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겨야 하는가 – 킹메이커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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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총선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KBS에서 선거를 앞두고 한 특집 드라마를 방송했습니다. 제 기억 선상에서는 ‘흑풍’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은 정치인으로서 여러 선거 운동 과정에서 별의 별 작전을 다 펼치며 상대방을 물 먹이며 당선되는데 성공했던, 그러다가 대차게 배신당하고 패가망신하는 스토리였습니다. 주연은 신구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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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드라마를 보면서 처음으로 선거란 저런 거구나 싶어 입을 벌렸던 기억이 납니다. 1981년만 해도 선거철 되면 막걸리 잔치가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풍경이 흔했고, 누구는 뭘 돌렸네 누구는 뭘 줬네 수군거림도 적잖았기에 아주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도 않았구요. 그 드라마에서는 경탄할만한 수법이 등장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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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당 선거운동원이라며 어느 집에 들어가 1000환짜리 지폐를 줍니다. 받은 사람 입이 헤 벌어졌을 때 다시 들어갑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며 봉투가 바뀌었다며 다른 봉투를 내밀죠. 그 봉투에는 100환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아줌마의 분기탱천 절규 “아니 어느 집엔 천 환을 주고 우리는 백 환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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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온갖 기상천외한 선거전술이 등장했는데 저는 그로부터 10여년 뒤 <남산의 부장들>을 읽으면서 그것들이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음을 알게 됩니다. 이름은 엄창록이라고 했지요, 김대중의 1급 참모였다가 어떤 이유로 틀어지고, 이후 박정희 정권으로 넘어갔다는 간략한 이야기가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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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메이커>는 이 엄창록과 김대중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입니다. 실명 거론이 어려운 한국적 특성상 서창대와 김운범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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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화를 보면서 엄창록이라는 사람을 다시 주목해 보게 됐습니다. 그는 일단 이북 사람입니다. 함경북도 경성 사람이고 인민군으로 복무할 때는 심리전 대원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경로로 남한에 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강원도 인제에 정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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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수복지구, 즉 전쟁 이전에는 38선 이북이었던 곳이죠. 선거도 1950년대 말이 돼서야 치러지기 시작합니다. 1961년 2대 민의원 선거에는 전라도 말씨 쓰는 젊은 정치인 하나가 출사표를 던지니 그가 김대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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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서창대, 즉 엄창록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 고향이 이북이지만 사투리 안씁니다. 빨갱이 소리 들을까봐 고쳤습니다.”(워딩은 다를 수 있으나 대충 이런 취지입니다) 함경도 말씨도 동부 한국말 특유의 억양이 있어서 고치기 힘든데도 꽤 능숙한 표준말을 구사하는 걸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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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그는 남한 사회에서 뿌리가 없는 부평초 신세였습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일 뿐 아니라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도 말 못하는 신세이기도 했고 고향을 지워야 살수 있었던 ‘소수자’이기도 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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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김대중 선거운동 진영에는 호남 사람들 뿐 아니라 열성적인 부산 여직원도 끼어 있습니다. 어쨌건 그들은 모두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서창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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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을 혐오한다고 선언하고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연구하고, 그 방법이 정당한지 부당한지에 대해 굳이 잣대를 들이대지 않습니다. 피난 나왔던 수십만의 이북 사람들이 이남에서 비슷하게 살아내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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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는 김운범(김대중)과 서창대(엄창록)가 부딪치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졌지만 잘 싸웠다.”를 미워한다는 서창대에게 김운범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어떻게 이기는지가 아니고 왜 이겨야 하는지가 중요한 법이오.” 서창대가 당신도 이기기 위해 나를 쓴 거 아니냐고 반박했을 때는 김운범도 대꾸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김운범에게는 ‘선’이 있었던 것이죠. 이기기 위해서 못할 짓이 없다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서 이기면 뭐하냐 싶은 영역에 들어서는 것은 거부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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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는 편입니다만 정치인으로서의 김대중이 영화 속 김운범처럼 반듯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권모술수에도 능했고 말을 바꿀 줄도 알았고, 서창대를 버렸듯 자신의 정치적 운신에 저해되는 사람을 잘라내거나 밀쳐내기도 했던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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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서창대는 그러면서도 비전과 소신의 정치를 보여주던 김운범에게 충성했지만, 그의 금단의 영역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던 것이고, 이를 용납하기 어려웠던 김운범으로서는 그를 저쪽의 수완가들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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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서창대는 지역감정을 이용한 선거 운동을 기획한 것으로 나옵니다. 사실 지역 정서는 이미 윤보선과 박정희가 맞붙던 시절에도 있었고, 전라도에 대한 정신질환적 차별 정서는 자유당 때에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1년도에는 단순한 감정의 발산이 아니라 정치적 전략적으로 그 속을 긁어대고 주물주물 키워내는 기획이 분명히 들어갔었고, 그 기획의 주역이 서창대(엄창록)였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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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대목에서도 그의 출신이 한 번 더 떠올려집니다. 이북 출신으로서 남한 전체가 타향인 그에게 고향 따져 사람들이 갈라지는 모습,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공작이 그렇게 민감하게 다가서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하나입니다. 김운범과의 이별 장면이라 할 서재씬에서 서창대는 별안간 이북 사투리를 쓰죠. 마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듯이. "느이들은 기래도 고향이 있지 않나."는 느낌.
하지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같이 보이는 사람)이 “어차피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 동서로 한 번 더 갈라진다고.....”라고 뇌까릴 때 서창대의 표정을 보면 “아 내가 선을 넘었구나.” 하는 느낌이 표현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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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인물 엄창록은 1971년 대선 이후 거의 은둔 생활을 합니다. 김대중과 그 사람들과는 한 번도 만나지도 않고 피해다녔고, 그렇다고 중앙정보부나 안전기획부에서 한 자리 하며 안락하게 지내지도 않았죠. 어쩌면 그 역시 하나의 선을 지킨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지보다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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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 영화 재미있습니다. 설경구는 거의 김대중에 빙의된 연기를 보여 줍니다. 전라도 사투리 네이티브들이 들으면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듣기엔 훌륭했고 김대중의 언어 습관까지도 연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 극장 나들이 하셔도 후회는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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