성모스러움이,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B형 남자를, 조성모를, 남자와 여자를 얽매는 것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시뮬라크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관념을 창시한 보드리야르 본인은 ‘우리는 영원히 시뮬라시옹와 시뮬라크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고 말하며 현대 소비사회는 이러한 의미에서 ‘끝장’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알면 대처할 수 있다. 무엇이 허상인지 알면 진실을 가려낼 수 있다. 어차피 저항할 수 없는 것 알아 무엇하겠냐고 손을 놓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리가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